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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적・ 카톨릭적 바로크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5. 14:14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 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크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 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 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와 카라치 일가의 주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예술관의 두 방향을 대표한다. 이들 두 방향의 어느 쪽도 매너리스트들의 높은 교양 수준에는 많이 뒤쳐지고 있다. 왜냐하면 카라치가의 아틀리에에서도 르네상스의 거장을 모방하면서도 비교적 단순한 것을 택하고 일반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은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카라치가의 세 사람 중에서 '교양 있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아고스티노 카라치 뿐이며, 카라바지오 자신은 사변이나 이론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심지어는 교양을 적대시하는 보헤미안이었다.
근대적 교회예술의 성립
카라치가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일체의 근대적 교회 예술의 역사가 이들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너리스트의 난해하고 복잡한 상징주의를 간단하고 명백한 알레고리(우의, 풍유)로 바꾸어 놓았는데, 여기서부터 우리에게 상징과 형식들인 십자가, 머리 위의 후광, 백합, 두개골, 하늘을 쳐다보는 시선, 사랑과 고뇌의 희열 등이 그려진 근대의 성화가 발전한다. 종교 예술은 이때 비로소 결정적으로 세속의 예술과 구분된다. 르네상스와 중세에는 순수하게 종교적 목적을 위해 생산된 예술작품과 세속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작품 사이에 많은 중간적 형식이 존재하였지만 카라치가의 양식이 완성되면서부터는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분리가 이루어진다. 카톨릭교회의 그림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가 확립되고 공식화되었다.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세례, 승천, 십자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정원사로서의 예수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성서 장면은 오늘날에도 성화의 일반적 모델로 남아 있는 하나의 형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교회 예술은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자발적・주관적 특징을 상실하며 날이 갈수록 직접적 신앙보다 예배의식에 의해서 더 많이 규정되었다. 교회는 종교개혁 정신의 주관주의가 지닌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작품도 정통적 교리의 뜻을 신학적 저서나 마찬가지로 일체의 오해나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없이 표현해주기를 바랐다. 교회는 예술적 자유의 위험성과 비교할 때 예술작품의 획일화는 그래도 나은 악이라고 생각하였다.
카라바지오(1573-1610, 본명은 미켈란젤로 아메리기인데 출생지 이름대로 카라바지오로 불림)도 처음에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세기의 예술가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은 카라치가의 영향보다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담하고 가식 없는 힘찬 자연주의는 그의 주문자들이었던 고위 성직자들의 취향을 계속해서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의 예술이 그들이 종교적 묘사의 본질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위대성과 고귀함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질적인 면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어떤 그림도 필적할 수 없는 그의 그림에 그들은 이의를 제기하였고, 심지어는 거듭 퇴짜를 놓았다. 그들은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 단지 비습관적인 형식만을 보았고, 진정한 민중의 언어로 표현된 이 거장의 깊은 경건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카라바지오의 이러한 실패가 사회학적으로 더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적어도 중세 이후로 자신의 예술적 특성으로 인해 실패했고, 훗날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동시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산 최초의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바지오가 실제로 그의 예술적 가치 때문에 거부당한 최초의 거장이라면, 이는 바로크가 예술과 감상자의 관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음을 뜻한다. 즉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심미적 문화'의 종언을 고하고, 내용과 형식의 더욱 엄격한 분리를 가져와 이제 형식의 완결성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탈선의 변명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되도록 광범한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소망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귀족주의적 정신은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로마교황은 카톨릭 신앙을 보급・선전하기 위하여 '민중예술'을 육성하고자 했으나 그 민중성은 이념과 형식의 단순성에 한정된 것이었고 평민적 표현방식의 직접성은 피하고자 했다. 그림 속의 거룩한 인물은 신자들에게 가능한 한 깊은 인상을 주도록 그려야 했지만 여하한 경우에도 그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내려와서는 안되었다. 예술작품은 신도들을 권유하고 설득하여 압도하는 일을 해야 했지만, 이러한 일들은 정선된 고상한 언어로 해야만 했다. 주어진 선전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론 때로는 예술의 민주화, 아니 평민화조차 불가피하였고, 작품을 낳은 종교적 감정이 순수하고 깊으면 깊을수록 작품의 효과는 더 조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교회의 주된 관심은 신앙의 심화보다도 신앙의 보급에 있었다. 교회가 그들의 목적을 세속화하면 할수록 신자들의 종교적 감정은 그만큼 더 약화되었다. 물론 종교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경건성은 전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틀에 박힌 외면적인 일과가 되었고 그 엄격한 초세속적 성격을 상실하였다. 루벤스는 매일 아침 미사에 참여했고 베르니니는 일주일에 두 번씩 성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그나시우스 로욜라의 권유를 좇아 일 년에 한두 번씩 수도원의 고독 속에 침잠해서 종교적 수도에 전념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전의 예술가들보다 진정으로 더 종교적이었다고는 누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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