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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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2. 7. 17:13
시스티나 성당은 1473년에서 1481년 사이에 오래된 옛 대성당(Cappella Magna)을 복원한 교황 식스토 4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보티첼리, 기를란다요를 포함한 화가들이 프레스코 벽화 시리즈를 그렸는데, 그림들은 1482년에 완성되었으며, 1483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기념 미사 때 식스토 4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식스토 4세의 치세 이래,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종교적·직무상의 활동을 하는 장소로서의 소임을 해 왔다. 오늘날에 이곳은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모두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적 의식인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기존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은 Pier Matteo d'Amelia 의 작품으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금빛 별들이 그려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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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II 세와 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1. 16. 15:12
1505년 3월,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II 세에 의해 로마에 초청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의 영웅적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교황과 예술가는 두 사람이 모두 장대하고 격렬한 기질이었으므로 서로 충돌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의기충천하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항상 거대한 계획이 용솟음쳤다. 율리우스 2세는 고대에 필적하는 자신의 분묘 작업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려고 생각했고, 이 착상에 열광한 미켈란젤로는 40개 이상의 조각상을 포함하는 거대한 건조물을 계획하였다. 감격한 교황은 필요한 대리석을 확보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카라라로 파견하였다. 미켈란젤로는 8개월 이상을 이 산중에서 보냈다. 격렬한 흥분 속에서 어느 날, '말을 타고 이 지역을 돌아보는 가운데 해안 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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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대결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1. 8. 06:07
1504년, 피렌체 정부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공동 작업을 위촉했다. 이것은 사실상 두 천재에게 경쟁을 시킨 셈이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예술과 고독이라는 공통점이 서로를 가깝게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타인들보다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서도 레오나르도가 더욱 고독하였다. 그는 이미 52세이며, 미켈란젤로보다 20세나 연상이었다. 30세에 피렌체를 떠나 있었던 그는 섬세하고 다소 소심한 성격이라 모든 일에 매우 민감했다. 회의적인 그의 지성은 어떤 일에나 쉽게 열광하는 이 지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딜레탕트,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절대적으로 고독한 인간은 조국이나 종교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보호자였던 로도비코 일 모로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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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첫 회화작품 <Doni Tondo>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29. 17:27
다비드의 명성은 이탈리아를 건너 프랑스에까지 전해졌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피사Pisa에 대항하여 연맹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프랑스 루이12세에게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다비드를 보내고 싶어 했다. 청동으로 제작한 중간 정도 사이즈를 주문하였는데, 다비드를 막 끝내고 창작력에 불타 있던 29세의 미켈란젤로는 (이미 교황 피오 3세를 위한 시에나 성당 작업이 밀려있었는데도) 이 청동 다비드, 대리석 성모자 Madonna of Bruges, 두 점의 대리석 성모자 원형 부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를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 양모협회가 주문한 12사제 대리석 작품 등을 모두 승낙했다. 주문을 잔뜩 받아놓은 그는 잠시 쉬는 의미에서 회화작품을 하나 완성한다. 미켈란젤로의 단품으로는 유일한 회화작품인 는 아뇰로 도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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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25. 19:25
약속했던 시간은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장막이 쳐진 오페라 델 두오모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미켈란젤로의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아무 언급을 하지 않았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는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의 작업이 1464년부터 진행되다가 중단되었고, 1475년 다시 안토니오 로셀리노와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작업은 진행되지 않은 채 26년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위해서는 이전의 조각을 깎아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고,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다비드를 위해서는 대리석에 여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초기 작업에도 시간이 걸렸다. 작업을 위한 비계 위에서 돌 먼지를 뒤집어쓴 미켈란젤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비밀스럽게 작업했다. 전기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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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렌체에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21. 19:59
피에타 작업을 끝마친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꽤 많은 돈을 보낸다. 로마에서 그는 외롭고, 행복하지 않았다. 온 가족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었다. 가족들은 항상 그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그는 돈이 없을 때에도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그의 건강은 이미 악화되었다. 조악한 식사와 과로, 냉기와 습기가 건강을 침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꽤 심각한 병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부친은 '가난한 생활은 선하나, 궁핍은 악'이라고 편지로 꾸짖었으나 그는 자기의 건강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모든 고통을 참고 이겨 온 것은 모두 당신들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여러가지 걱정들도 모두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501년 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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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23세의 성취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14. 01:54
피에타Pietà 현재 바티칸시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작품 피에타는 그 아름다움이나 완전성에 대하여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보는 순간 누구나 알 수 있고,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1,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1498년 8월 27일 체결된 계약서에는 당시 로마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이자 산 디오니지의 수도원장이던 잔 드 빌레르 추기경, 보증인 야코포 갈리,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의뢰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훨씬 전에 확정되었던 것 같다. 그 해 4월에 이미 미켈란젤로는 카라라에서 대리석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작품의 높이가 174cm에 이르는 이 카라라산 하얀 대리석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손으로 조각되고 구석구석 연마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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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방황기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3. 14:56
피렌체의 우환을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떠났던 세 친구는 다시 볼로냐로 향한다. 베네치아의 높은 물가를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볼로냐 당국은 오른손 엄지손톱에 붉은 밀랍 표시를 받은 외지인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고 있었는데,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던 세 사람은 여관에서 허가청으로 보내졌다. 이 곳에서 우연히 만난 예술애호가의 보증으로 체류허가를 받게 되고,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잔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가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집에 일 년 가량 머물렀다. 알도브란디는 일찌감치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즉시 볼로냐 시에서 필요로 하는 작업에 투입시킨다. 니콜로 피사노가 작업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