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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국가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12. 28. 15:43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이 게르만인들에게 이탈리아를 빼앗긴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약 1,300여 년 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국가로 쪼개지게 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이렇게 분열된 도시국가들의 성장과 번영의 시기였다.

    게르만인들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흡수한 프랑크 왕국이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 로마와 주변지역을 교황령으로 떼어 주고, 교황 레오 3세가 카를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어 주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었고, 이후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이 중세 유럽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세력은 신성로마제국의 편을 드는 기벨린과 교황의 편인 구엘프로 나뉘었고, 왕, 추기경, 귀족을 임명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다투고 갈등했다. 결국 내란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중앙의 영향력이 약해지며 도시국가들이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황제와 교황 간에 되풀이되는 전쟁으로 치안이 위협받아 이탈리아 반도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 치안과 경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1176년에는 이 도시들이 모여 만든 롬바르디아 동맹이 승리하여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 대부분이 황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독립한 도시 국가들 중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와 같은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고, 이탈리아의 해안과 남부 지역에서는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해상공화국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방으로의 교역로를 통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이 이탈리아 내부로 유입되자 공화국들은 서로 원정과 전쟁들을 앞다투어 벌였으며, 주로 이 전쟁들을 통하여 교역로를 차지하고 경쟁국의 국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남부의 시칠리아에서는 9세기경에 무슬림들이 침입하여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웠다. 이 토후국은 11세기경에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와 함께 멸망당했다. 이후 남부 이탈리아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점차 하나의 세력 밑에 결집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호엔슈타우펜 왕가,  15세기부터는 아라곤 가문이 주도권을 쥐었다. 또한 사르데냐 지방에서 한때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도시들이 독립하여 따로 번영하였으며, 고도의 자치를 누렸다.

    1348년 즈음에 닥친 흑사병이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 사망시키며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나 이탈리아 반도는 전염병으로부터 빠르게 회복하였고, 도시들과 경제가 부흥하여 13세기와 14세기에 일어난 유럽의 문예 부흥 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서로 맞서 싸우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모여 이탈리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때 이탈리아 동맹의 가장 큰 권력가였던 피렌체의 로렌조 데 메디치가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을 견뎌 내고 이탈리아 동맹을 유지하는 등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이탈리아 동맹은 무너지고, 결국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발루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때문에 1500년대의 이탈리아는 유럽 각국들이 간섭하며 전쟁이 일어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 남부는 스페인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영광을 뒤로하고, 도시국가들은 각자의 침체기를 겪기 시작한다.

     

    반종교개혁 이후의 보수성이 문화적 쇠퇴를 야기한 원인이었다면 왕조 전쟁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는 정치적 쇠퇴를 야기한 원인이 되었다. 

    밀라노 공국

    1559년 4월 카토 - 캉브레시스 조약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 이상이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에 귀속되었다. 

    1563년 펠리페 2세는 이탈리아 통치위원회를 설치를 결정했고, 1674년부터 이탈리아 각지에 감독관을 파견하였다. 감독관의 권한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나 위원회 활동과는 별개로 스페인은 부왕이나 총독을 통해 이탈리아를 통치하였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 국가의 제도와 통치 기구들은 시민이 아닌 스페인의 왕조를 대변하는 역할로 전락해버렸다. 이따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스페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밀라노는 부왕이 파견되었던 사르데냐, 시칠리아, 나폴리와 달리 스페인 총독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다. 스페인 치하의 밀라노에서는 루이 12세가 설치한 통치위원회가 그대로 존속했다. 통치 위원회가 행정적, 사법적 기능을 수행했고, 재정은 별도의 재정 위원회가 담당했다. 재정 위원회 역시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 시기부터 국고와 세무를 담당하던 기구였다. 이에 더해 스페인 지배 시기에 각 계층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국가 회의체가 설치되었다. 이 모든 통치 기구의 권한이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빈번했으며 여기에 더해 교회의 관할권이 독립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후 1630년 페스트의 창궐로 인해 밀라노는 큰 폭의 인구 감소와 경제적 침체를 겪게 된다. 

    토스카나 대공국

    1569년 교황 피우스 5세의 칙령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이 성립된 이후 메디치가의 군주들은 토스카나 전역에서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카 공화국과 피옴비노 공화국같이 토스카나 안의 오래된 공화국들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초대 토스카나 대공이었던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했고, 국토 방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시에나, 아레초, 그로세토, 산 세폴크로에 있는 요새와 더불어 피사의 성벽 그리고 포르토페라이오, 엘바, 테라 델 솔레의 성채 등이 바로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그밖에 그는 중세부터 토스카나의 해안을 끊임없이 습격한 해적들로부터 대공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피사에 산토 스테파노 기사단을 창설하고 대규모의 갤리선 함대를 편성하여 운용하였다. 

    해안 경비의 강화는 상업 활동의 촉진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였다. 코시모 1세는 아드리아해의 교역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인해 막대한 국가의 부채를 모두 상환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코시모 1세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설립을 승인해 주었던 교황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재임기간 내내 토스카나 대공국의 영토 안에서 로마의 종교재판소가 활발하게 기능하였다. 

    1562년 코시모 1세는 아들인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에게 대공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코시모 1세가 확립해 놓은 전제적 권력은 프란체스코 1세 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프란체스코 1세가 민중들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채 소수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또한 프란체스코 1세는 156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과 결혼한 이래 신성로마제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가신처럼 행동했고 이로 인해 토스카나 공국의 독립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1587 토스카나 대공의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도 1세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와 혼인시킴으로써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베네치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또한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리보르노에 수용함으로써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을 도모하였으며 재위기간 피사의 산토 스테파노 기사단이 알제리에 있는 지중해 해적들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1609 토스카나 대공 자리에 오른 코시모 2 메디치 역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페르디난도 1세의 대외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다. 

    나폴리 왕국

    나폴리 왕국은 카토 - 캉브레시스 조약의 체결 이전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503년부터 1713년까지 스페인에서 파견된 여러 명의 부왕들이 나폴리 왕국의 모든 행정적, 군사적 권한을 독점했다. 나폴리의 부왕은 기본적으로 스페인 왕조의 정책을 대변했지만 지리적 거리로 인해 상당한 범위의 자율적 권한을 행사했다. 부왕의 공식적인 임기는 3년이었지만 피에트로 알바레즈 디 톨레도와 같이 1532년부터 1553까지 21년 동안 부왕으로 재임했던 경우도 있었다. 피에트로 알바레즈는 재임 기간 동안 나폴리 왕국의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함으로써 마치 전제 군주와 같은 통치를 행했다. 

    스페인의 통치 기간 동안 나폴리 왕국은 사회적, 경제적 침체에 빠지게 된다. 가장 큰 원인은 스페인 정부의 수탈이었다. 

    수탈의 주체는 스페인 왕조만이 아니었다. 중세 이후로 로마의 교황들은 나폴리를 개인적인 봉토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폴리 왕국은 매년 교황령 국가에 적지 않은 세금과 공납을 바쳐야 했다.

    나폴리 왕국의 시민들은 스페인 정부의 수탈에 끊임없이 저항해왔다. 1647년 일어났던 마사니엘로의 민중봉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1621년 스페인의 왕위에 오른 펠리페 4세는 국내외적 위기에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카탈루냐의 반란이 일어났고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 전쟁이 적지 않은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펠리페 4세는 나폴리 왕국의 수탈을 통해 재정적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25세의 나이에 불과했던 마사니엘로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부왕의 군대와 싸웠다. 결국 부왕의 궁정을 장악하고 세금 제도와 사법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고용한 청부업자에게 암살된다. 결국 마사니엘로의 민중봉기는 나폴리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나폴리는 1631년 화산 폭발, 1647년의 마사니엘로 민중봉기, 1656년 페스트의 창궐을 겪으며 끝없는 침체에 빠져들었다. 

    이 같은 왕국 전체의 사회적, 경제적 침체에도 불구하고 수도 나폴리만은 커다란 번영을 누렸다. 이미 16세기부터 나폴리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행정적, 정치적 중심이었고, 바다 건너 외국과의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나폴리는 스페인, 네덜란드,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제노바 로마 그리스 심지어는 스페인의 적국이었던 프랑스인들까지 거주하는 세계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공무나 상업에 종사했으며 관광이나 여행을 목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들의 수도 상당했다. 한편 이 시기 이탈리아 남부 전역의 수많은 빈민들이 생존을 위해 수도 나폴리로 이주함으로써 빈부 격차의 문제가 하나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시칠리아 왕국

    시칠리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 왕조는 나폴리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시칠리아에서도 수탈을 자행했다. 매년 적지 않은 액수의 공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곡물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마사니엘로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647년 5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도 스페인의 수탈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팔레르모의 봉기는 마사니엘로와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제노바 공화국

    대서양 항로 개척과 오스만 투르크의 지중해 동부 진출 이후 제노바 공화국은 코르시카를 제외한 해양 무역거점을 모두 상실하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해군제독 안드레아 도리아가 통치권을 확득하면서 수립되었던 제노바와 스페인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본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계약을 맺은 용병대장이었던 안드레아 도리아는 1527년 프랑수아 1세의 지원 하에 제노바 공화국을 점령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프랑수아 1세와의 사이가 틀어진 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관계를 맺고 스페인의 해군제독으로 활약했다. 이때 제노바 공화국도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된다. 

    본래 제노바에는 중세 이후 알베르기라고 하는 소수 귀족 가문들의 모임이 정치적 권리와 공적을 독점하는 과두정치체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나 안드레아 도리아는 막강한 해군 용병 함대와 스페인의 지원에 힘입어 사실상 아무런 견제를 받지않는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안드레아 도리아의 독재에 다른 귀족 가문들이 반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안드레아 도리아는 반란 음모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숙청했다. 

    이 사건 이후 도리아는 베키오 포르티코라고 불리는 구 귀족 가문들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고 누오보 포르티코라고 불리는 신 귀족 가문들의 정치적 권한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신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구 귀족들이 진압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았다. 교황과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까지 개입한 끝에 결국 신흥 귀족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1576년 알베르기는 폐지되었고 구 귀족과 신 귀족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철폐되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서 구 귀족과 신 귀족의 구분은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제노바 공화국의 유일한 해외 거점으로 남아 있던 코르시카는 제노바의 통치에 되움이 되었다기 보다는 어려움을 가져왔던 요인이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코르시카 섬을 낙후된 상태로 방치하고 있었고 코르시카 성의 거주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미 카토 - 캉브레시스 조역이 체결되기 전부터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용병 출신이었던 삼피에로 코르소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목표로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의 힘을 빌어 스페인과 제노바 공화국의 연합군에 대항하였다. 카토 - 캉브레시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는 코르시카 섬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지만 삼피에로의 투쟁은 1567년 가문간의 암투로 인해 살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카토 - 캉브레시스 조약 체결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절반 이상이 스페인의 영향력하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외세로부터 실질적인 독립 상태에 있던 지역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와 아드리아 해에서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과 계속해서 대립하였는데 1613년 발발한 우스코치 전쟁이 대표적이다. 

    1626년 만토바 공작의 계승 문제로 다시 한 번 베네치아는 전쟁에 연루되었다. 만토바공국을 통치하던 페르디난도 곤자가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채 세상을 떠나자 만토바 공작의 상속권은 그의 조카 마리아 곤자가에게 넘어갔다. 이듬해 마리아 곤자가는 느베르 공작 샤를 곤자가와 결혼했는데 이로 인해 만토바 공국이 프랑스의 세력권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 북부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그리고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만토바를 지원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가 만토바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게 크게 패배한데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630년 페스트의 유행으로 인구가 급감함에 따라 베네치아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베네치아의 적은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레판토 해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이것이 곧 대립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드리아 해와 지중해 동부에서 베네치아의 함대와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는 해적들 사이의 다툼이 계속되었다. 1644년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가 크레타 섬의 칸디아 항구를 공격함으로써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크레타 전쟁이라 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몰타 기사단, 교황령 국가, 토스카나 대공국과 피사의 산토 스테파노 기사단, 그리고 프랑스와 연합하여 오스만 투르크에 맞섰다. 크레타 전쟁은 25년 동안 지속되었고 1645년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가 달마티아 공격을 단행하면서 전장이 베네치아 본토까지 확장되었다. 베네치아의 함대는 달마티아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1669년 칸디아 섬을 오스만 투르크에게 빼앗겠다. 그리고 1671년 강화조약의 결과 베네치아는 크레타 섬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칸디아 전쟁은 이미 이전 세기부터 진행되어 왔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베네치아의 해외영토는 지중해 동부의 티노스 섬과 키티라 섬 그리고 달마티아 뿐이었다. 1683년에서 1687년 사이 도제 프란체스코 모로시니의 지휘 아래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정복했는데 이것이 베네치아의 마지막 해양정복 활동이었다. 이전까지 해양 무역에 종사했던 베네치아의 귀족 계층은 17세기 중반 베네치아가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 자신들의 부를 내륙의 코지 구매에 투자함으로써 토지 귀족으로 변모하였다. 

     

     

    내용 출처>  위키백과 

                       이탈리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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