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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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이후의 로마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13. 00:25
기원전 121~88 그라쿠스 형제의 정치 경력은 로마 공화정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개혁들이 왜 실행하기 어려웠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아무리 이타적인 혹은 애국적인 동기에서 일으킨 개혁이라도 로마 귀족 집단 내부의 개인적이고 파당적인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공화정 체제는 이런 위기를 겪는 동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라쿠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 역시 문헌 자료가 뒤죽박죽이다.) 옵티마테스(귀족파)와 포풀라레스(평민파) 그라쿠스 형제 이후의 정치 투쟁들을 분석할 때는 그 주역들은 둘로 나누어 진다. 그라쿠스 형제의 예를 따라 유권자들이나 잠재적 유권자들 중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는 집단들을 무마하기 위한 개혁과 정책을 촉진시킴으로써 여론의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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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와 농지개혁 II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12. 13:10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집행하도록 구성된 농지 분배 위원회가 입안자의 사후에도 활동을 허용받은 것은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에 반대해 조성되었던 반감이 개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대나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기반하지 않고 개인적이고 파벌적인 정책에 기초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개혁으로부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거둘뻔한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더 이상 그의 정적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자진해서 호의를 베풀고 토지를 분배 받은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피호인들을 확보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 임면된 농지 분배 위원회 위원들은 티베리우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6년만에 7만 5천 명이 넘는 인구를 정착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군 복무가 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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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문화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8. 20:25
기원전 300~100 로마와 로마의 문화는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제패하고 해외제국을 건설하면서 유입된 부는 로마시의 물리적 확장과 건축의 발달을 가져왔다. 남 이탈리아, 시칠리아,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의 세련된 그리스인들과의 빈번한 접촉도 초기 로마의 수준을 넘어서 전반적으로 문화 생활이 향상되는데 기여했고, 이로써 지중해 전역을 무대로 하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생성과정이 시작된다 A pair of terracotta winged-horses c. 350 BC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Tarquinia) 주화의 발달 마지막 에트루리아 왕을 몰아낸 뒤(bc500년 경), 로마인들은 농업 경제로 되돌아갔는데, 그것은 토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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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제국주의가 로마 국내 정세에 끼친 영향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8. 02:22
로마는 전쟁과 정복으로 지중해 세계에서 패권을 쥐었고, 그러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작하고 헬레니즘 세계 군주들이 지속해온 정치, 경제적 통일을 완수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이래 불과 한 세기 반도 되지 않는 기간에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제국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대단히 강력한 왕국들을 조공국으로 굴복시켰다. 금은과 노예들과 그밖의 조공들이 거대한 강물처럼 로마의 손아귀에 흘러들어왔다. 그 앞에서 국가들은 벌벌 떨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문화가 훨씬 다양해지고 세련돼 가는 동안, 세계 정복과 확장이라는 이 현상은 로마인들의 경제 사회 정치 윤리에 혁명적 파급 효과를 끼치기 시작했고, 이것이 공화정 자체가 몰락하게 되는 발판을 놓는다. 농업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농업 분야에서 발생했다.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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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포에니 전쟁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6. 16:48
기원전 149~146 히스파니아와의 전쟁은 기원전 133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그 뒤에도 아우구스투스 때까지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원로원은 기원전 197년에 독립된 속주들로 분할하고, 각 속주를 평시에는 프라이토르가 다스리되, 전시나 비상시에는 콘술의 권한을 가진 정무관이 다스리도록 했다. 속주 행정과 국방 비용은 조공과 정규 세금으로 충당했다. 기원전 195년에 신임 콘술 카토(Cato the Elder)가 5만의 병력을 이끌고 히스파니아 북동부에 도착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보다 더 항구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그의 경제 및 행정 개혁이었다. 유명한 개혁 호민관들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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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에서의 로마 제국주의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2. 20:47
기원전 200~133 Republican barbarous semis from Hispania. 209-200 B.C. Saturn head. Prow to left. 로마인들은 동방에서 영토를 인수하지 않는 방식의 제국주의를 추진하는 동안, 북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는 영토 인수에 초점을 둔 제국주의 정책에 열심이었다. 왜냐하면 경험상 로마의 안전에 치명적으로 중요한데다 잠재적 적의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지역들에 대해서는 통제권을 행사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농경 종족들로 느슨히 조직되어 있었다. 로마가 간접적으로 통제권을 행사할 만한 큰 도시국가들이나 영토에 기반을 둔 군주국이 없었다. 대리인으로 세울만한 정치 엘리트도, 평화 공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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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세계 (기원전 200~133)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7. 12. 13. 21:04
천재적인 군사전략가 알렉산드로스가 일으킨 제국은 지중해로부터 중앙 아시아와 북 인도로 확장해갔다. 기원전 323년 그의 사후 제국은 그의 장군들의 세력투쟁으로 분할되었다장군들 중 누구도 제국의 유일한 군주로 우뚝 서서 그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기원전 275년 전에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 선조가 된 세 개의 왕조가 강력한 왕국들을 수립했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마케도니아를 지배했고, 이따금씩 그리스 상당지역을 지배했다. Antigonus III Doson (Greek: Ἀντίγονος Γ΄ Δώσων, 263–221 BC)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퀴레네, 홍해와 동아프리카에 따라 설치된 교두보들, 페키니아, 에게 해의 여러 섬들, 소아시아 해안과 갈리폴리 반도의 일부 도시들을 지배했다. 셀레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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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FINALE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17. 23:10
마지막 접근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와 콘술에 선출되었다.원로원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두고 논쟁중이었다.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침공을 원했고, 원로원은 마지못해 아프리카 침공안을 승락했지만 병력 징집은 허락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민회에 직접 나가 원정 지원자를 모집하여 7000명의 입대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이미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두 개의 군단과 합류해 아프리카원정군을 형성했다.파비우스는 원정의 실패를 확신했으나, 그것은 스키피오의 비범한 과단성, 지략,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었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튀니지의 우티카 근처에 상륙하여 누미디아의 두 왕 시팍스와 마시니사의 분쟁에 개입했다. 두 왕이 모두 카르타고 총독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