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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 - 방황기
    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3. 14:56

     

    피렌체의 우환을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떠났던 세 친구는 다시 볼로냐로 향한다. 베네치아의 높은 물가를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볼로냐 당국은 오른손 엄지손톱에 붉은 밀랍 표시를 받은 외지인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고 있었는데,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던 세 사람은 여관에서 허가청으로 보내졌다. 

    이 곳에서 우연히 만난 예술애호가의 보증으로 체류허가를 받게 되고,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잔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가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집에 일 년 가량 머물렀다. 

    알도브란디는 일찌감치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즉시 볼로냐 시에서 필요로 하는 작업에 투입시킨다. 니콜로 피사노가 작업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산 도메니코 교회 <성 도메니코 유골함> 의 일부분인 <성 프로클루스 (St. Proclus)> 상을 의뢰하고, 30 두카티를 지불했다. 

     

     

    Ark of Saint Dominic in the  Basilica of San Domenico  in  Bologna

     

     

    St. Proclus (Michelangelo), 1494–1495

     

     

    다시 대리석과 조각 도구들을 공급받은 미켈란젤로는 낮에는 작업을 하고, 저녁이면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알도브란디에게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작품들을 낭송해주었다.

    그는 예언자나 그의 불길한 예언을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그를 다시금 소생시킨 것이었다. 1

     

    작업이 끝난 조각상이 제 자리에 놓여지자 원래 그 작업을 맡고 싶어했던 볼로냐 조각가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태생적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겁이 많은 편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안전한 피렌체로 돌아고 싶어 했다. 

     

    1495년 봄, 미켈란젤로는 다시 사육제의 제전과 여러 당파들의 열광적으로 싸우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주위에서 서로 물고 뜯는 열광으로부터 내적으로 해방되어 사보나롤라 신자들의 광신에 대한 일종의 경멸감을 가지고 묵묵히 <잠자는 큐피드>를 조각하였다. 이 작품은 동시대 사람들이 고대의 작품으로 오인하곤 했다. 1

     

    피에로 데 메디치가 쫓겨난 피렌체는 보이지 않는 왕 예수 그리스도; 사보나롤라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 시기 미켈란젤로는 로렌조 일 마니피코의 사촌인 로렌조 디 피에로 프란체스코에게 의뢰받은 <산 지오바니노>를 조각하는데, 그 작품은 일찍 사라져 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로렌조는 다시 <잠자는 큐피드> 상을 주문한다. 그들은 마치 고대의 조각처럼 완벽하게 완성된 이 작품을 로마의 미술품 중개인 발다사레 델 밀라네제에게 보냈고, 발다사레는 고대의 유물이라고 속여 산 조르지오의 추기경 라파엘레 리아리오에게 200두카티에 팔았다 (미켈란젤로에게는 30 두카티를 지불했다고 한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에 가까운 전횡에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는 " 이렇게는 안된다" 는 속삭임이 점점 더 커져갔다. 안정된 작업환경을 원하던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잠자는 큐피드>의 조각가를 찾아 추기경 라파엘레 리아리오가 파견한 손님을 맞게 되고, 그의 제안에 따라 로마로 향한다. 

    교황 시스토 6세의 조카였던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인문주의자들의 친구이자 보호자였고 예술 애호가로 알려져 있었으나, 진정으로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잠자는 큐피드>가 고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자 중개인에게 지불한 200 두카티의 반환을 요구하며 작품을 돌려보냈는데, 이 작품은 후에 발렌티노 공작 - 체사레 보르지아 - 에게 팔려 만토바의 후작부인에게 증정되었고, 계속 만토바에 남아 있었으나 어느 시점에선가 유실되었다.

    추기경은 젊은 미켈란젤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지 약속했던 작업 의뢰를 하지 않았고, 로마에서 다시 만난 로렌조 일 마니피코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조차 자신의 조상을 의뢰해놓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날들이 흘러갔다. 

    전기작가 브루노 나르디니는 미켈란젤로 평생에 걸친 고독감이 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어쨌든 로마에는 리아리오 추기경이나 피에로 데 메디치 이외에도 예술가를 찬양하는 유력자들이 많았고, 야코포 갈리라는 은행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저택에 방과 작업실을 제공했다. 이 상서로운 만남이 <바커스>라는 결실로 이어진다. 

     

     

    Bacchus, 1496-1497

     

     

     

     

     

     

     

     

    Nel bacco Michelangelo mostra di aver raggiunto,oltre ad un'assoluta padronanza nel modellato anatomico,anche una rara sapienza compositiva, un equilibrio e un'armonia appunto classici che sono forse all'origine dell'apparente freddezza e staticita della figura. In essa peraltro è già presente una certa carica di energia potenziale, che si risolve nella posa instabile, ma felicissima per la rappresentazione della divinità in stato di ebbrezza. 2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서 해부학적 모델링, 완벽한 구성, 차갑고 고요한 형태에서 오는 고전 작품의 조화와 균형 모든 면에서 완벽한 숙련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잠재된 에너지의 집적을 불안정한 자세로 풀어낸 것과 취기에 잠긴 신성의 표현에서 탁월함이 드러난다. 2

     

     

     

     

    당시에는 야코포 갈리의 조각 정원에 놓여 있었고 현재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바커스상은 총 높이 203cm로, 바커스는 오른손에 술잔을 들고, 왼손에는 자신에게 바쳐진 호랑이 가죽을 들고 있다. 옆에서 즐겁게 포도송이를 먹고 있는 것은 어린 사티로스이다. 

     

     

     

     

    갈리의 저택에 머물면서 그는 또 다른 <큐피드>를 조각하는데, 이 작품 역시 유실되었다. 

    이후 갈리는 < 미켈란젤로는 1년 내에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상을 만들고, 누구도 그보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 > 이라고 산 디오니지의 추기경 잔 드 빌레르에게 보증서를 써준다.

    성 베드로 성당의 프랑스 채플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1. 미켈란젤로의 생애 / 로맹 롤랑

    2. Storia dell'arte / Francesco Negri Arnoldi

     

    내용 발췌> 미켈란젤로 / 브루노 나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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