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16c - 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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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 가문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1. 1. 10. 18:38
사보이아 家 Casa di Savoia는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군주를 배출한,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왕조들 중의 하나이다. 거듭된 전쟁과 화재로 가문의 기원이나 족보 등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계보학자들 간에도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사보이아 Savoia(영문 Savoy)라는 이름은 현재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알프스 지방 사보이아 지역에서 유래되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달라지곤 하였으나 정설은 사보이아 왕가의 기원이 1023년 움베르토 비안카마노 백작(움베르토 1세)이 사보이아와 아오스타 등지에 봉토를 획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후 움베르토 1세의 후세들은 정략결혼과 국제 외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토와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125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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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국가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12. 28. 15:43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이 게르만인들에게 이탈리아를 빼앗긴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약 1,300여 년 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국가로 쪼개지게 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이렇게 분열된 도시국가들의 성장과 번영의 시기였다. 게르만인들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흡수한 프랑크 왕국이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로마와 주변지역을 교황령으로 떼어 주고, 교황 레오 3세가 카를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어 주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고, 이후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이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세력은 신성로마제국의 편을 드는 기벨린과 교황의 편인 구엘프로 나뉘었고, 왕, 추기경, 귀족을 임명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다투고 갈등했다. 결국 내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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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하는 영광 II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12. 22. 08:59
교황 레오 10세는 역사적으로 불명예스러운 교황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산 피에트로 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고,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이전까지 누려왔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상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탈 가톨릭 현상은 재정 문제로 이어져 유럽 각지에서 거두어들이던 현금 수입이 줄어들고,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개신교 쪽으로 넘어갔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교황 파울루스 3세는 1545년, 대책 마련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트렌토에 공의회를 소집한다. 세 차례에 걸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트렌토 종교회의)의 주된 관심사는 반종교개혁, 교황의 권위 회복과 가톨릭 전통의 재확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카톨릭 교회 내부 단속이 이루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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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하는 영광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12. 17. 19:49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대형 범선이 제작되고, 대양을 향한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진 15세기 말부터 유럽인들은 동방을 향한 항로 개척에 나섰다. 특히 일찍 통일국가를 이루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국가 차원에서 항해 탐험가들을 지원했다. 148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와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은 콜롬부스의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지원했던 국가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유럽의 군주국들 또한 신항로 개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해상 탐험은 “지리혁명”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럽 문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유럽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고대부터 르네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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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로마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9. 21:31
바로크가 대두하면서 현실도피적 경향을 밀어내고 등장한 현실 긍정적 태도는 무엇보다도 오랜 종교전쟁을 치르고서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의 징후이자 트렌토 종교회의 기간의 비타협주의를 대체하고 나타난 타협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교회는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되도록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비록 '이단자'들에게는 종전처럼 가혹한 박해를 가했지만 신자들에게는 점점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자기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자유를 허용하였다. 주위의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으며 세속적인 삶의 제반 관심사와 즐거움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거의 어디서나 교회가 국가적 차원의 교회가 되고 국가 통치의 수단이 되었는바, 이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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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적・ 카톨릭적 바로크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5. 14:14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 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크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 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 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와 카라치 일가의 주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예술관의 두 방향을 대표한다. 이들 두 방향의 어느 쪽도 매너리스트들의 높은 교양 수준에는 많이 뒤쳐지고 있다. 왜냐하면 카라치가의 아틀리에에서도 르네상스의 거장을 모방하면서도 비교적 단순한 것을 택하고 일반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은 표현하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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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재평가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8. 11:23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크의 재평가 17세기 예술이 총괄적으로 바로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크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18세기에는 아직도 그것은 당시의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서 보아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우며 기괴하게 느껴졌던 예술 현상에 적용되었다. 거의 19세기 말경까지 지배적이었던 이러한 개념에서 고전주의 자체는 제외되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입장은 물론이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까지도 근본적으로는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 의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바로크를 무규칙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이유를 붙여 비난했고, 그것도 바로크 예술가인 니콜라 푸생을 모범으로 간주하는 미학의 이름으로 비난했다. 부르크하르트나 베네데토 크로체 같은 뒷날의 순수주의자들(잡다한 현대적 경향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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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개념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5. 09:01
하나의 미술 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이 전 유럽에 골고루 퍼져 있던 분열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바로크는 본질적으로 좀 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유럽 각 문화권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다. 매너리즘은 비록 그것이 중세의 기독교적 예술보다 훨씬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고딕과 같은 범유럽적 현상이었다. 이와 달리 바로크는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궁정적・카톨릭적 그룹의 바로크가 시민적・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와 판이하게 다르고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이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과 다른 내적・외적 세계를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