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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세페 가리발디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1. 2. 10. 08:31

     

    Giuseppe Maria Garibaldi, (1807년 Nice - 1882년 )

     

     

     

    가리발디는 1807년, 당시 프랑스 제1공화국령이던 니스에서 아버지 도메니코 가리발디와 어머니 마리아 로사 니콜레타의 여섯 자녀 중에 둘째로 태어났다. 

    1814년, 비엔나 의회가 니스를 사르데냐의 에마누엘레 1세에게 반환하기로 결정하면서 원래부터 리구리아인이었던 가리발디는 명실상부한 이탈리아인으로 성장했다. 해안 무역에 종사하던 가족들은 가리발디가 변호사나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공부보다는 체력 단련이나 바닷일을 좋아해서 선원이 되었다.

    첫 항해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24년 1월에는 가리발디가 <최고의 선장>이라고 극찬한 안젤로 페산테가 이끄는 코스탄자 호에 승선하였고, 이후 풍부한 외국 항해 경험을 쌓게 된다. 1832년 2등 선장 면허를 획득했는데, 1833년 항해에서는 주세페 마찌니의 추종자로 "젊은 이탈리아"(La Giovine Italia)의 일원인 오넬리아 출신 조반니 바티스타 쿠네오를 만났다. 이 만남으로 가리발디는 "젊은 이탈리아"와 "카르보나리 혁명협회"에 가입하여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조국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선서를 하게 된다

    훗날 회고록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억압받는 조국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만난 나보다 기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기록했을 만큼 가리발디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만남이었다. 

    가리발디와 마찌니가 처음 만난 날자는 명확하지 않으나 1833년 쥬네브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시에 피에몬테-사르데냐 선원들은 5년간의 해상 복무를 해야 했고, 외항 선원의 경우 복무 시작 날자를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가리발디는 1833년 12월 3등 선원으로 등록했다.

    1834년, 피에몬테에서 공화파 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가담했던 반란이 실패하자 가리발디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제노바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브라질로 탈출하여 1848년까지 머물렀는데, 혼란스럽고 혁명으로 들끓던 남아메리카 대륙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곳에서 평생을 함께 투쟁한 동지이자 아내가 된 안나 마리아 리베이로 다 실바(아니타)를 만나게 된다. 

    그는 브라질에서 독립을 바라는 리우그란데두술 공화국의 해군 함장으로 자원입대해 싸웠고, 1842년에는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에 대한 해방전쟁에서 우루과이 해군의 지휘를 맡았다. 다음 해에는 몬테비데오의 '이탈리아 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부대는 훗날 '붉은 셔츠단'의 모태가 되었다.

    1846년 규모는 작았으나 영웅적인 산탄토니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유럽에까지 이름을 날렸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기금을 모아 그에게 명예의 검을 헌정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1846년 이탈리아 출생의 피우스 9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통일 애국운동이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교황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끄는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개혁을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가리발디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에 단련된 이 몸을 교황 성하께서 받아주신다면, 교회와 조국을 위하여 이 한 몸 다 바쳐 기꺼이 헌신하겠습니다."

    1848년에는 이탈리아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팔레르모 혁명이 터지자 가리발디는 60명의 연대원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피우스 9세에게 교황의 군사로서 싸우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하고 다시 피에몬테의 국왕인 카를로 알베르토에게 싸우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1834년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일을 기억하고 있던 카를로 왕 역시 이 제의를 거부했다. 게다가 이탈리아 정규군은 독학으로 전술을 익힌 이 게릴라 지도자를 멸시했다. 이렇게 되자 가리발디는 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던 밀라노를 돕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밀라노에서는 이미 마치니가 좀더 공화주의적이고 급진주의적인 성향의 해방전쟁을 이끌고 있었다. 카를로 알베르토는 쿠스토차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한 뒤 휴전에 합의했으나 가리발디는 밀라노의 이름을 걸고 독자적으로 계속 전투를 벌였다. 루이노와 모라초네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8월 말 병력이 크게 달리자 스위스 국경 너머로 후퇴해야 했다.

    얼마 동안 그는 아니타와 3명의 아이들과 함께 니스에 정착해 살았으나(이들은 1842년 결혼했음) 이탈리아를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결의는 어느 때보다 강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탈리아가 단일국가로 통일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와 마치니를 비롯해 몇몇 사람뿐이었다. 

    1849년 교황령에서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로마를 공격했고, 가리발디는 로마 방어군 사령관이 되어 야니쿨룸 언덕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5월에는 벨레트리에서 나폴리 군을 격퇴했고, 6월에는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한 로마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이 작전은 실패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리소르지멘토 Risorgimento의 귀감이 되었다.

    가리발디는 패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4000여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로마를 빠져나와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을 피해 가며 중립지역인 산마리노 공화국에 이르렀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동지들과 아내를 잃었다. 그는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토스카나 지방의 해안에 다다랐다. 중부 이탈리아를 가로지른 후퇴작전이 신문마다 실려 그는 유명 인물이 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두 세계(남아메리카와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후퇴작전의 전술을 비판하기도 했으나 그는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인정받았으며, 항복하지 않으려는 용기와 결단력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애국심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사르데냐의 군주는 이같은 그의 존재에 압박감을 느껴 그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2번째로 망명길에 올라 페루로 갔다. 페루에서 그는 원래의 직업이었던 선장으로 일하다가 1854년에야 총리인 카보우르 백작의 허락을 받아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카보우르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공화주의자인 마치니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죽은 형제의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사르데냐 해안에서 좀 떨어진 카프레라 섬의 한 지역을 사들여 농사를 지었다.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가리발디는 피에몬테 군대의 장군 자격으로 모집한 지원병으로 '알프스의 사냥꾼 Cacciatori delle Alpi'을 조직했다. 이 무렵 그는 마치니의 공화국 아이디어를 버리고 피에몬테 왕정이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레세와 코모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부 티롤 지방의 접경 지대까지 진격했다. 이 전쟁은 피에몬테 왕국이 롬바르디아를 획득하는 것으로 끝났다.

    1859년 9월 북부 이탈리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그는 이미 피렌체에 혁명정부가 들어서 있던 중부 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이곳에서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만난 끝에 그는 교황령 공격을 준비하기로 했다. 공격에 성공하면 에마누엘레 2세는 지원을 보내고 만약 실패할 경우에는 그와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 계획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에마누엘레 2세는 그에게 계획을 포기하도록 종용했고 가리발디도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그는 언제라도 에마누엘레 2세와 이같은 구두 협정을 다시 맺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목표가 같지않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두 사람 모두 애국자였으나 가리발디는 이미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뛰어든 몸이었으며, 에마누엘레 2세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피에몬테 왕국의 영토를 가능한 한 많이 넓히는 데 관심이 있었다. 가리발디는 1860년 초 카보우르와 에마누엘레 2세가 자신의 고향인 니스를 프랑스에 돌려주자 매우 분노했으며, 좀처럼 나가지 않던 의사당에 나타나 이 같은 행위는 민족의 신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1860년 4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칠리아 왕국의 메시나와 팔레르모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났고, 가리발디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지원병 몇 천 명을 모아 시칠리아로 향했다. 그는 칼라타피미 언덕의 전투에서 "여기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만들거나 아니면 죽을 것이다(Qui si fa l'Italia o si muore)"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고, 카보우르와 에마누엘레 2세도 민중의 영웅인 그를 감히 막지 못했다. 이들은 가리발디를 지원할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성공이 확실할 경우에만 지원할 생각이었다. 

    5월 6일 약 1,000명의 대원들과 함께 제노바 근처 항구를 떠난 그는 5월 11일 시칠리아의 마르살라에 도착한 그는 곧장 팔레르모로 진격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승리를 거두었고 밀라조, 메시나, 시라쿠사 전투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를 완전히 해방시켰다.

    그는 이 일로 이탈리아 전국에 명성을 떨쳤다. 농민들은 그를 노예제와 봉건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신으로 여겼다. 적에게 한치의 쉴 틈도 주지 않는 번개 같은 작전으로 칼라브리아 지방을 통과해 1860년 9월 7일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나폴리에 진입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을 '양(兩) 시칠리아의 독재자'로 선포했다(나폴리 국왕이 다스린 지역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음). 이어서 나폴리 북쪽에 있는 볼투르노 강가에서 또 한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는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전투로, 약 3만 명의 군사를 지휘했다. 이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둔 뒤 그는 시칠리아와 나폴리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에 따라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에마누엘레 2세와 만나자 제일 먼저 그를 가리켜 통일 이탈리아의 국왕이라고 소리 높여 선포했다. 에마누엘레 2세가 11월 7일 왕실마차를 타고 나폴리로 개선행진을 할 때 가리발디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 뒤 가리발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보상을 사절하고 카프레라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요구한 단 한 가지는 나폴리가 정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국왕의 총독 자격으로 나폴리를 계속 다스리게 해 달라는 것이었으나 이 요구는 거부당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위험한 급진주의자였고, 게다가 교권(敎權) 반대자로서 공공연히 사회개혁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교황이 있는 로마를 다시 점령해 이탈리아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는 프랑스 수비대가 여전히 버티면서 이 지역에 대한 교황의 세속적인 통치권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마누엘레 2세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위험스러운 계획으로 보였다.

    게다가 피에몬테 왕국의 정규군은 가리발디의 군사적 성공을 매우 시기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다시 점수를 얻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니와 공화주의자들이 가리발디의 협력을 얻어낸 뒤 그에게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후 가리발디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알프스부터 아드리아 해까지의 해방'을 주장해서 프랑스, 폴란드, 스위스, 독일 및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자들과도 협력했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크로아티아, 그리스, 헝가리 등의 독립은 결국 그의 손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861년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가리발디는 출발부터 새 왕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골칫거리로 여겼다. 그는 의회에서 카보우르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국토의 절반을 점령해 국왕에게 헌납한 공을 세운 자원병들을 대우하지 않는다고 정부를 힐난했다. 또한 자신이 점령했던 여러 지방의 비효율적인 행정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는 자신을 거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생각했으며, 이탈리아 정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이탈리아 밖에서 큰 찬사를 받고 있던 그는 남북전쟁중인 미국의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1861년 7월 북부연합군의 사령관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사절했다. 그 이유는 링컨이 노예제에 대해 모든 논란을 일소할 만큼의 충분한 비난을 하려 하지 않은 데다가 그에게 북군의 최고사령관 자리까지는 내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명성을 증명해준 또 다른 일은 1864년 4월 영국에서 열광적인 영접을 받은 일이었다. 런던 거리를 지날 때 자발적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를 보낸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1862년 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오스트리아의 통치에서 베네치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다시 가리발디에게 전권을 일임했고, 그의 부대는 이 전쟁에서 어떤 정규군들보다도 더 큰 신망을 얻었다. 그는 4만 명의 '알프스의 사냥꾼'을 이끌고 베체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리사에서는 이탈리아 정규군에게 승리했고, 쿠스토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베네치아를 양도하는 화약을 맺었고 에마누엘레 2세는 가리발디의 진격을 멈추었다.

    전쟁 후에 가리발디는 로마 해방을 요구하는 정당을 만들어 1867년 다시금 로마로 진격했다. 이번에도 이탈리아 정부는 비밀지원을 했으나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체했다. 그러나 정치문제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해 프랑스가 개입하게 되었고, 가리발디의 자원병 부대는 멘타나에서 프랑스 예비군으로 이루어진 교황군에 패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가리발디와의 관계를 부정하기 위해 그를 수감했다가 다시 카프레라로 돌려보냈다. 같은 해에 가리발디는 교황령을 없애자는 국제운동을 벌였다. 1867년 제네바 회의에서 그는 "모든 비밀 공동체 중 가장 극악한 교황령은 폐지되어야만 한다"라고 주장했다.

    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여론은 프로이센 쪽으로 기울어졌고, 많은 이탈리아 인들이 피렌체의 프로이센 대사관에 자원병으로 들어갔다. 로마에서 프랑스 주둔군이 전쟁 때문에 불려 나가자 이탈리아군은 가리발디의 도움 없이 교황령을 점령했다.

    1870~71년 그는 마지막 군사작전으로 새로 성립된 프랑스 제3공화국을 도와 프로이센과 싸웠고 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가리발디는 보르도에서 출마해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관절염과 여러 번의 부상으로 인해 말년에 이르러 절름발이가 되었다. 카프레라 섬에서 은둔 생활을 했으나 그를 찾아오는 많은 사절단들 때문에 여전히 세상사에 밝았고, 그래서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말년에 그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으나 카를 마르크스와 무정부주의자인 미하일 바쿠닌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은 결코 정당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일종의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1879년 '민주동맹'을 결성하여 모든 국민의 선거권 대변, 교회의 재산 몰수, 여성 해방, 상근 군대 유지 등의 법안을 주장하며 노동의 권리와 여성해방의 옹호자로 인정받았다. 종교상으로는 자유사상가의 면모를 보였으며, 시대를 앞서 인종 간의 평등 및 사형제도 철폐의 신념을 가졌다.

     

    평가

    '리소르지멘토' 시기에 이탈리아가 거둔 군사적 승리의 대부분은 가리발디의 공로였다.

    이것은 그가 게릴라전의 명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선동가로서도 이탈리아의 통일에 많은 기여를 했다. 평민 출신인 가리발디는 애국심이라는 새로운 뜻으로 민중을 일깨우는 과업을 카보우르나 마치니보다 훨씬 잘 수행했다. 게다가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재능을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대의(大義)에 이용한 것이 당시의 조류와 잘 맞아떨어져 그에게 커다란 갈채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정직한 인격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올곧은 심성은 그의 정책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자신을 위한 권력추구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남아메리카의 경험을 통해 독재정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의회제는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정치제도라고 불신했다. 실제로 그가 186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독재를 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 뒤를 이은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가리발디에게는 지성적인 면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나 그의 천진한 급진주의는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 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자각을 불러일으켰으며 민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깨웠다. 뒤에 사회주의로 입장을 바꾸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가 목표로 했던 것은 언제나 민중의 해방이었지 과장된 애국심은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목표를 구체화시켰기 때문에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역사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내용 발췌>
    [Daum백과] 주세페 가리발디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Daum백과] 가리발디  다음백과, Daum

    내용 출처> 위키피디어 이탈리아

                     바이오그라피아온라인-가리발디   biografieonline.it/biografia.htm?BioID=202&biografia=Giuseppe+Garibal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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