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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보이아 가문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1. 1. 10. 18:38

     

    사보이아 家 Casa di Savoia이탈리아 에스파냐 군주를 배출한,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왕조들 중의 하나이다. 거듭된 전쟁과 화재로 가문의 기원이나 족보 등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계보학자들 간에도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Map of Italy in 1494

     

     

    사보이아 Savoia(영문 Savoy)라는 이름은 현재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알프스 지방 사보이아 지역에서 유래되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달라지곤 하였으나 정설은 사보이아 왕가의 기원이 1023년 움베르토 비안카마노 백작(움베르토 1세) 사보이아 아오스타 등지에 봉토를 획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후 움베르토 1세의 후세들은 정략결혼과 국제 외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토와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1251년에는 토리노를 획득하였고, 1416년 아메데오 8세 피에몬테의 내부 지역과 서쪽 알프스의 영토를 통일하여 공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탈리아 전쟁 중에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하여,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528-1580)가 공작의 지위를 이어받던 당시에는 영지의 대부분이 프랑스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가문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복무하기도 하고, 1555년부터 1559년까지는 네덜란드 총독을 지냈다. 

    1559 카토-캉브레시스 조약으로 피에몬테의 영지를 수복할 있었지만 토리노, 키에리, 피네롤로, 키바쏘, 빌라노바 다스티 등은 여전히 프랑스 영토였다. 에마누엘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는 한편 자신의 아내였던 앙리 2세의 마르그리트의 인적 관계를 이용하여 영토들을 차례차례 넘겨 받았고, 1574년에는 드디어 피에몬테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1563년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를 프랑스의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이전시키고,  공국의 공식 언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다. 공국 내에서는 프랑스어도 사용되고 있었지만 토리노 천도 이후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이탈리아의 군주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1580년 사보이아 공작이 된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영토 확장의 의지를 보였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1588년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살루초 후국을 점령한 데 이어 1590년에는 밀라노 공국의 도움을 받아 프로방스 지역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이후에도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영토 확장 시도는 계속되었으나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치세를 거치며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다른 유럽의 열강들과 경쟁할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특히 오늘날의 많은 역사가들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를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통해 사보이아 왕가의 성장을 도모하고 이탈리아의 독립을 지켜나간 인물로 평가한다. 

    1714년에는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전하여 시칠리아를 양도받는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사르데냐의 왕이었던 카를로 황제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바꾸자고 제안하였고, 1718년 그 제안을 받아들여 국호를 사르데냐 왕국으로 개칭하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는 여전히 토리노였다.

     

     

     

    Van Dyck, 1624, Emanuele Filiberto di Savoia (1588-1624)

     

     

     

    1796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사보이아 영지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수도를 사르데냐의 킬리아리로 옮겼으나 1814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기존의 영지를 회복하고 제노바 등의 새로운 영지를 추가로 받는다.

    1821 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 세 ( 1759 - 1824)가 자유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했고,​ 1831년 사르데나 왕이었던 카를로 펠리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직계는 단절되었고, 먼 친척인 카를로 알베르토가 계승하게 된다.

    1849년, 오스트리아 군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버티지 못한 카를로 알베르토는 강제로 퇴위당하였고,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재위를 물려받는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전쟁에는 재능이 없었으나 뛰어난 행정력과 정치력을 가진 군주였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너무 강력했기에 부친을 도운 자유주의 세력과 공화주의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고, 상공업을 진흥시키면서 오스트리아에 전쟁배상금을 완납하고, 차근차근 국력을 키웠다.

    주세페 마찌니Giuseppe Mazzini 와 같은 민족주의적 인물들은 이탈리아 통일은 대중 봉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으나, 1848 년 혁명이 실패한 이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지도자로 사르데냐 왕국과 카보우르 총리가 부각되었다. 

    1853년, 사르데냐 왕국 단독으로는 오스트리아를 이기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다른 열강들을 끌어들여 이탈리아 통일을 도모하려는 전략으로 크림 전쟁에 참전한다. 주로 영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으나 영국은 직접적인 지원을 망설였고, 1859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지만 프랑스가 배신하여 오스트리아와 화친을 맺고 사르데냐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권고한다.

    이에 분노한 카보우르 총리 등이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었고, 이후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가 샤르데나 왕국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온다.

     

     

     

    이탈리아 조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Vittorio Emanuele II

     

     

     

    1860년, 프랑스에게 사보이와 니스를 대가로 중부 이탈리아 병합을 허가받는다.

    1861년, 시칠리아 섬과 남 이탈리아를 석권한 주세페 가리발디가 아무런 대가 없이 모든 영지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하면서  대부분의 이탈리아를 통일(리소르지멘토 il Risorgimento)하였고, 이탈리아 왕국 건립을 선언하며 초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국왕 즉위 당시의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던 로마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베네치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탈리아 영토를 차지한 상황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도와 참전하였고, 승전 후 베네치아를 양도받게 된다.

    1871년, 보불전쟁 발발로 로마의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틈을 노려 로마를 점령하였고, 이때부터 로마를 이탈리아의 수도로 삼게 된다. 이 일로 분노한 비오 9세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파문하였다가 국왕의 사망 이후 파문을 취소하였다.

    이탈리아 왕국 Regno d'Italia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으며,  대영 제국, 프랑스,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과 함께 식민지를 경영한 열강 중 하나였다. 

     

     

     

     

     

    내용 참조> 위키피디어 영어/이탈리아

                      이탈리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네이버 블로그] 사보이아 가문|작성자 블랙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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