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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크 시대의 로마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9. 21:31

     

    바로크가 대두하면서 현실도피적 경향을 밀어내고 등장한 현실 긍정적 태도는 무엇보다도 오랜 종교전쟁을 치르고서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의 징후이자 트렌토 종교회의 기간의 비타협주의를 대체하고 나타난 타협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교회는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되도록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비록 '이단자'들에게는 종전처럼 가혹한 박해를 가했지만 신자들에게는 점점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자기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자유를 허용하였다. 주위의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으며 세속적인 삶의 제반 관심사와 즐거움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거의 어디서나 교회가 국가적 차원의 교회가 되고 국가 통치의 수단이 되었는바, 이는 종교적 목적이 국가의 이익에 널리 종속되는 현상과 처음부터 직결된 것이었다. 로마에서까지도 정치적 배려는 종교적 배려에 우선하였다. 이미 식스투스 5세는 카톨릭을 정통으로 믿는 에스파니아의 정치적 우위를 견제하기 위해서 종교적으로 믿을 수 없는 프랑스에 많은 양보를 하였다. 교황청 정치의 이러한 세속적 경향은 후기 바로크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이때부터 로마는 교황의 거주지로서뿐만 아니라 카톨릭 세계의 수도로서 그 위용과 화려함을 과시하게 된다. 교회예술에서도 궁정적 예술의 장대 화려한 성격이 지배적이 된다. 매너리즘이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현세 부정적이어야만 했던 데 비해, 바로크는 좀 더 자유롭고 감각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경쟁은 이제 끝났다. 카톨릭 교회는 이미 잃어버린 영역은 포기했고 남은 영역 내에서는 그런대로 안정감을 누렸다.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극도로 풍부하고 사치스러우며 낭비적인 예술 생산의 한 시기가 시작된다. 이 시기는 지금까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교회와 예배당, 천장화와 제단화, 성자상과 기념 묘비, 성골함과 봉헌물을 생산하였다. 카톨릭의 부흥에 힘입어 융성해진 것은 결코 교회적 예술장르만이 아니었다. 교황들은 호화스러운 교회를 세웠을뿐더러 화려한 궁정과 별장과 정원들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황의 총신인 추기경들은 점점 왕이나 왕족을 방불케 하는 호화판 생활을 영위하였고, 건축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무절제한 사치를 과시하였다.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카톨릭교회는 전점 더 시민적이 되어가는 개신교와는 반대로 날이 갈수록 더욱 궁정적이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에서는 어디서나, 마치 제정시대에 파리 도처에서 나폴레옹의 독수리 문장을 보듯이 바르베리니가 의 꿀벌 문장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르베리니 집안이 교황 가문 중에 예외적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 못지않게 유명했던 파르네제가 와 보르게제가 이외에도 루도비지, 팜필리, 끼지, 로스필리오지 등의 입안도 당대의 가장 열성적인 예술 애호가들이었다.

     

     

    Bernini, The Ecstasy  of St. Theresa,,1645-1652

     

     

    바르베리니가 출신의 교황 우르바누스 8세 치하에서 로마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의 바로크 도시가 되었다. 적어도 우르바누스 8세 치하 전반기 동안은 로마는 이탈리아의 모든 예술계를 지배했을뿐더러 나아가 전 유럽의 예술 중심지였다. 로마의 바로크 예술은 프랑스 고딕 예술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제적이었다. 그것은 당시 존재하던 온갖 에너지를 흡수하고 모든 예술적 경향을 통합해서 당대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현대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예술 양식을 이룩했다. 1620년 경에는 바로크가 로마에서 완전히 지배적인 양식이 된다. 페데리고 주카리와 카발리에레 다르피노를 선두로 하는 매너리스트들이 아직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예술경향은 이미 구식이 되었고, 카라바지오와 카라지 일가들 역시 미술 발달사 면에서는 낙후되어 있었다. 이제 통용되는 화가로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와 베르니니 및 루벤스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예술활동의 중심이 이탈리아로부터 유럽의 서부와 북부로 옮아가는 발전과정에서 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Pietro da Cortona, The Triumph of Divine Providence, 1632-39

     

     

    전성기 바로크 벽화의 최대 거장이었던 코르토나의 예술은 이미 이탈리아 외부, 즉 프랑스 실내장식의 넘쳐흐를 듯 풍만하고 화려한 장식 스타일에서 계승되고 있다. 베르니니는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왕자와 같은 환영을 받았으나 오래지 않아 국민적 저항에 부딪힘으로써 루브르 궁전을 완공하려던 그의 계획은 저지되었다. 부용 공작은 16세기 중반쯤에서는 파리를 세계의 수도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프랑스는 이때 정치적으로만 유럽의 지배적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교양과 취미에 관련된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교황청 세력이 약화되고 로마가 빈곤해감에 따라 예술의 중심지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이던 국가 형태, 즉 절대군주제가 그 완성에 이르고, 예술 생산이 가장 중요한 수단을 구사할 수 있었던 나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St. Peter's Baldachin by Bernini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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