이.탈.리.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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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4. 09:26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진정한 후계자는 이러한 범유럽적인 '미켈란젤로적' 마니에리즘이 아니라 이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던 틴토레토(1518-1594)이다. 베네치아는 군주의 궁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처럼 외국의 궁정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 아니,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작품 주문을 의뢰받은 것도 그의 만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궁정이나 국가 대신에 주로 교우회의 일을 맡았다. 그이 예술의 종교적 성격이 주문자의 요구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와 정신적으로 가까운 집단에서 고객을 골랐기 때문인지는 확언하기 힘들다. 아무튼 그가 비록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미켈란젤로와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종교적 재생을 깊게 표현한 이탈리아 유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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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의 마니에리즘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2. 16:16
주로 1520-30년의 10년 동안에 걸쳤던 피렌체 마니에리즘의 비교적 짧은 제1기는 르네상스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반동이었는바, 이 경향은 16세기 중엽에 절정을 이룬 제2기에 와셔야 브론치노와 바사리를 중심으로 고조・강화되었다. 그러니까 마니에리즘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하나의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한 예술발전상의 단층을 동시대인들은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미 바사리가 폰토르모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과거와의 단절로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바사리는 폰토르모가 체르토사 디 발 데마의 벽화에서 뒤러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또래의 사람들 곧 1500~10년에 태어난 세대가 다시 높이 평가하게 된 고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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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리즘의 예술이론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1. 12:24
예술이론에서도 일반적인 정신적 위기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르네상스의 자연주의, 철학적 용어를 빌리면 르네상스의 '소박한 독단주의' 와는 반대로 마니에리즘은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 즉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르네상스에서 자연은 예술적 형식의 근원이었고, 예술가들은 자연에 산재해 있는 미의 요소들을 수집・정리하는 '종합'의 행위를 통해 형식을 획득하였다. 그러니까 예술의 패턴은 비록 주관에 의해 조직되지만, 그 원형은 이미 객관 속에 있었다. 매너리즘은 이러한 예술의 모사설을 파기한다. 새로운 이론에 의하면 예술이 '자연을 따라서'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자연과 함께' 창조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로마조와 페데리코 주카리는 모두 예술의 근원은 자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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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8. 08:58
결혼생활과 사랑 그러나 상상력이 지배자의 모습을 하고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남녀 간의 교제에 대해서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세 시대는 통상적인 매춘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매독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 온갖 종류의 매춘에 대한 비교 통계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서 특징으로 보이는 것은 결혼과 그 권리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어쨌든 더욱 의식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조심스럽게 제외되어있던 높은 신분의 처녀들에 대해서는 관찰이 되지 않는다 모든 정열은 결혼한 여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결혼이 명백하게 감소하지 않았다는 것, 가족 생활이 광범위하게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주 멋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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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예술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6. 23:49
트렌토 종교회의는 예술에서의 형식주의와 감각주의를 모든 면에서 혐오하였다. 이 종교회의의 정신에 입각해서 질리오는 화가들이 소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만 그들의 뛰어난 기예의 숙련만을 과시하려 한다고 불평을 하고 있다. 기예적인 숙련에 대한 이와 같은 반발과 직접적인 감정 내용에 대한 요구는 종교회의에 의한 교회음악 정화운동, 특히 음악적 형식을 가사의 내용에 종속시키고 지오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를 절대적인 모범으로 인정한 사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트렌토 종교회의는 그 도덕적인 엄격주의와 반형식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운동과는 달리 예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에라스무스의 저 유명한 "루터주의가 지배하는 곳에 문예는 소멸한다"라는 구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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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토 종교회의와 예술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4. 23:19
트렌토 종교회의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최대 수련장이 되었다. 이 회의는 교회제도와 신앙의 기본 원칙을 현대 생활의 여러 조건과 요구에 적응시키는데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조치들을 냉철하고도 실무적인 태도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정통적인 신앙과 이단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고자 하였다. 카톨릭교회로부터의 이탈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이러한 폐해가 계속적으로 확대되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주어진 상황에서는 대립관계를 얼버무리기보다 그것을 강조하는 편이 더 현명하고, 신도들에 대한 요구조건을 완화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가중시키는 편이 더 바람직한 일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견해의 승리는 통일된 서양 기독교 세계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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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 정치의 이념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3. 08:24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콘타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카톨릭 개혁운동의 '인문주의적' 제1기는 종말을 고한다. 개명되고 인간적이며 관용적이던 사톨레토, 콘타리니, 폴레 들의 시대도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현실주의의 원리가 승리를 구가했다.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을 정복할 능력이 없음이 입증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이미 관용적인 르네상스에서 비관용적인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1542년에는 종교재판제도가, 1543년에는 출판 검열제도가 실시되었고 1545년에는 트렌토 종교회의가 열렸다. 레겐스부르크에서의 실패는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고 권위와 권력에 의해서 카톨릭의 재건을 기도하도록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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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 22:19
비토리아 콜론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갖추고 특히 종교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 역시 1538년 이후로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화가 프란체스코 데 홀란다는 한 친구에게서 이들 친우들의 종교적 열정에 대해 전해 듣고 그의 [회화에 관한 대화]에서 이를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그는 몬테 카발로에 있는 산 실베스트로 성당에서 당시 유명했던 한 신학자가 사도 바울의 편지에 관해 이야기하던 집회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마 콜론나를 중심으로 이러한 모임에서 그의 정신적 부활과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정신주의적 양식을 낳은 결정적인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겪은 이러한 종교적 발전은 르네상스에서 반종교개혁운동으로 이행하는 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