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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II 세와 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1. 16. 15:12
1505년 3월,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II 세에 의해 로마에 초청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의 영웅적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교황과 예술가는 두 사람이 모두 장대하고 격렬한 기질이었으므로 서로 충돌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의기충천하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항상 거대한 계획이 용솟음쳤다. 율리우스 2세는 고대에 필적하는 자신의 분묘 작업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려고 생각했고, 이 착상에 열광한 미켈란젤로는 40개 이상의 조각상을 포함하는 거대한 건조물을 계획하였다.
감격한 교황은 필요한 대리석을 확보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카라라로 파견하였다. 미켈란젤로는 8개월 이상을 이 산중에서 보냈다. 격렬한 흥분 속에서 어느 날, '말을 타고 이 지역을 돌아보는 가운데 해안 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산 전체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거상으로 조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일 시간과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면 그는 만들었을 것이다.'
1505년 12월, 그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가 고른 대리석이 선편으로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리석들은 그가 거주하고 있던 성 카타리나 성당의 성 베드로 광장으로 운반되었다. '엄청난 석재의 크기에 사람들은 놀라고, 교황은 크게 기뻐하였다.' 교황은 작업을 시작한 미켈란젤로를 자주 찾아왔고 '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교황은 방문을 더욱 손쉽게 하기 위해 바티칸 궁에서 미켈란젤로의 집까지 구름다리를 놓아 몰래 다닐 수 있는 통로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총애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의 성격도 미켈란젤로 못지않게 변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계획에 열중하곤 했다. 자신의 영광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성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고자 했는데, 이는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던 적들의 진언에 의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했던 것은 미켈란젤로에 필적하는 천재이며 보다 의지가 강한 교황청 건축가 브라만테였다. 기지와 이성의 브라만테와 열정과 야성의 미켈란젤로 사이에 타협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주저없이 브라만테를 비판하고, 사사건건 그가 한 일의 부정행위를 비난하였다. 브라만테는 결국 그를 실각시키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율리우스 2세가 미신적인 경향이 있음을 파악하고는 살아있는 사람이 묘비를 건립하는 것은 불길하다는 민간 신앙을 상기시켰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계획을 교황으로부터 교묘하게 이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대신 채택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1506 년 1월,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을 결정했다. 묘비 건립은 취소되었고, 미켈란젤로는 큰 모욕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위해 미리 사용했던 비용이 큰 부채가 되었다. 그는 교황에게 호소하였으나 교황은 찾아온 그를 바티칸에서 내쫓았다.
미켈란젤로는 집으로 돌아와 교황에게 자신은 떠난다는 편지를 보내고, 상인과 석공들에게 로마의 모든 물건을 다 팔라고 명했다.
그리고는 말을 타고 홀연히 출발하였다. 편지를 받은 교황은 기수들에게 명하여 미켈란젤로의 뒤를 쫓게 했다. 늦은 밤에 로마로 귀환하라는 교황의 명령을 전달받은 그는 교황이 약속을 지켜준다면 귀환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율리우스 2세에게 받은 모욕이 미켈란젤로가 떠날 결심을 하게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줄리아노 다 산 카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라만테의 암살 의도를 암시하고 있다.
어쨌든 미켈란젤로가 떠남으로써 브라만테가 거장이 되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떠난 날, 성 베드로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의 집요한 증오는 미켈란젤로가 하던 작업을 영구히 소멸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율리우스 2 세의 분묘용 대리석이 쌓여있던 성 베드로 광장의 작업장을 빈민들에게 약탈시켰다.
율리우스 2세는, 조각가의 반항에 격분하여 피렌체 정청으로 계속해서 친서를 보냈다. 교황의 분노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한 피렌체 정청은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로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그는 율리우스 2세가 자기에게 분묘를 만들게 할 것과 피렌체에서 작업할 것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율리우스 2세가 페라라와 볼로냐 전쟁을 위해 로마를 출발하자 미켈란젤로는 터어키 황제의 다리 건설 제안을 받아들여 터어키로 떠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교황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06년 11월 말, 그는 어쩔 수 없이 교황이 있는 볼로냐로 향했다. 그곳에는 전승한 율리우스 2세가 당당하게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자네가 나를 찾아와야 옳을 것을 자네는 내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였다. 악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쫓겨나고 보니 섭섭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거듭 사과하였다.
교황과의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황은 분묘 건립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볼로냐에 청동 거상을 세우고자 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청동 주조법을 전혀 모른다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작은 집에서 침대도 없이, 두 사람의 조수와 주물사와 함께 자야 했다. 첩첩산중이었다.
1507년, 결국 주물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겨우 동체만 건졌다. 이 작품은 1508년 2월에야 완성되었고, 미켈란젤로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나는 거의 식사할 틈도 없다' 라고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이렇게 고생해서 만든 작품은 성 페트로니오 성당 앞에 세워졌으나 1511년, 율리우스 2세의 적이었던 벤티볼리오 당에 의해 파괴된다.
다시 로마로 돌아온 미켈란젤로에게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하였다. 당시의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 기법을 전혀 알지도 못하였다. 마치 교황은 불가능한 것을 명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해내는 것에 낙을 두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가 다시 교황의 총애를 회복하게 된 것을 보고, 일부러 이 어려운 일을 시키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그 해 1508년에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에 벽화를 그려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미켈란젤로로서는 이 천장화야말로 큰 시련이었다. 그는 이 놀랄만한 영예의 작업을 사퇴하고자 했다. 라파엘로를 대신 천거하기까지 했다. 프레스코화는 자기의 분야가 아니므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으나 교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온 조수들에게까지 까다롭고 무뚝뚝하던 미켈란젤로는 거의 혼자서 작업했다. 일은 점점 더 늘어나고, 계획은 확대되었지만 그의 일 욕심은 더욱 왕성해졌다. 애초에 결정했던 원형 천장뿐 아니라 거기에 둘러싸인 벽면까지 그리려고 결심한 것이다.
이 방대한 작업은 1508년 5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암담하고도 숭고한 시간이었다!
'나는 정말 용기를 잃고 있습니다. 벌써 1년 동안 교황으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보수를 받을 만큼 일이 진척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너무 어렵고, 내 본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고 있습니다. 오오 신이여, 나에게 용기를 주소서'
겨우 <노아의 홍수>를 다 그리고 나니 곰팡이가 슬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도저히 프레스코 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였으나 교황은 어떤 구실도 들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일에 착수해야 했다. 그 자신의 불안과 피로 위에 더더욱 힘든 것은 가족들의 일이었다. 그의 온 가족들은 모두 그에게 기식하고 매달려 그를 혹사시켰다. 부친까지도 이제는 판단이 흐려져 금전 문제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일로 기진맥진한 경우에도 아버지를 위하여 편지를 썼다.
' 내가 있는 한, 당신께서 불편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가진 모든 것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내가 살아있는 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내가 부를 차지한 들 당신이 안 계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선량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미켈란젤로는 경제적으로 자기를 몹시 괴롭히는 형제들과 자기의 실패를 은근히 꾀하는 적들의 틈에서, 이러한 망은과 무서운 질투 사이에 몸부림쳤다. 이 어려운 시기에 저 시스티나 성당의 영웅적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가려고도 하였다.
교황은 그의 일의 진척이 느린 것과 비밀리에 하려는 고집에 대하여 화를 냈다. 자존심이 강한 두 사람의 성격은 우뢰처럼 부딪혀 충돌하곤 했다. 콘디비는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율리우스 2세가 그에게 이 일이 언제 완성되겠는가 물었더니 미켈란젤로는 언제나처럼 "다 되는 시기에"라고 대답하였다. 교황은 노하여 지팡이를 두들기면서 "다 되는 시기라고! 다 되는 시기라고!"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미켈란젤로는 집으로 달려가 당장 로마를 떠날 차비를 하였다. 율리우스는 급히 하인을 보내어 5백 두카트를 전하게 하였고, 하인도 그를 말리면서 교황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또다시 그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두 사람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어느날 교황은 화가 잔뜩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내가 이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꼴을 보고 싶으냐?" 미켈란젤로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다리를 모두 떼어 버리고 1512년 11월 1일, 드디어 작품을 공개하였다.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이었다. 창조하고 소멸케 하는 신의 영이 가득 차 있고, 모든 생명의 힘이 질풍처럼 회오리치는 이 장엄한 작품의 제막식으로는 너무나 뜻깊은 날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가운데 그는 간신히 이 초인적인 힘이 필요했던 일에서 해방되었다. 시스티나의 원천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고개는 항상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시력이 상하여 그 후로는 편지를 보거나 무엇을 들여다보려면 머리 위에 치켜들고 보지 않으면 안 되었고 체형조차 바뀌었다.
그는 자기의 신체가 그렇게 흉하게 된 것을 매우 비관하였다.
시스티나 성당의 작업이 끝나고, 율리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 돌아와 율리우스 2세의 분묘를 다시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3년간 줄곧 이 일에만 몰두하였는데,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가장 완성형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정열과 의지와의 가장 균형 잡힌 상태를 잘 나타낸 작품 <모세>와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두 점의 <포로>이다.
내용 출처> 미켈란젤로의 생애 / 로맹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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