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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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이탈리아의 최후 정복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1. 2. 1. 20:02
제2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7-304/3) 로마는 비록 삼니움인의 적대감을 촉발시킬 의도가 없었지만 로마의 식민시와 동맹체제가 삼니움인들이 서쪽으로 확장할 기회를 차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오스키인들과 전쟁중이던 타렌툼(타란토)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삼니움의 동쪽을 잠식하게 되었다. 로마와 삼니움간의 적개심은 기원전 327년 나폴리에서 발생한 내분에 삼니움인들이 한쪽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수비대를 진주시켰을 때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반대 진영을 지원하던 로마인들은 나폴리를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고, 이로써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전사戰史는 불확실하다. 연대기 저자들이 기록하는 전투들이 모두 실제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파스티가 기원전 321년에 발생샜다고 하는 카우디움 분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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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lll - 잿더미 위에서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1. 1. 30. 22:48
당시 로마에게 적의 침공보다 심각했던 것은 독재에 대한 두려움이었을던 것 같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비상시국에는 강력한 개인에게 정부를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그렇지 않았다. 독재 정치 후보자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유혹이 먹혀들기에는 공화정의 자유에 대한 전통이 워낙 확고했다. 역량이 뛰어났으나 독재 정치에의 야심을 가진 카밀루스는 탁월한 공적과 두터운 신망에도 불구하고 추방당했으며 다른 두 명의 최고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결국 로마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 없이도 개혁을 달성한다. 기원전 367년경에 시작된 정부의 재조직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인 동시에 기존의 귀족들과 신흥 평민 가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했다. 단순히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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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ll - 주변국들과의 전쟁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8. 1. 23:01
아이퀴인과 볼스키인 아이퀴인과 볼스키인은 기원전 5세기 내내 로마의 가장 고질적인 원수였다. 아이퀴인이 로마 남동쪽 투스쿨룸 근처에 솟아있는 알기두스 산이라는 전략적 고지를 점령한 뒤로 로마인들은 그들을 몰아내기가 어려웠다. 파스티에 따르면 기원전 458년에 로마 군대가 알기두스 산 밑의 계곡에서 아이퀴인의 함정에 걸렸는데, 다섯명의 기병이 포위선을 뚫고 로마에 그 소식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로마 군은 몰살당할 뻔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너무나 중대한 위기였기 때문에 원로원이 보낸 사절이 농사에 전념하고 있던 킨킨나투스Cincinnatus를 만나러 갔다. 원로원의 요청을 받고있는 Cincinnatus Juan-Antonio Ribera-y-Fernandez Museo del Prado in Mad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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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기원전 509-264) l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30. 14:17
로마 계급간의 투쟁은 이탈리아 반도에 살고있던 다른 종족들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병행하여 발생했다. 수적으로는 소수에 불과한 귀족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평민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따라서 마지 못해서 평민 지도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변 종족들과의 전쟁 리비우스의 로마사 제2권부터 제5권 중간 까지 기원전 5세기의 전쟁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기록은 비록 거창하게 미화되기는 했으나 약탈을 위한 침공이거나. 얼마 되지 않는 토지 소유권을 놓고 접경에서 벌인 소규모 접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변 종족들인 라틴인, 사비니인, 헤르키니인, 아이퀴인, 볼스키인, 에트루리아인 사이에서 발생했다. 로마인들과 이탈리아의 다른 종족들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적인 농민이자 목축업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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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국가제도의 실체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27. 11:48
로마 공화정의 국제는 이론적 원칙을 가지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수세기를 지나며 관습과 선례와 구체적인 법률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된 시점을 로마에 참된 민주적 정체가 출현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사가 폴리비오스같은 다른 학자들은 그 법을 가리켜 혼합된 정체,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훌륭한 정체가 고루 섞인 혼합정체라고 불렀다(정무관에 의해 대표되는 군주정, 원로원에 의해 대표되는 귀족정, 호민관들과 민회에 의해 대표되는 민주정). 이 이론에 따르면 각 계층은 서로 균형을 유지했고, 그로써 어느 한 계층이 나머지 두 계층을 누르고 더 강해질 수 없었던 셈이 된다. 두 견해 모두 옳지 않다. 공화정은 강력한 과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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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공화정 - 평민들이 거둔 승리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18. 18:57
기원전 445년 경 두가지 사안이 귀족들과 투쟁하던 평민들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하나는 군사적 위기로써, 귀족들이 정확하게 이해한 것처럼 평민들의 선의와 협력이 없이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두번째는 그 해의 콘술이 평민인 마르쿠스 게누키우스M.Genucius 였다는 점이다. 신분 갈등에서 도출된 타협안은 평민이 콘술이 아니면서 콘술과 동일한 권한을 가진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최고 정무관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교묘한 귀족의 전략이었는데, 귀족직의 콘술 직 장악을 보장하는 동시에 평민에게 정부 안에 한 몫을 내어 줌으로써 군사적 통일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c. 387 BC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참가했던 Battle of the Allia 트리부누스 밀리툼에게 콘술의 권한을 부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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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초기 평민들의 투쟁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13. 17:58
평민들의 철수Secession of thr Plebs로 자신들이 로마의 국방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과시한 평민계급은 세력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독자적인 민회와 지도자, 옹호자를 두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귀족도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사회에 대항해 벌인 투쟁은 로마 정체의 발전에 궁극적으로 유익하게 이바지했다. 기원전 452년 경, 성문법을 제정하려는 몇 번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뒤, 호민관들은 원로원에 대해 정의롭고 공평한 법의 골격을 세우려는 위원회 (양 진영을 모두 대표하는)의 설치를 요구했다. 원로원은 평민 참여 요구는 거부했으나 기존의 법을 법전화하기 위해 10인의 입법자decemviri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는데는 동의한다. 쿠리아회의 내부 10인의 입법 위원회가 설치되기 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