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군사전략가 알렉산드로스가 일으킨 제국은 지중해로부터 중앙 아시아와 북 인도로 확장해갔다. 기원전 323년 그의 사후 제국은 그의 장군들의 세력투쟁으로 분할되었다

장군들 중 누구도 제국의 유일한 군주로 우뚝 서서 그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기원전 275년 전에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 선조가 된 세 개의 왕조가 강력한 왕국들을 수립했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마케도니아를 지배했고, 이따금씩 그리스 상당지역을 지배했다.










Antigonus III Doson (GreekἈντίγονος Γ΄ Δώσων, 263–221 BC)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퀴레네, 홍해와 동아프리카에 따라 설치된 교두보들, 페키니아, 에게 해의 여러 섬들, 소아시아 해안과 갈리폴리 반도의 일부 도시들을 지배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소아시아의 서부와 남부를 포괄하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과 시리아 북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를 지배했고 한번은 인도 북서부, 아프가니스탄,

쿠르케스탄까지 지배했다.












                                                                                         Seleucia, Seleukos IV







헬레니즘의 작은 국가들 중에는 페르가몬Pergamon이 있었다. 농업과 융성한 해외교역으로 부를 얻은 페르가몬은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로 꽃피었고, 헬레니즘의 수호자가 되었다.










Temple of Trajan at Pergamon









Theatre of Pergamon





작지만 또 다른 중요한 국가는 섬나라 로도스 공화국이었다. 로도스 공화국도 페르가몬처럼 찬란한 문화중심지였지만, 오로지 해상교역을 통해서 경제번영을 이룩했고, 규모는 작지만 효율적인 해군이 해상교역을 보호했다.









The Colossus of Rhodes






그리스에는 한때 강성했던 도시 국가들인 테베, 아테네, 스파르타가 여전히 불확실하나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작은 국가들의 존립은 기원전 277-225년에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라는 세 강대국 사이에 이루어진 힘의 균형에 의존했다.

만약 세 강대국 중 어느 하나가 세력과 영토 확장에 성공하면 나머지 두 나라가 힘을 합쳐 그 나라를 견제했다. 

이 세력 균형이 깨지자 페르가몬, 로도스, 그리스 동맹들, 이집트는 거듭해서 로마에게 세력 균형을 복원하는데 힘써달라고 호소했다.




이 국가들은 궁극적으로 크든 작든 모든 나라들이 로마의 지배에 종속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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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북서쪽으로 96km 떨어져있는 움브리아주(州) 오르비에토는 절벽위에 세워진 신비한 도시.


































로마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여 달려와서 오르비에토 버스정류소에 내리면, 다시 산악궤도열차를 타야 오르비에토 두오모에 갈 수 있다. 

테너 파바로티의 음성으로 즐겨 들었던 이탈리아 민요 ‘푸니쿨리 푸니쿨라’의 본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푸니쿨리차를 타고 7, 8분 올라가면 오르비에토 성문에 다다른다.  

고도 300m의 화산암에 자리잡은 오르비에토 성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큰 도로하나 없이 푸른 나무에 둘러싸인 중세의 돌집, 벽돌집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텍스트 출처: 다음카페 '오늘보다는 내일을'













이탈리아에서 두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오르비에또의 두오모(대성당)는 1290년 건축을 시작해 3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swityjinny/220412089568

             http://blog.naver.com/eleticia/220035584649

베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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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이탈리아가 나오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래 내가 저기에 있었어!" 모든 것을 태워버릴듯한 이탈리아의 뜨거웠던 햇빛이 그리고 그 햇빛에 무심하게 녹아버린 올드 브릿지 레몬 젤라또의 시큼달달한 맛이 생생한데 벌써 3개월이나 되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3개월이나 지난 이야기를 이제서야 블로그에 끄적거리자니 자못 민망한 생각이 들지만 어떠하리. 이 포스팅을 통해 애써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보며 3개월 전을 상기해 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Ciao~! 드디어 이탈리아!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을 이용한 우리는 두바이를 거쳐 무려 19시간만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두바이까지는 거의 기절한 덕분에 두바이에서 베네치아까지는 말짱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여행 책자를 뒤적이며 착륙을 애태워 기다렸다. 이윽고 도착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방송되고 마르코 폴로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꾸물댈 시간은 없다. 짐을 찾자마자 숙소가 있는 메스뜨레역으로 이동했다.



 


이탈리아까지 19시간의 여정.

창 밖의 멋진 구름도 질려갈 즈음 이탈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본섬으로

메스뜨레역의 숙소에 짐을 풀고 산타루치아역으로 이동했다. 베네치아에서의 일정이 1박에 불과했기에 본섬 골목골목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산타루치아역에서 산 마르코 광장까지 우리는 두 다리만으로 본섬을 가로질렀다. 베네치아의 이색적인 풍광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회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다.(이탈리아의 여름 해는 9시가 다 되어서야 저문다.) 저녁 8시 반, 이제는 밥을 먹어야 한다.






 

메스뜨레역에서 산타루치아역까지 트랜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이동 방법은 다양하지만 트랜 이탈리아를 추천.

 



산타루치아역을 나오자마자 너무나도 이색적인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베네치아 골목 곳곳에 기념품 판매점이 즐비하다.

베네치아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기념품들 중 무엇을 골라야할까?






좁고 복잡한 베네치아의 골목골목을 헤메다 만난 산 마르코 광장은

좁은 골목과 대비되어 무척 넓어보였다. 그리고 비둘기가 정말 많더라.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산 조르조 마조레 섬.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이 소장 된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이 보인다.

 

 


이탈리아의 첫번째 레스토랑 펠리체

음식은 여행의 재미 중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리 흥미로운 여행지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그 만족도가 떨어지기 마련. 다행히도  우리는 이탈리아 음식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본섬 골목골목 마다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나처럼 '결정 장애'가 있다면 선택에 곤욕을 치를 수 밖에. 하지만 다행히도 지인의 추천을 받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펠리체를 방문할 예정이었고 구글맵의 힘을 빌어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펠리체의 웨이터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했다. 웨이터들이 호객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친구 좀 과하다. 친한척 안해도 어차피 너네 레스토랑에서 밥 먹으려고 했단말이다! 여튼 배가 부른 관계로 샐러드, 까르보나라 그리고 음료를 주문했다.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한 펠리체의 웨이터.

과하게 친한척 하더니 막상 들어간 뒤로는 본체만체하더라.

 



계란 노른자만을 사용해 맛을 낸다는 까르보나라. 지인이 강력 추천한 메뉴가 바로 이 까르보나라였다. 그동안 크림 베이스의 파스타는 워낙 자주 먹어왔기 때문에 최근에는 기피하는 편인데, 워낙 강력 추천을 한터라 주문했다. 하지만 그 맛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고소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짠맛과 느끼한 맛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이탈리아 현지 파스타가 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각오했지만 그럼에도 짰다.



 






우리 나라와 그 맛이 다른 계란 노른자만으로 맛을 낸 까르보나라.

기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입에 맞지 않았다.

 


샐러드는 좋았다. 익숙한 맛에 양이 굉장히 많았다. 발사믹 소스의 맛은 익숙했고 입맛을 돋우기에 좋았다. 우리나라 여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2만원 가량의 샐러드를 주문하면 딱 펠리체 샐러드의 절반만큼 주는 것 같다. 그만큼 샐러드 볼 자체가 광장히 크고 깊었다. 사실 이후로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대부분 레스토랑이 저렴한 가격에 이렇게 많은 양의 샐러드를 제공하고 있었다. 채소 값이 싼 것일까?



 




이탈리아는 샐러드 양이 정말 많았다.

발사믹 소스의 맛이 좋았던 해산물 샐러드.

 


 

낮과 또 다른 느낌, 베네치아의 밤

아쉬운 맛과 들어 온 이후로 큰 신경 쓰지 않는 웨이터까지 이탈리아에서의 첫 끼니는 아쉬움이 컸다. 펠리체를 딱히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고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도 베네치아의 야경 앞에 사그러 들었다. 골목을 헤메느라 지친 우리는 바포레토에 몸을 실었다. 그 뜨거웠던 태양이 바다 뒤로 넘어가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주황빛 조명에 비춰 부분부분만 보이는 베네치아의 건물들은 선명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낮의 모습과는 다른 매력을 뽐냈다.

 


 










베네치아의 밤은 운치있고 아름다웠다.

 


 

베네치아에서의 하루가 지났다. 짧은 일정 때문에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끼니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베네치아의 분위기에 취해 그저 좋았다. 베네치아에서의 일정은 1박 2일. 짧은 일정으로 이탈리아만을 여행하는 우리는 여행 첫날부터 한달 혹은 그 이상씩 유럽 여행을 다니는 대학생들이 부러워졌다. 그렇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Info. 베네치아 레스토랑 펠리체(Felice)

펠리체 베네치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베네치아에도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레스토랑이 많다. 우리도 그런 곳들 중 하나를 들러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인의 추천으로 펠리체를 찾게 되었다. 뛰어난 맛집은 아닌 것 같지만 한끼 해결하기에 무리는 없는듯. 특히 이곳은 베네치아에서 흔치 않게 자리세를 받지 않는 집이다.

 

펠리체 Felice

• 주소 : Calle dei Fabbri, 1035, 30124 Venezia, Italy

• 메뉴 : 각종 이탈리아 현지 음식들

• 장점 : 산 마르코 광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 자리세 없음

 




출처> 기대하라님의 블로그

         http://insahara.tistory.com/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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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alia gloriosa? sono nato per distruggerla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어: Silvio Berlusconi, 1936년 9월 29일 ~ )

이탈리아 기업인·정치인

1994년 ~ 1995년, 2001년~2006년, 2008년 ~ 2011년 3차례의 총리를 지냈으며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그룹 미디어셋의 소유주, 유명 축구구단인 AC 밀란의 구단주.

2000년 포브스지 집계

이탈리아 1위, 세계 14위의 부자로 기록된 인물







베를루스코니는 밀라노 중상류층의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세자녀 중 첫째.


밀라노 대학(Università Statale in Milan)에서 법학을 전공해 광고의 법적 측면을 다룬 논문으로 1961년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현재 미디어셋(Mediaset)의 의장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페델 콘파로니에리(Fedele Confalonieri)와 함께 만든 그룹에서

더블베이스를 연주했고, 크루즈선에서 종종 연주했다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국민의 의무였던  1년간의 군대복무를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돈!! 돈!! 돈!!


1960년대 후반, 베를루스코니는 3500여개의 아파트로 이뤄진 가든 시티인 밀라노 2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밀란 동쪽 외곽의 세그라테(Segrate)에 결국 짓게 되었다. 베를루스코니가 이 사업에 어떻게 자금을 이끌어왔는지는 불분명하다.

1968년 9월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베를루스코니의 이름은 법적 서류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명목상의 소유자로 대체되었다가 1975년에야 베를루스코니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금을 끌어오는 과정을 많은 언론인들이 조사했지만, 해외 조세피난처와 중국의 자금책 등을 이용하는 복잡한 방식이었던지라

아무도 이를 제대로 파헤칠 수 없었다.







Segrate,Milano





베를루스코니는 1973년 세그라테 아파트에 공급하기 위해 텔레밀라노라는 작은 케이블 텔레비전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미디어 산업에 뛰어든다.

텔레밀라노는 1974년 9월에 송출을 시작했다.
두 개의 채널을 더 구입한 뒤, 베를루스코니는
1997년에 방송국을 밀란 중심으로 옮겨 지상파 방송을 시작했다.













1978년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첫 미디어 그룹 핀인베스트(Fininvest)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베를루스코니는 113,000,000,000 리라( 1997년의 260,000,000유로에 상당)을 벌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자금 조달 구조는 지주회사의 복잡한 형태로 인해 여러 검사들에 의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알려진게 없다.

핀인베스트는 텔레비전망을 이탈리아 전국으로 넓혀서 결국 하나의 전국망을 가지게 되었다.

1980년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첫 민영 전국 방송 카날레 5를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코니 가문으로부터 1982년에 사들인 이탈리아 1

몬다도리로부터 1984년 사들인 레테 4 등의 방송국을 더 갖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사회당 사무총장이자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와의 후광을 이용해 성장할 수 있었으며,

1984년 10월 20일 이탈리아 정부가 베를루스코니의 전국 송출을 합법화하는 긴급 명령을 결의하면서 베를루스코니는 최초의 유일한 이탈리아 상업 TV 제국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84년 10월 16일 페스카라, 로마, 토리노의 사법부에서 RAI의 전국 방송에 대한 독점을 강제하는 법을 근거로 민영 텔레비전망이 송출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의 정치적 혼돈 뒤에 이 명령은 결국 승인되었다.

하지만 몇 년간 베를루스코니가 가진 3개의 채널들은 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뉴스나 정치적 언급 등이 금지되는 등의 제한을 받았다.

3개의 채널들은 1990년이 되어서야 소위 마미법이라 불리는 법에 의해 전국 TV 채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미디어셋은 전국 시청률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3개의 텔레비전 채널과 이탈리아 최고의 광고 홍보 에이전시인 퍼블리탈리아로 구성되어 있고,

몬다도리 에디토레라는 이탈리아 최대의 출판사 이외에 명망있던 Einaudi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뉴스 잡지인 파노라마를 만들고 있다. 그 이외에도 베를루스코니는 영화 및 홈비디오 배급 회사(메두사펜타), 보험 및 은행(메디오라넘메디오방카) 등을 소유하고 있다.


동생 파올로 베를루스코니는 강력한 친베를루스코니 성향의 중도 우파 신문인 《일 지올날레》(il Giornale)를 소유하며 경영하고 있다. 일 지올날레는 베를루스코니의 처인 베로니카 라리오 역시 일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클럽인 AC 밀란을 가지고 있으며, 이 구단을 통해 정치적인 성공 역시 거머쥘 수 있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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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2월 28일, 파리 그랑카페에서 상영한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단편영화는

거대한 화물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상영한 3분짜리 무성영화였다.

객석에 앉아있던 명사들이 놀라 밖으로 달려나갈 정도로 센세이션했던

이 '움직이는 사진'은

향후 1세기의 예술과 인류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유튜브에서 찾은  The Best Moments of Cinema .


그 영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 안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영화의 결정적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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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당시 금기로 여겨지던 사체해부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해부학적 실체를 끊임없이 관찰했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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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는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이다. 뒤마의 소설인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을 기초로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이탈리아어 대본을 완성하였다. 1853년 3월 6일, 베네치아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텍스트 출처> 위키백과/비바클래식






1853년 3월 6일 라 페니체 극장의 초연 팜플렛





제 1 막



파리 사교계의 꽃 비올레타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  




                                                                                 


 Brindisi 축배의 노래


Conductor - Riccardo Muti
Orchestra - Teatro alla Scala

Tenor - Roberto Alagna 

soprano - Tiziana Fabbricini

(Milano 1992)


Alfredo:  Libiamo, libiamo ne'lieti calici che la belleza infiora.

마시자, 마시자 아름다움이 꽃피는 이 기쁨의 잔
 
E la fuggevol ora s'inebriia voluttà.

덧없는 시간 마시고 흘려버리자


Libiamo ne'dolci fremitiche suscita l'amore,

마시자 사랑을 일깨우는 달콤한 떨림


poichè quell'ochio al core Omnipotente va.

고운 눈속에 모든 근심이 사라지네


Libiamo, amore fra i calici più caldi baci avrà.

마시자, 사랑은 잔 속에서 가장 따뜻한 입맞춤을 받으리

All:       Ah, libiamo;
amor fra i calici
Più caldi baci avrà

아, 마시자, 사랑은 잔 속에서

가장 따뜻한

입맞춤을 받으리


Violetta:   Tra voi tra voi saprò dividere
il tempo mio giocondo;

그대들 덕분에 즐거운 나날을 함께 나누는 것을 알게되고


Tutto è follia nel mondo
Ciò che non è piacer.

기쁨이 아닌 모든 것들은 다 부질없어


Godiam, fugace e rapido
e'il gaudio dell'amore,

즐겨요, 빠르게 사라지는 사랑의 기쁨  


e'un fior che nasce e muore,

ne più si può goder.

꽃이 핀 후 지고나면 다시는 즐기지 못하죠

Godiam c'invita un fervido
accento lusighier.

즐깁시다,  불타는 기쁨이 우리를 초대하네요


All:   Godiam, la tazza e il cantico
la notte abbella e il riso; in questo paradise
ne sopra il nuovo dì.

즐기세, 잔과 찬미가가 밤을 아름답게하고

이 낙원의 위에서 새로운 신이 미소짓네


Violetta:    La vita è nel tripudio
인생은 즐거움 뿐


Alfredo:   Quando non s'ami ancora.
아직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때에


Violetta:   Nol dite a chi l'ignora,

 알고싶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말 마세요

Alfredo:  e' il mio destin così ...

내 운명이 그렇다오

All:   Godiamo, la tazza e il cantico
la notte abbella e il riso;
in questo paradiso ne sopra il nuovo dì.


즐기세, 잔과 찬미가가 밤을 아름답게하고

이 낙원의 위에서 새로운 신이 미소짓네





이 즐거운 노래를 마칠 때쯤 비올레타가 갑자기 발작적인 기침을 하고 기진맥진한다. 일동은 모두 염려하며 건강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나 비올레타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며 곧 낫는다고 하며 손님들에게 옆에 있는 방에서 춤을 추라고 권고한다. 혼자 끝까지 남아있던 알프레도는 비올레타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그녀가 진정이 되자 '추억의 그날부터'라는 노래로 그는 자기가 첫 번째 그녀를 만났던 때를 이야기하며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하며 사랑했는가를 고백한다.







                                                                               



Un dì, felice, eterea


SOPRANO : ANGELA GHEORGHIU

TENOR : FRANK LOPARDO

Orchestra & chorus of the Royal Opera House

conducted by Sir Georg Solti,

december 1994 at Covent Garden.





비올레타는 이 고백을 가볍게 넘겨 버리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큰 감명을 받기도 한다. 이제까지의 그녀의 생애는 오직 환락만을 추구하는 공허한 것이었고 병도 깊다. 그러나 이제 생전 처음으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참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된 비올레타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 2 막



그의 끈질긴 구애로 둘은 파리 교외에서 동거를 시작하지만 생활 감각이 없던 알프레도를 대신하여 비올레타가 생활비를 대고, 곧 도피 자금은 바닥난다. 이를 알게 된 알프레도는 돈을 구하러 잠시 집을 비우고, 그 사이 그의 부친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온다.
처음엔 비올레타가 자기 아들을 유혹한 것으로 오해했지만 실정을 알게 된 제르몽은 그녀의 사랑에 감탄한다. 하지만 이별을 요구하고, 비올레타는 병들어 삶이 얼마 남지않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

비올레타가 편지를 남기고 떠난 후 알프레도는 배신감으로 떨고, 아버지 제르몽이 찾아와 유명한 바리톤 아리아 Di Provenza il mar, il suol을 부르며 프로방스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노래한다





                                                                             


                                                                            


                                                                                          Di Provenza il mar, il suol 프로방스의 바다와 대지


             Baritone: Renato Bruson







제 3 막 





파리 비올레타의 쓸쓸한 침실

떠들썩한 사육제가 열리는 날, 비올레타는 자신의 집 침대에 누워 있다. 주치의인 그랑빌 의사는 비올레타를 안심시키려 곧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안니나에게는 그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임을 알린다. 제르몽은 편지를 통해 알프레도가 비올레타의 희생을 알게 됐으며 곧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음을 직감한다. 거울에는 초췌하게 변해버린 비올레타의 얼굴이 비친다.







                                                                                 




Addio del passato 과거여 안녕


Soprano :  Montserrat Caballe

Anton Guadagno

Pasadena Civic Center. . March 30, 1974






이 때, 비올레타의 몸종 안니나가 알프레도가 찾아왔다고 알리고,

기나긴 꿈이 현실이 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 껴안으며 파리를 떠나 다시 행복하게 살기를 약속한다.





                                                                                  



Parigi, o cara 사랑하는 이여, 파리를 떠나서


Soprano: Mirella Freni

Tenor: Luciano Pavalotti
Magiera conducts-1980






비올레타는 살고자 하는 열망을 얻게 되어 침대에서 나와 성당에 가려고 하지만 몇 걸음도 떼지 못하고 쓰러진다. 뒤늦게 찾아온 제르몽은 비올레타에게 용서를 구하며 둘의 사이를 인정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애통해 한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손에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목걸이를 쥐어주면서 먼 훗날 사랑하게 될 여자에게 선물로 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는 그동안의 고통을 잊은 듯 사뿐히 일어난다 싶더니 다시 사랑하는 알프레도의 품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Opera La taraviata



                                                       


La Traviata (Angela Gheorghiu, Ramón Vargas, Roberto Frontali; Lorin Maazel,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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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접근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와 콘술에 선출되었다.

원로원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두고 논쟁중이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침공을 원했고, 원로원은 마지못해 아프리카 침공안을 승락했지만 병력 징집은 허락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민회에 직접 나가 원정 지원자를 모집하여 7000명의 입대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이미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두 개의 군단과 합류해 아프리카원정군을 형성했다.

파비우스는 원정의 실패를 확신했으나, 그것은 스키피오의 비범한 과단성, 지략,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었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튀니지의 우티카 근처에 상륙하여 누미디아의 두 왕 시팍스와 마시니사의 분쟁에 개입했다.

두 왕이 모두 카르타고 총독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 소포니스바Soponisba를 사랑했는데, 세력면에서 약간 우세였던 시팍스가 소포니스바를 얻어

경쟁자를 폐위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의 진영으로 피신했다.








The Death of Sophonisba, by Giambattista Pittoni (1730)





전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시팍스와 거짓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했었다. 오로지 두 진영의 의심을 무마하고 그들 군대의 특성과 배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일단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나자 밤에 시팍스의 군대 막사를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카르타고 기병대가 화재를 진압하려고 달려왔다가 시팍스의 군대와 함께 궤멸했다.


마시니사는 시팍스를 생포하고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뒤, 누미디아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그는 스키피오에게 대가로 기병을 제공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얼마 뒤 스키피오는 소포니스바가 남편을 유혹,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여 마시니사에게 상아의자 및 허울좋은 영예와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그를 설득하여 독을 섞은 포도주로 소포니스바를 제거하게 한다.




카르타고인들도 그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한편 뒤로는 이탈리아에 있던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청동판에 자신의 연대기를 새겨놓고, 그것을 크로톤 근처의 헤라 라키니아 신전에 보관했다.

한니발이 아프리카에 도착한 뒤 평화협상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나라가라Naraggara에서 조우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나라가라는 자마에서 사흘을 행군해야 나오는 곳이지만 전통적으로 그 전투는 자마전투라고 불리운다.






Roman general and statesman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meets the Carthaginian leader Hannibal





자마(나라가라)전투(기원전 202년)



기병이 취약했던 한니발은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했다.

기병은 정상적인 배치에 따라 보병의 양 측면을 보호하게 하고 중앙을 파격적으로 배치했다.

맨 앞줄에 코끼리를 세우고, 다음 줄에 경보병 부대를 세우고, 그 다음 줄에 중보병 부대를 세우고, 그 다음줄은 빈 공간으로 남겨둔 다음

다시 중보병 부대를 세웠다. 마지막으로 후미에 이탈리아에서 데리고 온 노련한 병사들을 예비대로 세웠다.

앞의 세 줄에 세운 보병은 초기공격을 흡수하는 방패로 사용한 다음 나중에 로마의 후미를 공격할 때 사용할 계획이었다.


로마의 전형도 두 개의 기병을 측면에 배치하는 방식이었으나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서 익힌대로

군단을 작은 단위 부대로 세분하고 단위 부대들 사이에 공간을 남겨 적의 코끼리들이 돌진해와도 대형이 깨지지 않도록 했다.








따라서 한니발의 코끼리들은 로마의 대형에는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은 반면 양 측면에 배치되어있던 한니발의 기병에게로 우르르 몰려가 손상을 입혔다.

처음부터 약했던 한니발의 기병은 이로써 마시니사의 기병에게 제압당하게 되었다.

약 1만 2천의 용병으로 구성된 한니발의 전열근 로마의 공격을 처음에는 용감하게 오래 저지했으나, 카르타고인들이 생각만큼 신속하게 지원하러 오지 않자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후퇴하다고 로마 제 2열에 짓밟히고 만다.

한니발은 전열을 안정시키기 위해 계획보다 빨리 예비대를 전열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잘 훈련된 로마 병사들은 처음에만 혼비백산하다가 곧 전열을 가다듬었다. 와중에 한니발의 예비대가 후미에서 적의 기병에게 강한 타격을 입는다.







누미디아 기병





스키피오가 시팍스를 상대로 벌인 교활한 술책으로 카르타고 기병이 약해진 것이 한니발의 패인이었다.

카르타고 병사들이 대부분 전사했으나, 한니발은 가까스로 피신했다.






평화조약


카르타고에 평화협상을 요청하도록 조언한 사람은 한니발이었다. 조건이 매우 나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게 조언한 것이다.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외부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누미디아의 독립과 마시니사와 로마의 동맹을 승인하고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 심지어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도 로마의 허락이 필요하며, 함대를 열척의 가벼운 트리레미스나

해안 경비선으로 축소하며, 1만 탈렌툼의 배상금을 50년간 갚아야했다.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가 원로원 정적들이 한사코 저지하려던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를 부여받는다.





The Triumph of Scipio Africanus by Apollonio di Giovanni di Tommaso

Tempera with gold & silver on panel





로마가 승리를 거둔 원인


한니발이 만일 자마 전투를 승리했더라도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결국 패했을 것이다.

트라시메네와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는 일찌감치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일등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리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 였다.

그가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 cunctando restituit rem


카르타고 내에 한니발 반대 파벌이 존재하긴 했지만 카르타고는 한니발과 전쟁을 일관되게, 총력을 기울여 지원했다.


로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공정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동맹체제로부터 카르타고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인적, 물적 자원을 공급받았고

그것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한니발의 패배를 이루어낸것이다.




한니발의 운명


후대 역사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한니발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 전쟁배상금을 하층민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에 인민은 일반 병사를 공평하고 선하게 대했던 전쟁 영웅 한니발을 지지하고 기원전 196년에 그를 수페스shophet, sufes, 즉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한니발은 수입과 지불 능력에 기초한 조세제도를 수립하고, 세금 지출에 대해 정부가 국민에게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재정 집행이 대단히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자마 전투가 끝난지 10년 밖에 되지 않은 기원전 191년에 카르타고는 전쟁배상금을 일시에 갚겠다고 제안할 수 있었다.

로마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상업과 공업이 활기를 되찾았고, 카르타고는 다시 지중해에서 가장 번창하는 항구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괄목할 만한 회복에 놀란 로마는 한니발이 또 다른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그의 정적들의 비난을 근거로

그를 전범으로 로마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한니발은 동방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로마는 당시에 그 지역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점차 판도를 넓혀가던 로마에 그 지역을 첨가하는 과정에서 한니발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기원전 183년 그를 죽였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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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olo Conte (born January 6, 1937) is an Italian singer, pianist, composer, and lawyer notable for his grainy, resonant voice, his colourful and dreamy compositions (evocative of Italian and Mediterranean sounds, as well as of jazz music, South American atmospheres, and of French-language singers like Jacques Brel and Georges Brassens) and his wistful, sometimes melancholic lyrics.





                                                                             








Alle prese con una verde milonga

Il musicista si diverte e si estenua…

e mi avrai, verde milonga che sei stata scritta per me,

per la mia sensibilità, per le mie scarpe lucidate…

per il mio tempo e per il mio gusto


mi avrai, verde milonga inquieta

che mi strappi un sorriso di tregua ad ogni accordo,

mentre fai dannare le mie dita…

…io sono qui, sono venuto a suonare,

sono venuto ad amare, e di nascosto a danzare…

e ammesso che la milonga fosse una canzone,

ebbene io l'ho svegliata e l'ho guidata ad un ritmo più lento…

così la milonga rivelava di sé molto più di quanto apparisse…

la sua origine d'Africa, la sua eleganza di zebra,

il suo essere di frontiera, una verde frontiera…

una verde frontiera tra il suonare e l'amare,

verde spettacolo in corsa da inseguire…

da inseguiere sempre, da inseguire ancora, fino ai laghi biancchi del silenzio

fin che Atahualpa o qualque altro dio

non ti dica: descansate niño, che continuo io…

…io sono qui, sono venuto a suonare,

sono vinuto a danzare, e di nascosto ad amare…







Posted by sull'a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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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막대한 인력과 자원 덕분에 한니발을 저지할 수 있었고, 배반했던 도시들을 재정복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지 않는 한 이탈리아의 동맹국들과 자신의 군대를 보호할 길이 없었다.

그는 로마가 자신의 새로운 동맹국들을 하나씩 재정복하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1년에 카푸아가 함락됨으로써 캄파니아 전역이 로마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Sacking of Capua







Capua






카푸아가 함락되기 1년 전에 시라쿠사이가 유명한 로마장군 마르켈루스의 포위공격에 함락되었다.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이에 해군을 지원하는 미미한 시도 이외에 효과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시라쿠사이는 함락된 뒤 약탈당하여 영원히 독립을 상실했다. 기원전 210년 아그리젠툼이 함락된 후 시칠리아 전역이 다시 한 번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Marcus Claudius Marcellus(BC 268– BC 208)







제 1 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 205)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동맹을 체결한 후 그리스와 발칸반도에서 로마에 대행해 두번째 전선을 형성하려고 시도했다.

기원전 214년 일리리아에 있는 보마의 보호령과 해군기지들을 공격했고, 카르타고 함대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한니발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카르타고 함대 대신 50척으로 구성된 로마 소함대가 왔고, 로마인들은 해군기지와 기존의 보호령 일부를 쉽게 탈환했다.

로마인들은 필리포스가 계획하고 있던 이탈리아 본토 침공을 막기 위해 아이톨리아 동맹 및 그밖의 그리스 국가들과 공세적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반 마케도니아 연합을 결성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연합을 분쇄하기 위해 네 차례의 탁월한 원정을 감행했으나 그리스 전쟁은 필리포스를 그리스에 묶어 두어 한니발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려는 로마의 목적에 일조했다.





Philip V of Macedon



히스파니아 전쟁(기원전 218~207)



한니발이 전쟁 1회전에서 패배한 곳은 히스파니아였다.

적장은 기원전 218년의 콘술 푸블리우스 코리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그는 비록 훌륭한 전략가는 아니었지만 한니발의 로마 제패 전략의 의미를 이해했다.

한니발이 론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그는 혀제 나이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보냈고, 자신도 트레비아에서 패배한 후 그곳으로 합류하였다.

이 히스파니아 원정의 목적은 한니발에게서 주요 거점과 인력 및 물자의 근원을 박탈하고 한니발의 형제 하스드루발이 지원군을 파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Roman army





기원전 215년 두 명의 스키피오가 이베르 강 유역 이베라 근처에서 하스드루발과 대치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사용한 전술을 펼쳤으나 중앙이 너무 허술하여 중앙을 돌파당함으로써 전투에서 패했다.

두 동강이 난 그의 군대는 쉽게 궤멸되었고, 스키피오 형제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기원전 211년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하스드루발이 패배한 뒤 히스파니아의 여러 종족들이 로마인들에게로 넘어갔지만, 하스드루발이 누미디아의 시팍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돌아간 뒤 스키피오 형제는 비로소 동맹을 맺은 히스파니아 종족들이 얼마나 신의가 없는지 깨닫게 된다.

기원전 211년 많은 히스파니아인들이 탈영하자 로마 군대는 패배했고, 스키피오 형제는 전사했다.

빈약한 전력으로 로마의 최종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스키피오 형제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THE BATTLE IN THE RIVER, NEAR SAGUNTUM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전사한 스키피오의 아들이자 조카로 티키누스강 전투에서 아버지를 구출했던 미래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칸나이 전투에 참전했었다.

참패를 겪은 후에 그는 로매 패잔병들에게 계속 싸우도록 독려했다.

그는 기원전 210년 히스파니아에서 전사한 뒤, 히스파니아의 로마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높은 관직이었던 것도 아니고 사인私人이었음에도 명령권과 콘술 대행의 지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스키피오는 수준 높은 그리스 교육을 받았고, 대다수 로마 귀족보다 개인주의적이었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패배한 적군 병사들에게 이례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지만, 아울러 비양심적이고 기만적이기도 했다.

그는 장군으로서 용기와 지략과 자신감과 부하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는 이탈리아제 단도를 히스파니아제 장창으로 교체했는데, 끝을 강철로 제련한 이 장창은 찌르는 것 뿐 아니라 베는데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의 기존 밀집 대형을 포기했다. 기존의 로마 군단은 3열 횡대로 배치되고, 각 횡대는 10개 중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무거운 대형은 전진할 때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지만 회전이나 방향전환이 힘들고, 칸나이 전투에서처럼 측면공격에 취약했다.

또한 전체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어 소규모 단위 병력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스키피오는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대형을 선택했다. 이런 혁신적인 전술을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강도 높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군대를 훈련시킨 뒤 기원전 209년 적군의 영토로 과감히 진군하여 카르타고 노바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카르타고 노바의 함락은 스키피오에게 우수한 기지, 은광, 선박, 엄청난 전리품, 돈, 무기, 1만명의 히스파이아 인질들을 안겨주었다.

그는 인질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준 뒤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히스파니아인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Hasdrubal Barca






하스드루발은 기원전 208년에 스키피오에게 패한 뒤 자신의 군대를 거의 다 이끌고 후퇴하여 이탈리아의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장정에 올랐다.

하스드루발이 떠나자 스키피오로서는 카르타고의 다른 점령지들을 공략하기가 훨씬 쉬워졌고, 기원전 207년 일리파 전투를 끝으로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주둔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만약 하스드루발이 한니발의 군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면 로마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좋은 거점인 브루티움을 잃을것이 두려워 북 이탈리아의 동생과 합류하려 하지 않았고

더욱이 하스드루발이 형에게 움브리아로 진군하여 로마 근처에서 만나자고 요청한 서한이 로마군의 손에 들어갔다.


소재를 파악하게 된 로마의 군단이 북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콘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소수의 병력을 뒤에 남겨 한니발을 감시하도록 하고 조용히 진군하여 엿새 뒤에 메타우루스 강에 도착했다.

하스드루발은 서둘러 강을 건너 퇴각하려 했으나 그의 탁월한 부대는 섬멸되었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built by consul Gaius Claudius Nero in 206 BC, after he had defeated the Carthagian army in the Battle of the Metaurus






며칠 후 잘린 하스드루발의 목이 한니발의 진영으로 던져졌다.

한니발은 그제서야 자신이 전쟁에 패했음을 깨닫고 브루티움으로 철수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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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자 Cunctator 파비우스 막시무스(기원전 217)



트라시메네의 패배, 포위에 대한 두려움, 매일 열리는 원로원 회의, 시민들의 우상 플라미니우스의 전사

그의 파벌의 몰락,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의 재기, 이 모든 상황이 30년간 사장되어있던  독재관의 부활과

이상하고 수수께끼같은 극단적 보수주의자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라는 인물의 등장을 야기시켰다.









파비우스는 독창적이긴 했지만 다소 소극적인 전략을 채택한다.

로마 기병대가 한니발의 기병대에 비해 열세라는 판단하에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상대의 소모와 고갈에 입각한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Quintus Fabius Maximus Cunctator gaat te voet zijn zoon tegemoet, David Vinckboons, 1604 - 1613





이 전략은 한니발이 부주의하게 스스로 불리한 여건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될 때까지 불리한 전투는 일절 삼가하고

자신의 군대를 항상 산지에 주둔시켜 한니발로 하여금 기병대를 활용할 수 없게 만들고 후미를 괴롭히고, 행보를 방해하고,

동맹세력 확보, 식량조달, 기지 구축들 가로막음으로써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의 사기를 꺾는 전략으로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원정을 감행한 진짜 목적 - 로마 동맹 붕괴 - 을 달성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비우스의 이 조심스러운 전략은 오늘날까지 '파비우스식fabian'으로 불리우며 이 전략으로 그는 당시 지연자Cunctator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로마인 모두가 이 전략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특히 켄투리아회에서 기병대장으로 임명한 저돌적인 미누키우스 루푸스Minucius Rufus 는

이 전술을 혐오했다. 게다가 지연술은 적군뿐 아니라 사용자 측에도 부담을 주는 법이다.

기원전 217년 미누키우스는 신임 콘술을 선출하기 위해 모인 민회에 나타나 로마는 아직 총력을 집중하여 한니발과 싸워보지 못했다고 선언하면서

전쟁을 하루빨리 끝낼사람을 콘솔로 선출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시민들은 새로운 콘솔로 선출된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하루 빨리 한니발을 제거해 주기를 기대했다.






Minucius Rufus





칸나이 전투(기원전 216)



두 콘술은 8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니발을 제거하기 위해 아풀리아의 칸나이 근처에 도착했다.

칸나이는 작은 요새지만 아우피두스 강 근처의 중요한 군수 물자 기지였다.

그들은 3열 횡대로 평소보다 밀집된 대형을 갖추고 보병을 한복판에 배치했다.

파울루스의 지휘하에 오른쪽에 배치된 기병은 보병과 강 사이에, 바로 지휘하의 기병은 왼쪽 개활지에 배치되었다. 








한니발은 양쪽의 기병만 로마군대와 똑같이 배치하고, 중앙의 대형을 갈리아인과 히스파니아인들로 구성된 중앙 대형의

뒤쪽에 전쟁 경험이 풍부한 중무장 아프리카 병사들을 사다리꼴로 배치했다.




The Battle of Cannae in 216 BC (gouache on paper) Severino Baraldi





로마 보병이 한니발의 전열을 향해 진격했다.

전면에 배치된 한니발의 병력은 한동안 완강히 버티더니 로마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빠졌다. 하지만 서서히 물러나는 한니발의 군대를 따라

깊숙히 들어갈수록 양쪽에 버티고 있던 한니발의 아프리카 병력이 로마군을 더욱 좁게 에워쌌다.



보병전과 동시에 기병전도 진행되었다. 왼쪽 날개에 배치되었던 한니발의 기병이 오른쪽 날개에 배치된 로마 기병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렸다.

로마 기병은 군단들과 강 사이의 협소한 공간때문에 전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로마의 오른쪽 기병을 무찌른 한니발의 기병들은 한 바퀴 돌아 교전중이던 바로의 왼쪽 기병을 공격, 전멸시켰다.

로마의 양쪽 기병이 제거되자 카르타고 기병들은 마음놓고 후미를 공격할 수 있었다.

로마 보병들은 이미 적진 중앙으로 너무 깊숙히 들어간 나머지 더 이상 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꽉 죄였다.

수만 많았지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병사들은 그 뒤에 이어지는 대학살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나자 콘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들, 약 7만 명의 로마인들이 시체가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The Death of Aemilius Paullus by John Trumbull, 1773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거둔 승리는 전술의 고전적인 모범중에 하나로 남아있다.

그 승리는 병력의 파격적 배치뿐 아니라 시간 조절과 협력에 근거했기 때문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인들은 공포에 떨며 방어 준비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로마 침략 가능성보다 심각한 것은 한니발이 애초에 세웠던 로마동맹 와해라는 목표를 거의 다 성취했다는 사실이었다.

동맹국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충성심이 흔들렸다.

아풀리아의 여러 읍들과 루카니아 브루티움의 여러 도시들이 한니발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캄파니아의 카푸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가 반란을 일으킨 뒤 한니발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로마가 일리리아에 세워둔 교두보로부터 로마인들을 쫓아내고 싶어하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215년에 한니발과 상호 지원 협정을 체결했다는 사실이었다.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인들은 다시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을 채택하고, 전투를 회피하는 전술로 되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니발에게 군수 물자를 조달하거나 카르타고로부터 보급 물자를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한니발에게 넘어간 도시들을 로마로 되돌리는 일에 주력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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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모데나 Modena (Italia)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와 이탈리아 국민가수 루치오 달라 Lucio Dalla







Qui dove il mare luccica e tira forte il vento
Su una vecchia terrazza davanti al golfo di Surriento
Un uomo abbraccia una ragazza dopo che aveva pianto
Poi si schiarisce la voce e ricomincia il canto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tanto bene sai
È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 e vene sai

Vide le luci in mezzo al mare pensò alle notti là in America
Ma erano solo le lampare e la bianca scia di un'elica
Sentì il dolore nella musica e si alzò dal pianforte
Ma quando vide
La luna uscire da una nuvola
Gli sembrò più dolce anche la morte
Guardò negli occhi la ragazza quegli occhi verdi come il mare
Poi all'improvviso uscì una lacrima e lui credette di affogare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tanto bene sai
È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 e vene sai


Potenza della lirica dove ogni dramma è un falso
Che con un po' di trucco e con la mimica puoi diventare un altro
Ma due occhi che ti guardano così vicini e veri
Ti fan scordare le parole, confondono i pensieri
Così diventa tutto piccolo anche le notti là in America
Ti volti e vedi la tua vita come la scia di un'elica
Ma sì è la vita che finisce ma lui non ci pensò poi tanto
Anzi si sentiva già felice e ricominciò il suo canto

Te voglio bene assaie
Ma tanto, tanto bene sai
È una catena ormai
Che scioglie il sangue dint' e vene sai



바다는 빛나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는 이 곳, 
쏘렌토 만을 면한 오래된 테라스에서

울음을 그친 남자가  한 소녀를 껴안는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시작한다.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많이, 많이 사랑해, 알아?

이미 속으로 스며든
사슬과 같아. 알고 있니?



바다 가운데 반짝이는 빛을 보며
미국에서의 밤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지나가는 배에서 비춰진 불빛과 하얀 포말들이었지. 
음악에서 고통이 느껴지자 그는 피아노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구름 속에서 나타난 달을 보니
죽음도 달콤하게 생각되었네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어.
바다처럼 초록색을 띄는 그녀의 눈동자.
갑자기 그 눈에서 눈믈이 한 방울 흘러나오자
그는 그 속으로 잠겨들고 있다고 믿었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많이, 많이 사랑해, 알아?

이미 피속으로 스며든
사슬과 같아. 알고 있니?


모든 드라마 허구일 뿐 오페라의 힘.
그 곳에서는 약간의 속임수와 연기만으로 딴 사람이 될 수 있지 .
하지만 이토록 가깝고 진실하게 바라보는 두 눈동자는
언어를 잊게 하고
상념들도 뒤섞이게하지.

모든 것이 그렇게 작아지고
미국에서의 화려하던 밤들까지도.
돌아보면 너의 인생도
배가 지나간 뒤의 하얀 포말처럼 보일거야.

아 그래, 인생은 끝이 있지
하지만 그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노래를 다시 시작하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많이, 많이 사랑해 알아?

이미 피속으로 스며든
사슬과 같아. 알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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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




제 2 차 포에니 전쟁 전의 로마와 카르타고 점령지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어느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도발하지 않았다.

기원전 238년부터 219년 까지 카르타고와 로마인들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면서 하스드루발이 체결한 조약과 이베르 조약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러나 여러가지 요인들이 양국으로 하여금 서로 두려워하고 오해하게 만들어 서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관계가 파국에 직면했을 때

상호간에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군툼(Saguntum)













사군툼은 경쟁도시인 마르실리아의 사주를 받아 한니발이 이베르 강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장악하려 한다는 불평을 로마 원로원에 끊임없이 제기했다.

원로원은 실태를 파악할 사절들을 파견했고, 한니발에게 사군툼과 로마간의 신의(fides)관계 및 이베르 조약을 상기시켰다.

불필요한 간섭, 혹은 과거 로마인들이 용병 반란을 이용했던 것처럼 카르타고를 적대시하기 위해 사군툼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한

한니발은 즉시 자신의 정세 분석 보고서를 카르타고 원로원에 보내며 조언을 요청했고, 결국 기원전 219년 초 사군툼을 포위한다.







이베리아 전사





한니발이 사군툼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로마 원로원은 당장 행동을 취할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218년 사군툼이 함락되자 로마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고 시민들은 적개심에 불탔다.

원로원은 카르타고에 사절단을 보내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한니발을 로마로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의원 다수는 자신들이 지원한 지휘관을 내주는 치욕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카르타고는 전쟁을 택했다.



많은 로마인들이 전쟁을 원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인과 갈리아 남부 켈트 종족이 힘을 합쳐 로마를 공격할 우려가 있었고

해외무역에 종사하는 그룹의 규모가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히스파니아에서의 확장에 힘입어 옛 세력을 되찾자

무역업자와 해운업자들은 그들이 더 강해지기 전에 카르타고를 한번 더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리고 귀족들 중에는 항상 성공적인 군지휘를 통해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가들이 있는 법이다. 


양 진영은 두번째로 전쟁의 도전을 받아들인다.











한니발의 정예부대는 충직하고, 훈련이 잘 되어있고, 최고급 히스파니아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대를 지원해줄 해군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에 힘입어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이 인력과 물자를 충당할 유일한 원천은 히스파니아였고, 그에게는 믿을만한 부대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일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고, 전선은 이탈리아에 형성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로마가 위기에 처해있는 한 로마인들은 대병력을 이탈리아에 결집시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이탈리아를 침공해야만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한 더 강력한 이유는 그가 잠재적으로 카르타고의 여서일곱 배나 되는 로마의 군사력을 뿌리부터 절단하고 싶어한 데 있었다.

로마의 동맹체제와 이탈리아 연방을 분쇄해야만 막대한 전쟁 잠재력을 무력화하고 파쇄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갈리아인들이 이미 로마와 전쟁중이었으므로 틀림없이 자신 쪽으로 규합하리라고 생각했고,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국들도 동맹을 탈퇴하고 자신에게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다.


로마는 전쟁을 공세적으로 치룰 계획이었다.

막강한 해군력으로 무대를 임의로 정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콘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부대는 히스파니아 침공을 위해 실제 마실리아에 상륙했다.

또 다른 부대는 아프리카 침공을 위해 시칠리아에 집결했다. 그러나 마실리아에 너무 늦게 상륙하는 바람에 이미 그곳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향해 진군중인 한니발을

저지할 수 없었다.








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보병 4만, 기병 6천, 60여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출발했다.

이베르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8월 중순 론 강에 도착하여 스키피오에게 저지를 받기 전에 그 강을 건넜다.

한니발의 이동 경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가 알프스 산맥에 들어갈 때 취했을 법한 유력한 이동 경로를 예측해 봐도 어느 경우든 쉽지 않은 경로였다.

험준한 괘, 발목까지 빠지는 눈, 추위, 무엇보다도 산지 종족들의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인해 그는 병력과 물자에 큰 손실을 입는다.

우여곡절 끝에 북 이탈리아의 평지에 도착했을 때 그의 병력은 보벼 2만 6천, 기병 4천, 코끼리 30 마리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와 전쟁중이던 인수브레스Insubres인, 보이이Boii인이 합류하여 손실된 병력을 벌충해 주었다.









The Insubres







티키누스 전투는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이 스키피오의 기병을 포위하여 물리친 기병들의 소규모 접번이다.

스키피오 자신도 부상을 입었고, 아버지와 동명인 17살의 아들 스키피오(훗날 아프리카누스 Africanus)에게 구출되지 않았다면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소한 패배가 로마인들에게 원래 아프리카를 침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군대를 북 이탈리아로 이동하게 할 만큼 심각한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단일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한니발의 시도가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초록색 선:    한니발 군대의 이동경로

검표시:    중요전투지역





한니발에게 포강 계곡 전 지역을 한나발의 수중에 넘겨주면서 북이탈리아를 상실한 트레비아 전투(기원전 218)









트라시메네 호수 전투(기원전 217)

중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로 이동하던 한니발은 로마인들의 예상과는 다른 경로를 택했고, 로마로 진군하는 듯이 보이도록 해놓고는 갑자기 동쪽으로 기수를 틀어

페루지아의 트라시메네 호수의 북쪽 연안을 지나간다.

한니발은 병력을 산 위에 잠복시켜 놓았다가 플라미니우스가 행군해오자 공격하여 3만 6천명을 대부분 죽이거나 생포했고, 얼마 후 세르비니우스가 보낸 4천의 기병대도 몰살시켰다.








트라시메네 패전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로마가 함락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한니발은 충분한 장비와 물자의 보급없이 요새화된 대도시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이 탁월한 전술가는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로마 동맹 체제에서 균열을 찾아낵 그 균열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전투에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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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iler






감독: 가브리엘레 살바토레, 2013

원작: Nicolai Lilin









킬링타임용 오락영화로는 훌륭했다  적어도 내게는.

색채도 카메라워크도 어디서나 압도적인 존 말코비치도










손자를 전통 시베리아 가치관에 따라 교육시키는 할아버지가 말한다

"la dignità, una volta persa, non torna più."

존엄성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심지어 대사에도 공감했다.












하지만 뭐지, 이 영화에는 모든게 다 있지만 감독의 영혼이 없다. 빠져 나갔다.

주인공이 빠져나간 A급 파티처럼 즐기다보니 공허하다

왜지,













가브리엘레 살바토레의 작품이 아니었으면 꽤 만족하고 보았을 영화...뭐 오락은 오락으로.










하지만 한 번 톨스토이면 영원히 톨스토이여야한다

애즈 갓 커맨드가 아니더라도

당신이 만든 멋진 오락영화 NIRVANA를 본 이상.














유튜브 트레일러의의 첫 댓글

"이 영화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개똥같다...한 조각의 진실도 없다"

questo film insieme al libro è una cagata pazzesca...non c'è un briciolo di verità.






따라서

나만의 불만은 아닌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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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카르타고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출처 - 위키백과)











한니발의 성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폴리비오스는 하밀카르가 아홉살 난 한니발에게 만약 제단으로 가서 절대로 로마의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히스파니아로 데려가 주겠다고 하는 공상적인, 그러나 사실일 가능성도 큰 이야기를 전한다.

그 뒤부터 한니발은 평생을 병영에서 지냈다. 장군이 된 뒤에도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

병사들과 똑같이 불침번과 보초를 서는 조건으로 잠을 잤고, 잘 때도 외투 하나만을 덮고 잤다.

그의 지도력은 대단히 뛰어났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그가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갈리아. 페키니아.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종족 출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길고 무수히 많은 강과 습지와 심지어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 길고 피곤한 행군을 감행하는 동안 한번도

항명이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을 준비한 뒤 한니발은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수도인 카르타케나로부터 오늘날 살라망카에 해당하는 지역을 향해 북서쪽으로 진군하여 타구스 강 상류와 두로 강의 여러 종족들을 정복했다.

이제는 사군툼을 제외한 이베르 강 이남의 히스파니아 전 지역이 정식으로 카르타고의 영토로 선포되었다. 암반 고원에 자리잡고서 중동부 해안을 한눈에 내려다 보던 소도시인 사군툼은 마실리아의 교역상대였고, 기원전 230년과 219년 사이의 언 시점에 로마와 동맹을 체결했다.









Hannibal jurant haine aux Romains
- before 1766





기원전 219년에 한니발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카르타고에 속한 이웃 종족들을 정당한 사유없이 공격했다는 이유로 사군툼을 포위했다.

여덟 달에 걸친 필사적인 공방전 끝에 사군툼은 함락되었다.

사군툼이 함락된 것을 계기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를 지중해의 강국으로 만들어주었고, 로마로 하여금 동방 그리스의 헬레니즘 세계 왕국들을 정복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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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reme



기원전 311년 20척의 트리레미스Trireme를 건조한 것이 해군을 창설하려는 로마인들의 최초 시도였다.

이마저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기원전 264년 로마는 해군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이탈리아의 동맹국들에게 의존했지만 그 나라들도 삼단 노 선박 이상의 수준은 되지 못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해군들은 이미 오래전에 큰 바다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거운선박을 도입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해군이 자부하던 것은 퀸퀘레미스 quinquereme 였다.









Quinquereme





이 배는 50-60개의 노가 장착된 한 개의 층으로 된 배로서, 노 하나에 다섯 명quinque의 수병이 배치되는 전함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트리레미스에 비해 무겁고 느렸지만 항해에 적합했고,  함포가 없었던 고대의 해전은 주로 충돌이나 적함으로 옮겨타 공격하기로 이루어졌으므로 중량이 필수적이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64년 아피우스가 시칠리아로 건너가면서 퀸퀘레미스를 한 척 나포하기 전까지는 이같은 선박을 한 척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 배를 모델로 삼고 그리스 동맹국의 조선 기사들의 도움을 받은 그들은 약 두 달 동안 백 척의 퀸퀘레미스와 스무 척의 트리레미스를 건조해냈다.

수병이 모두 노젓는 일에 숙달되어야하는 트리레미스에 비해 다섯명이 하나의 노를 젓는 퀸퀘레미스는 한 두 사람만 숙달되면 나머지는 그들을 따라하기만 하면 되었고, 로마인들은 선원보다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해전을 육지전투화하기 위해 퀸퀘레미스의 시스템 및 크기는 로마인에게 매우 적합했다.


기원전 260년 로마 총독 두일리우스Duilius는 이 새로운 함대를 이끌고 메사나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서 카르타고 해군과 대치했다.












카르타고 제독은 쉬운 승리를 예측하고 정면충돌 공격을 감행했으나, 정예 전함들에 로마인들의 코르부스(상대방의 배로 옮겨 탈 수 있도록 끝이 쇠갈고리로 만들어진이동식 다리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발명)가 가서 박히고, 로마 수병들이 쏟아져 들어와 전함을 탈취했다.




이후 양국간의 엎치락 뒤치락하는 긴 해전에서 한동안 시칠리아에서 해군기지들만 보유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하던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서 제국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원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49년 그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55~253년의 돌풍에 의한 함대 손실, 좌초 등의 참사를 겪은 뒤

해군을 재건했지만 바다에서의 우월한 지위는 이미 상실했다.  위력적이던 코르부스는 더이상 유용하지 않았고, 제독들의 역량도 부족했던 것이다.

카르타고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247년 시칠리아에 젊은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를 파견한 뒤부터는 더욱 그랬다






Hamilcar Barca (d. 229/8 B.C.)





탁월한 장군이었던 그는 로마 전열 배후를 전광석화처럼 이동하고 해안을 과감하게 공격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바르카의 탁월한 전술과 카르타고 해군의 혁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주로 로마가 패배했을 때 적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못한데 있었다.


로마의 궁극적 승리는 흔히 주장되는 끈기와 인내, 도덕적 자질 때문만이 아니라

카르타고의 유약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유약하게 된 것은 상인 부호들과 강력한 토지 귀족들 간의 내분과 기득권 투쟁 때문이었다.







Hanno the Great




해군과 바르카의 지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을 때 이른바 대 한노 Hanno the Great가 이끄는 지주 그룹이 카르타고 정부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옥토를 정복하는 것이 시칠리아, 해군, 그리고 로마와의 전쟁보다 중요했다.











한편 로마는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해군력 복원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시민들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군복원사업에 투자하도록 설득했다. 기원전 242년 200척의 최신 전함들로 구성된 로마함대가 시칠리아 근해에 나타났다.

카르타고 함대는 수병들도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정비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곡물과 물품을 잔뜩 싣고 있었다. 결과는 카르타고에

전쟁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 참사였다. 평화를 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로마 평화조약 (기원전 241)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양측 모두 오랫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쟁 덕에 지쳐있었다.

큰 전쟁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승자와 패자 모두가 영향을 받았고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도 인력과 재산 양면에서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비록 부풀려졌을 수는 있겠지만 로마와 카르타고는 각각 수백척의 전함과 수만명의 인명을 잃었다.

카르타고 해군력이 분쇄되었고, 지중해 서부에 대한 통제권이 영원히 종식되었다.

반면에 로마는 광범위한 지중해 세계의 문제에 반드시 개입하는 주요 해군 및 해상 국가가 되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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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 mai stata sulla Luna?  달에 가본적이 없나요?

감독: 빠올로 제노베제
주연: Raoul Bova, Liz Solari, Sabrina Impacciatore, Neri Marcore


Guia는 서른살, 국제적이고 잘나가는 패션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개인 제트기로 밀라노와 파리를 오가며 생활하는 럭셔리우먼으로 이른바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이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모든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뿔리아의 낯선 지방에서 Renzo를 만나기 전까지는.

매력적인 농부인 그가 귀아에게 유일하게 부족하던 한가지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 l'amore, 사랑, 진실한 사랑.

하지만

행복이 한걸음 앞에 있을 때, 그녀는 어떻게 잡아야하는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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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어로는 Kart-Hadasht(새로운 도시).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튀니스 만으로 돌출한 본 곶(Cape Bon)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무역업자와 상인으로 유명했던 페키니아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카르타고의 건국은 로마의 건국과 마찬가지로 전설로 싸여있다.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카르타고를 건설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디도DIdo 공주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 윌리엄 터너






그러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기원전 750년 경에 건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지형적으로 지중해가 가장 좁아지고 따라서 양쪽 대륙으로 쉽게 접근할 수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제해권을 장악하기 이상적인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중간에 위치한 몰타섬을 점령한 후에는 상업 및 식민지 개척의 걸림돌이던 그리스인들을

지중해 서쪽 절반에서 몰아낸다.








포에니 2차 전쟁 무렵의 카르타고 







수십년간 카르타고의 모도시였던 티로스(디도는 티로스의 공주였음)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 차례대로 종속되면서 더 이상 페키니아의 식민시들을 통제하거나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카르타고는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어느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강한 해군을 창설했다.

결국에는 페키니아 식민시들과 동쪽에서 벵가지부터 서쪽 지브롤터와 포르투갈에 이르는 사르데니아, 코르시카, 시칠리아의 일부,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한 지역을 세력권으로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카르타고의 화폐 310-290 BC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장악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의 수세기 동안 서에서 동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카르타고가 독점했다.

이에 힘입은 카르타고 상인들은 그 지역 내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한 상품을 독점판매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의 제품들 중에서 자유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었던 품목은 직물, 그 중에서도 자주색 염색 가공 직물뿐이었다.

카르타고 산 직물은 지중해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다.









카르타고인들이 과학적 영농, 노예를 이용하는 집단 농장의 발달에 이바지한 점은 대개 간과된다.

로마인들에게 대규모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판매용 단일 곡물이나 단일 산물을 재배하는 기법을 전수한 것이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의 정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한대로 과두 공화정으로서,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년 선출되는 두명의 수페스(shophetim, 집정관)로 구성된 행정부와 3백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민회, 104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최고법원이 그것이다.

민회는 실권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정부는 부유한 사업가들, 상인들, 지주들로 구성된 소수의 강력한 과두정으로 구성되었다.

두 명의 집정관과 모든 장군들이 민회에서 선출되었지만 모두 부자들이었고, 배타적인 과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정부의 실권은 최고법원과 민회에 의해 원로원의 한 위원회로 기능하도록 선출된 30인 위원회 두 기관의 수중에 있었다.

최고 법원의 구성원들은 원로원의원들이기도 했지만, 30인 위원회와 달리 민회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다섯명의 행정부 수장들(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5두 정부라고 부름)로 구성된 내각에 의해 선출되었다. 최고법원은 원래는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구성되었지만 점차 국가에서 가장 두려운 기관중의 하나이자 5두정부와 결탁하여 가장 탐욕스럽고 부패한 기관이 되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에서 지중해 서부의 강력한 두 공화국인 로마와 카르타고가 양국의 국민 모두 원치않는 기나긴 전쟁을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장화같은 이탈리아의 발끝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나자 불현듯 자기들이 해협 건너 시칠리아에 자리잡고 있는 카르타고라는 강대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피로스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언제든지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 바 있다.

그러므로 많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가 더 이상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원인은 야심찬 귀족들 사이에 퍼져있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욕구였다.

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승전의 기회를 열망하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의 논리에 설득 당한 것이 전쟁 발발의 네번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르타고로서는 그들이 바란바는 아니었지만 전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로마인들이 침략자로 보였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는 시칠리아와 아무 연고도 없었던 반면 카르타고는 오래전부터 그 곳의 주요세력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Lucius Cartilius Poplicola의 무덤에서 발견된 포에니전쟁을 묘사한 부조







전쟁은 카르타고 인들이 불리했다. 그들의 전함은 피로스 전쟁 이후 대부분 부두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에 배를 정비하고 수병을 모집, 훈련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확고한 의지만 있었다면 쉽게 막을 수 있는 상황에서 수수방관한 것이 시라쿠사이의 히에로 2세를 격노케 하여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파기하게 만들었다.


로마인들이 기원전 263년에 4천명의 육군병력으로 시라쿠사이를 공격했을 때 항복한 히에로는 15년 기간의 동맹을 체결하고, 로마의 대 카르타고 전쟁에 재정지원을 약속한다.

다시 기원전 262년, 로마는 히에로의 지원을 받아 아그리겐툼을 포위 공격, 함락시켜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아그리겐툼이 함락되자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을 아예 시칠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는데 장애물이라면 이제 완전히 가동 준비를 갖춘 카르타고의 함대였다.

로마는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해군을 창설하던지 전쟁을 포기하든지 결단을 내려야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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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orty 2014.05.28 1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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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hjbShfekqdvv 2014.09.25 2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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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hjbSvsarnrsw 2014.11.13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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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Luke 2014.11.22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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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logIcon robesmarie 2014.12.18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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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BlogIcon XmHNJuubfX 2014.12.19 1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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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BlogIcon WaXBYqwfnM 2014.12.22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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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BlogIcon UyQBEkmbuH 2014.12.22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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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64~133년은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였다.

기원전 264년 내부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던 신분투쟁이 막을 내렸는데,

주변의 적국에 대항하여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이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동등하게 요구하던 부유한 평민들의 요구를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이웃 종족을 정복한 전리품가 영토가 평민들의 곤궁을 덜어주는 데 이바지했던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정치체제는 원로원에 모인 귀족 - 평민의 신귀족 지배하에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제 1차 포에니 전쟁과 함께 시작한 이 시기는 로마공화국이 지중해권 제국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을 지켜본 시기였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치루었고,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전쟁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 익숙해졌고, 지도자들은 군사적 영광을 동경하고

원정 승리로 인한 인기를 바탕으로 정치적 이득을 얻었다.

시칠리아, 사르데니아, 코르시카.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면서 제국주의의 야망이 서서히 자라났다.














로마가 해외제국을 거느리게 됨에 따라 로마문화와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의 통합이 가속되었다.

기원전 264년에도 헬레니즘 그리스 문명이 동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으로부터 서쪽으로 히스파니아 대서양에 이르는 세계의 정치, 문화, 경제 생활 전반을 주도했다.

이로부터 로마 문화는 헬레니즘적(hellenistic)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급속히 성숙해간다.

그들의 시, 연극, 역사, 수사학, 철학, 예술이 로마인들에게 모델이 되어 로마제국 멸망에 이르기 까지 지중해세계를 특징짓는 독특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생산하게 했다.















로마사는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문헌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폴리비오스, 리비오스, 그 밖의 저자들이 의존한 초기 연대기 저자들은 이 시기 사람들로서 자신이 직접 기록한 사건들을 목격했거나,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다. 








Velleius Paterculus





Cassius Dio






플라우투스, 테렌티우스, 그밖의 많은 동시대 문학 저서들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그 시기의 삶과 문화를 비춰보게 하며, 당시에 발행된 주화들은 경제사 뿐 아니라

주화에 묘사된 장소, 사건, 개념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내 주는 풍부한 고전학적 증거를 제공하게 된다.

묘비명도 더욱 수가 많아지고 내용도 중요한 것이 많아진다.
















본문출처> 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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