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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쇠퇴하는 영광 II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12. 22. 08:59

     

     

    교황 레오 10세는 역사적으로 불명예스러운 교황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산 피에트로 성당 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고,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이전까지 누려왔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상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탈 가톨릭 현상은 재정 문제로 이어져 유럽 각지에서 거두어들이던 현금 수입이 줄어들고,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개신교 쪽으로 넘어갔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교황 파울루스 3세는 1545년, 대책 마련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트렌토에 공의회를 소집한다.

     

     

     

    Portrait of Pope Paul III, Tiziano , 1543

     

     

     

    세 차례에 걸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트렌토 종교회의)의 주된 관심사는 반종교개혁, 교황의 권위 회복과 가톨릭 전통의 재확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카톨릭 교회 내부 단속이 이루어졌고, 1539년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는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립하여 청빈 생활과 독신, 선교활동,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내세우며 엄격하게 훈련된 엘리트 수사 집단으로서 위기에 처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강하게 옹호하였고 유럽 이외의 지역 선교 활동에도 주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파견되었던 반면 마테오 리치 등 이탈리아 선교사들은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단 근절"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이는 가톨릭 교의에 어긋나는 사상의 유통을 막는 사상탄압으로 확대되었다. 탄압의 수단은 검열과 파울루스 3세가 검사성성檢邪聖省이라고 명칭 한 종교재판소로, 1546년에는 금서목록까지 작성된다. 이 금서목록이 1965년까지 유지되었다. 여기에는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들의 모든 저작은 물론이고 교황이 지옥으로 떨어진 것으로 묘사한 단테의 <신곡>,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갈릴레이의 저작들이 들어 있었다. 

     

     

     

    Galileo before the Holy Office

     

     

     

    검사성성은 교의에 어긋나는 사상을 폭압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의해 우주는 무한하며 태양과 같은 항성이 다수로 존재한다는 <무한론>의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가 8년 동안 심문을 받은 끝에 로마 캄포 데 피오리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진다. 

     

     

    Giordano Bruno

     

     

     

    가톨릭 포교를 위해 수세기째 적극적으로 지원해 오던 예술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는데, 극단적으로 예술에 적대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가 교회를 장식하는 행위까지도 우상숭배로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다. 


    tuttitalia.tistory.com/360?category=197560

     

    종교개혁과 예술

    트렌토 종교회의는 예술에서의 형식주의와 감각주의를 모든 면에서 혐오하였다. 이 종교회의의 정신에 입각해서 질리오는 화가들이 소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만 그들

    tuttitalia.tistory.com

     

     

    이런 검사성성의 반동적인 사상탄압의 대표적인 예로는 17세기 나폴리 왕국에서 벌어진 <무신론자 재판>을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스콜라 철학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나폴리는 17세기 중반 이후 젊은 지식인들이 알프스 이북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에피쿠로스의 <원자론>과 데카르트의 철학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여 나폴리 전체의 문화적 쇄신을 이끌었다. 17세기 중반부터 나폴리를 "이단 사상의 용광로"라고 규정하고 감시하고 있던 검사성성은 이들에게 무신론의 혐의를 씌워 상황에 직접 개입했다. 이 종교재판은 1697년 종결되었지만 18세기 중반까지도 나폴리에서 종교재판은 계속되었다. 

    반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사상통제는 물질적인 , 문화적인 면에서 이탈리아의 쇠퇴를 야기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보통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1543년부터 뉴턴이 중력 법칙을 제시하는 1687 까지 유럽에서 이루어진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과학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탈리아 반도는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알프스 이북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었던 과학혁명이 기반이 되는 사상들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어 탄압 받았기 때문이다. 

    출처> 이탈리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루터의 종교 개혁을 시발점으로 전 유럽을 국제 전쟁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체제는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다. 종교는 더 이상 국가의 정체와 동일시되는 개념이 아니었고, 제국들의 세속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었고, 서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지는 권능 역시 이전에 비하면 크게 감소하였다. 이제 엄숙한 종교의 영향력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위대한 철학자들과 혁명가들의 다양한 사상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출처> fluorf.net/lectures/lectures2_2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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