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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 22:19

     

    비토리아 콜론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갖추고 특히 종교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모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 역시 1538년 이후로 그녀의 친구가 되었다. 포르투갈 출신의 화가 프란체스코 데 홀란다는 한 친구에게서 이들 친우들의 종교적 열정에 대해 전해 듣고 그의 [회화에 관한 대화]에서 이를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그는 몬테 카발로에 있는 산 실베스트로 성당에서 당시 유명했던 한 신학자가 사도 바울의 편지에 관해 이야기하던 집회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아마 콜론나를 중심으로 이러한 모임에서 그의 정신적 부활과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정신주의적 양식을 낳은 결정적인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겪은 이러한 종교적 발전은 르네상스에서 반종교개혁운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다만 특이한 점은 그 내면적 변천이 매우 정열적이고 작품을 통한 그 표현이 추호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자극에 매우 민감했던 것 같다. 사보나롤라라는 인물과 그의 운명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한평생 세상사에 대해 거리를 갖고 지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말미암았음이 틀림없다. 나이 들수록 그의 신앙심은 더욱더 깊어졌고 더 열광적・비타협적・독단적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어 그가 지녔던 르네상스적 이상을 축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예술활동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까지도 회의를 품도록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었다. 메디치가의 묘소와 시스티나 천장화의 삼각소간에서도 이미 안정감이 깨어진 매너리즘적 예술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1534~1541)에 오면 이러한 새로운 정신이 거리낌 없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다. 이제 이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더 이상 완성과 힘과 젊음의 기념비가 아니라 곤혹과 절망의 표현이며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혼돈으로부터 구원을 갈구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이다. 자신을 내바치고 속세적・육체적・육감적인 일체의 것을 자신 속에서 용해・소멸시키려는 욕망이 이 작품을 압도하고 있다. 르네상스의 구도에서 보이는 공간적 조화는 사라지고 그 대신 화면의 공간은 비현실적 비연속적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기준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통일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통일적 질서원칙의 의식적과장적인 침해와 르네상스적 세계상의 왜곡 및 파괴도 도처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원근법적환각주의적 효과의 포기에서 그러하며,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특징으로서는 구도의 상부에 있는 인물들이 작게 그려지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하부의 인물들에 비해서 너무 크게 그려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은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답지'않은 최초의 근대 작품이며, 이 점에서 아직 '아름답지'않았고 다만 표현력이 풍부했던 중세의 미술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은 중세의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이 작품은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형식에 대한 매우 힘들여 얻어낸 항의이자 일종의 선언이며, 그 선언의 형식 무시 자체에 모종의 공격적이고도 자기 파괴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보티첼리나 페루지노가 같은 장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예술적인 이상을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자신이 일찍이 그곳 천장 그림을 그릴 때 추구했던 목적도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예배당 전체의 존재 이유이자 르네상스의 모든 조형예술의 근원이었던 바로 그 '미'의 이념들까지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결코 무책임한 일개 괴짜의 실험작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가장 명망 높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서, 그것도 기독교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소인 교황의 개인 예배당의 정면 벽을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예술작품이었다.

     

    그야말로 한 세계의 몰락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파올리나 예배당의 벽화 즉 [성 바울의 회심]과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1542~1549)은 미켈란젤로 예술의 다음 단계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르네상스의 조화적인 질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화면의 인물들은 무언가 부자연스럽고 꿈속에서처럼 의지를 상실한 듯한 모습인데, 그들은 마치 도피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런 구속 아래 있고 그 원인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압박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부분에는 화면의 공간이 텅 비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꽉 차 있고, 황량하게 빈 부분 옆에 들어설 틈도 없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사람들이 마치 악몽에서처럼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공간의 시각적 통일성과 공간의 연속적인 관계는 폐기되고 공간의 깊이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찢어 여는 듯이 느껴진다. 대각선은 화면을 뚫고 지나가면서 공간을 삼키는 구멍들을 배경에 만들어낸다. 구도의 여러 공간적 계수들은 이제 다만 화면 인물들의 방향감각 상실과 고향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과 공간, 인간과 세계는 더이상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행동의 주인공인 사람들은 일체의 개인적 특성을 상실하고 있다. 나이나 성별 또는 기질 등을 나타내는 특징들은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은 보편성과 추상성 및 도식성을 지향하고 있다. 개성이라는 것은 다만 인간이라는 사실의 엄청난 의미 앞에서 그 빛을 잃고 있다. 파올리나 예배당의 벽화를 완성한 뒤,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대규모의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말년 15년 동안에 이룩한 작품으로 우리는 피렌체 대성당의 피에타(1556~1564), 그리고 몇 개의 십자가상 소묘를 들 수 있지만 이것들 역시 그가 이미 확립한 창작 태도의 실천에 불과하다. 

    게오르크 짐멜이 말한 바와 같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는 "영혼이 거기에 대항해서 자신을 지켜야만 할 일체의 물질적 소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으며, 육체는 자신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투쟁을 이미 포기했고, 현상은 비물질적・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거의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이다. 차라리 그것은 예술품에서 종교적 황홀경으로 나아가는 중간 상태에 가까우며 미적 영역이 형이상학적 영역과 맞닿는 영혼의 중간영역에 대한 둘도 없는 통찰이요, 감각적인 것과 초감각적인 것 사이를 왕래하면서 정신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뺏어낸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은 거의 무에 가까운 것으로서, 형식도 없고 소리도 없고 아무런 명확한 표현도 없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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