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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대결
    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1. 8. 06:07

     

    1504년, 피렌체 정부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공동 작업을 위촉했다. 이것은 사실상 두 천재에게 경쟁을 시킨 셈이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예술과 고독이라는 공통점이 서로를 가깝게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타인들보다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서도 레오나르도가 더욱 고독하였다. 그는 이미 52세이며, 미켈란젤로보다 20세나 연상이었다. 30세에 피렌체를 떠나 있었던 그는 섬세하고 다소 소심한 성격이라 모든 일에 매우 민감했다. 회의적인 그의 지성은 어떤 일에나 쉽게 열광하는 이 지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딜레탕트,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절대적으로 고독한 인간은 조국이나 종교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보호자였던 로도비코 일 모로의 실각으로 인하여 그는 1499년 밀라노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1502년에 체사레 보르지아 휘하에서 일하게 되었다. 1503년 보르지아의 정치적 생명이 종말을 고하자 그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침울하고 열광적인 미켈란젤로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아니꼽게 보이는 미소가 미켈란젤로를 여지없이 분격하게 하였다. 열성과 신앙에 몸을 바쳐온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열성과 신앙의 적을 가장 미워하였고, 열성도 신앙도 없는 자를 적 이상으로 미워하였다. 레오나르도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미켈란젤로는 더 큰 반발을 느꼈다. 

    그의 적개심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훌륭한 용모에 품위 있고 인상이 좋은 풍채였다. 어느 날 그는 한 친구와 함께 시내를 거닐고 있었다. 그는 무릎까지 덮이는 붉은 코트를 입고 가슴에는 보기 좋은 긴 수염이 굽실거리고 있었다. 산타 트리니타 가까이 왔을 때, 몇 사람이 모여 단테의 시 구절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레오나르도를 불러 그 구절의 해석을 부탁하였다. 마침 이때, 미켈란젤로가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구는 마침 저 사람, 미켈란젤로가 설명해 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신랄하게 대꾸하였다. "당신이 설명해 주면 될 것 아니오, 말의 원형을 만들어 놓고 주물을 뜰 줄도 몰라서 창피하게 중단해 버린 훌륭한 당신이."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레오나르도는 어이없어서 얼굴만 붉히고 서 있었다. 그런데도 미켈란젤로는 성이 풀리지 않아 견딜 수가 없어 뒤돌아 보고 이렇게 외쳤다. "당신에게 그런 일을 시킨 그 밀라노 놈들이 큰 바보지!" 1

    이런 두 사람에게 피에로 소데리니 장관은 공동 제작을 시켜 대립하게 한 것이다. 팔라초 베키오의 회의실(la sala del Consiglio Grande) 을 장식할 벽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전투 장면 프레스코화를 위촉하였고, 곧이어 미켈란젤로에게도 맞은편에 다른 전투 장면을 맡겼다.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를 주제로 선택했고, 시에서는 준비작업을 위해 그에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작업장을 마련하여 주었다. 카시나 전투의 일화를 선택한 미켈란젤로를 위해서는 산트오노프리오Sant'Onofrio에 작업장을 안배했다. 

     

    대결이 시작되었다. 

     

    Leonardo da Vinci, Head study for The Battle of Anghiari

     

     

    Michelangelo, Male Back With a Flag

     

     

    레오나르도는 기마병들의 전투장면을 표현하고자 했고, 미켈란젤로는 강변에서 몸을 씻으며 쉬다가 갑작스러운 적군의 침입 경보에 놀란 병사들의 순간적인 장면을 선택했다. 

    모든 피렌체 시민들이 이 세기의 대결을 즐겼다. 레오나르도가 완벽한 스케치나 완벽한 구성의 초고를 그려내면, 미켈란젤로도 그에 못지않은 식이었던 것이다. 

     

     

    Leonardo Da Vinci, Study for The Battle of Anghiari

     

     

    Michelangelo, study for The Battle of Cascina

     

     

    벽화 구상을 위한 스케치를 보면 레오나르도는 격렬한 전투에 임한 말과 기병들을 균형 잡히고 조화롭게, 미켈란젤로는 마치 그림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병사들의 생생한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2

     

     

    Michelangelo,  Study for The Battle of Cascina

     

     

    두 사람은 계속해서 장면을 구상하고, 표정과 몸짓을 연구하고, 스케치했다.

     

     

    Leonardo Da Vinci,  Study for The Battle of Anghiari

     

     

    Leonardo Da Vinci,  Study for The Battle of Anghiari

     

     

    Leonardo Da Vinci,  Study for The Battle of Anghiari

     

     

    Leonardo Da Vinci,  Study for The Battle of Anghiari

     

     

     

    Michelangelo,  Study for The Battle of Cascina

     

     

     

    Michelangelo,  Study for The Battle of Cascina

     

     

    Michelangelo,  Study for The Battle of Cascina

     

     

    그러나 애석하게도 

    1506년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피렌체를 떠났고, 미켈란젤로 역시 카시나 전투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교황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향했다. 이후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벽은 후대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장식됐지만, 최근 그 벽에서 다빈치가 개발하여 사용한 독특한 물감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고 복원을 검토하는 중이라고 한다. 3

     


    이렇게 미완성으로 남은 그림들은 사라지고, 두 거장의 연습 스케치, 후대 예술가들의 복제본, 판화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출처>

    1> 미켈란젤로의 생애 / 로맹 롤랑 

    2> 미켈란젤로 / 브루노 나르디니

    3> 전북대신문 [명화 탐방기② 앙기아리 전투, 카시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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