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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과 예술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6. 23:49

     

    트렌토 종교회의는 예술에서의 형식주의와 감각주의를 모든 면에서 혐오하였다. 이 종교회의의 정신에 입각해서 질리오는 화가들이 소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만 그들의 뛰어난 기예의 숙련만을 과시하려 한다고 불평을 하고 있다. 기예적인 숙련에 대한 이와 같은 반발과 직접적인 감정 내용에 대한 요구는 종교회의에 의한 교회음악 정화운동, 특히 음악적 형식을 가사의 내용에 종속시키고 지오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를 절대적인 모범으로 인정한 사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트렌토 종교회의는 그 도덕적인 엄격주의와 반형식주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운동과는 달리 예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에라스무스의 저 유명한 "루터주의가 지배하는 곳에 문예는 소멸한다"라는 구절은 트렌토 회의의 결의사항에는 결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루터는 문학은 기껏해야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조형예술 작품에서는 칭찬할 만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카톨릭교회의 우상숭배를 이교도의 주물 숭배와 마찬가지로 타기하였다. 그런데 루터가 우상숭배라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실제로 종교와는 별 관계가 없던 르네상스의 종교 회화만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종교적 감정을 밖으로 표현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교회를 그림으로 단순히 장식하는 행위 자체까지도 이미 우상숭배로 보았던 것이다. 중세의 모든 이단적인 운동은 근본적으로 우상파괴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알비파, 발도파, 위클리프파 등은 예술의 광휘를 통한 신앙의 세속화를 강력히 반대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 이르면 초기 이단자들의 예술에 대한 경계심은 이제 완전히 하나의 우상 공포증으로까지 발전한다. 그중에서도 칼슈타트는 1521년 비텐베르크에서 성자상을 불태워버리게 하였고, 츠빙글리는 1524년 취리히 시당국을 종용해서 교회로부터 미술작품을 떼어내서 파괴하도록 했으며, 칼빈은 그림을 숭배하는 일과 예술작품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보았으며, 마침내 재세례파에 이르러서는 예술에 대한 적대감정이 문화 일방에 대한 적대감의 일부가 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의 이러한 예술 배척은, 예컨대 실제로는 우상파괴적이 아니라 단순한 정화운동적인 성격을 띄었던 사보나롤라의 예술에 대한 태도보다도, 심지어는 비잔틴의 우상파괴 운동 - 주지하다시피 이 운동은 그 화살이 우상 자체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우상숭배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 향했던 것인데 - 보다도 더 비타협적이고 철저하였다. 

     

     

    Trento 종교회의   1545 - 1563

     

     

     

    반종교개혁운동과 예술

    종교의식에서 큰 몫을 예술에 할애한 반종교개혁운동은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반대 입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예술에 적대적인 이단자들과는 달리 그들이 예술에 우호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중세와 르네상스의 기독교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한 발짝 더 나아가 예술을 이단자의 교리를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하려고 했다. 르네상스의 심미적 문화는 선전수단으로써의 예술의 가치를 더없이 높이 올려놓았다. 예술은 한층 신축성 있고 좀 더 독자성을 띠며 간접적 수단으로도 더 쓸모 있기 때문에 반종교개혁운동은 이런 면에서 중세가 알지 못하던 효과적인 민중 교화의 수단을 예술에서 발견했다. 반종교개혁운동의 근원적이고도 직접적인 예술적 표현이 매너리즘인지 아니면 바로크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양분되어있다. 연대적으로 보면 마니에리즘이 반종교개혁운동에 더 가깝고, 트렌토 종교회의 기간의 정신주의적 태도 역시 감각적인 바로크보다는 마니에리즘에서 더 순수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운동의 예술적 프로그램, 즉 광범위한 대중에게까지 예술을 통해 카톨릭교를 전파하는 것은 바로크에 이르러서이다. 트렌토 종교회의의 참석자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확실히 마니에리즘에서처럼 층이 엷은 지식인들을 상대로 하는 예술이 아니라, 바로크에 와서 실현을 보게 되는 민중적 예술이었다. 마니에리즘은 트렌토 종교회의 시기에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가장 활발한 예술형식이기는 했지만, 반종교개혁운동의 예술적 임무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 방향은 결코 되지 못했다. 마니에리즘이 바로크에 배턴을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마니에리즘이 반종교개혁운동이 제시한 교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낼 능력이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교회의 교리는 마니에리즘 예술가들을 지탱해줄 튼튼한 근거가 못 되었다. 트렌토 종교회의의 지침은 예술가들이 지금까지의 기독교적 문화와 조합적인 사회질서의 체계 속에서 누리던 사회적 위치에 대신할 어떤 것들을 그들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회의 지시들은 적극적인 성격보다는 소극적인 성격을 띠었고 교회예술을 제외하고는 예술가들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또한 당시처럼 예술의 구조가 복잡해진 상황에서는 예술과 예술가들을 너무 일률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오히려 자기들이 이용하고자 하는 예술 수단의 효용성을 쉽게 파괴하는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의식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명확히 교회 위주인 중세의 예술활동 규제와 맞먹는 규제는 당시의 여건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술가들은 설령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경우라도 현세적이고도 이교도적인 예술적 전통의 요소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표현 수단이 지닌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내적 모순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러한 갈등의 중압감을 견뎌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교적 세련에 도취하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도피하였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가 택한 길 역시 도피였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중세의 예술가가 미켈란젤로처럼 자신의 깊은 종교적 체험 때문에 예술적인 창작활동을 완전히 포기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단 말인가? 중세 예술가들에게는 종교적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예술적 창조의 영감을 얻어내는 원천도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충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진정한 창조적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한 예술가가 창작을 그만두는 순간 그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와는 달리 예술품을 더 이상 제작하지 않은 후에도 세인들의 눈에나 자기 자신의 눈에나 여전히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중세에는 미켈란젤로가 겪었던 바와 같은 양심의 갈등이란 생겨날 수도 없었는데, 그 까닭은 우선 예술가로서 예술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시대의 엄격한 사회질서 속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직업 이외에는 생존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16세기의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처럼 부유하고 독립적일 수 있었으며, 파르미지아니노처럼 돈을 물 쓰듯 하는 예술 애호가도 찾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폰토르모처럼 무수한 실패를 감내하면서 기존 사회의 가치관에서 벗어난 다분히 수상쩍은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고수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마니에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중세의 수공업적 예술가들은 물론이요 수공업적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던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도 여러 면에서 근거가 되었던 모든 요소들, 즉 사회에서의 견고한 위치, 길드의 보호, 교회와의 명확한 관계, 대체적으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아던 전통과의 관계 등을 거의 상실하였다. 개인주의 문화는 중세에는 이들에게 막혀 있던 무수한 가능성을 제공해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자유라는 진공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때로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상을 다시 정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16세기의 정신적 변혁기에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지도를 그대로 따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자신들의 내면적인 충동에만 의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와 강제의 틈바구니에서 찢겨졌고, 또한 정신적 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들에게서 처음으로 우리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 즉 생에 굶주려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도피적이며, 역사적으로 구속되어 있으면서 겁 없이 반항적이고, 노출증에 가깝도록 자신을 내세우는 주관주의와 더불어 마지막 비밀은 끝까지 감춰 두는 폐쇄성을 지니는 등의 내적 분열로 신음하는 예술가의 등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술가들 중에 괴짜와 기인, 정신병자의 수가 늘어난다. 파르미지아니노는 만년에 연금술에 심취했고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세간에서 보기에는 완전히 폐인이 된 모습이었다. 폰토르모는 유년시절부터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나이가 들수록 대인기피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폐쇄적이 되었다. 로소는 자살로 생을 마쳤고, 타소는 심한 정신병으로 죽었으며, 그레코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전혀 볼 수 없는 그리고 중세 예술가들이라면 밝은 햇빛 속에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을 보기 위하여 대낮에도 방안에 커튼을 치고 지냈다. 

     

     

    Parmigianino, Self-Portrait In A Convex Mirror, 1524 / Detail (unframed)

     

     

     

    Jacopo Pontormo,  Vertumnus and Pomona  (detail, reclining woman), 1519-21 / Detail 

     

     

     

    Fiorentino Rosso, Marriage of the Virgin 1523

     

     

     

    Portrait of Torquato Tasso, 1590

     

     

     

    El Greco, An Allegory with a Boy Lighting a Candle in the Company of an Ape and a Fool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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