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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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1. 21:10
가장 위대한 참회 설교자이며 예언자는 1498년에 이미 피렌체에서 화형을 당했다. 페라라 출신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여기서는 그에 대해서 몇 마디만 하기로 하자. 그가 피렌체를 변화시키고 지배하였던 강력한 도구는 바로 그의 연설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대개는 즉석에서 불충분하게 옮겨 적은 설교들이 아주 제한된 개념만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외적인 수단들이 그렇게 대단했던 것 같지는 않다. 목소리, 발음, 수사적 표현 등은 오히려 그의 약점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빼어난 문체와 예술적인 설교자를 원하는 사람은 그의 경쟁자였던 수도사 마리아노 다 기나짜노에게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연설에는 특별한 개인적인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 이후로 루터에 이르기까지 두 번 다시 없었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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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지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30. 13:03
성직 계급과 수도사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익숙해져 있으며, 자신들의 존재가 보통 사람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에서 오래되고 강력한 것들이 가지는 이점이었다. 보통사람은 누구나 친척 중에 성직자나 수도사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보호나 아니면 장차 교회 재산에서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한가운데에는 로마 교황국이 있고,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을 갑자기 부자로 만들어주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혀와 펜을 묶어둘 수 없었다는 점도 분명하였다. 가장 대담한 풍자 작가들은 대개가 자신이 수도사이거나 성직의 록을 먹는 자들이었다. 을 쓴 포지오는 성직자였다. 프란체스코 베르니는 성당 참사 회원이었다. 테오필로 폴렝고는 베네틱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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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로마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9. 21:31
바로크가 대두하면서 현실도피적 경향을 밀어내고 등장한 현실 긍정적 태도는 무엇보다도 오랜 종교전쟁을 치르고서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의 징후이자 트렌토 종교회의 기간의 비타협주의를 대체하고 나타난 타협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교회는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되도록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비록 '이단자'들에게는 종전처럼 가혹한 박해를 가했지만 신자들에게는 점점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자기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자유를 허용하였다. 주위의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으며 세속적인 삶의 제반 관심사와 즐거움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거의 어디서나 교회가 국가적 차원의 교회가 되고 국가 통치의 수단이 되었는바, 이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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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적・ 카톨릭적 바로크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5. 14:14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 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크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 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 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와 카라치 일가의 주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예술관의 두 방향을 대표한다. 이들 두 방향의 어느 쪽도 매너리스트들의 높은 교양 수준에는 많이 뒤쳐지고 있다. 왜냐하면 카라치가의 아틀리에에서도 르네상스의 거장을 모방하면서도 비교적 단순한 것을 택하고 일반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은 표현하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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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의 종교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20. 11:39
한 국민의 도덕성은, 신에 대한 의식의 문제, 곧 신이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믿음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믿음이 세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 아니면 비참함과 빠른 몰락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 상관없이 그렇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물론 장소와 사람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이 시대의 도시들은 결정적이고 신선한 행복감이 지배하고 있었다. 생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으 16세기에 외국의 지배가 확정되면서 비로소 분명하게 나타난다. 당시 이탈리아의 불신앙은 악명이 높았다. 그 증거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증언과 예제들을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의 과제는 분류하고 구별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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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재평가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8. 11:23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크의 재평가 17세기 예술이 총괄적으로 바로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크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18세기에는 아직도 그것은 당시의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서 보아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우며 기괴하게 느껴졌던 예술 현상에 적용되었다. 거의 19세기 말경까지 지배적이었던 이러한 개념에서 고전주의 자체는 제외되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입장은 물론이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까지도 근본적으로는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 의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바로크를 무규칙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이유를 붙여 비난했고, 그것도 바로크 예술가인 니콜라 푸생을 모범으로 간주하는 미학의 이름으로 비난했다. 부르크하르트나 베네데토 크로체 같은 뒷날의 순수주의자들(잡다한 현대적 경향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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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17. 11:30
다른 어떤 국민보다 이탈리아 국민을 깊이 지배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정열이 진행되면서 더욱 격렬해지고 상황에 따라서는 범죄적인 수단까지 동원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과격한 허약함과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힘의 방종을 볼 수 있다. 때때로 그것은 거대한 규모로까지 발전되었다. 범죄는 독특하고 개인적인 밀도를 얻었다. 한계는 아주 드물었다. 불법적이고 폭력에 근거한 경찰국가의 통제에 대해서 누구나, 비천한 국민조차도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속박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법의 정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살인이 일어나면 더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보통 살인자 쪽에 동정심을 느꼈다. 처형이 있기 전에 그리고 처형이 처해지는 동안에 남자답고 자부심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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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개념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5. 09:01
하나의 미술 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이 전 유럽에 골고루 퍼져 있던 분열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바로크는 본질적으로 좀 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유럽 각 문화권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다. 매너리즘은 비록 그것이 중세의 기독교적 예술보다 훨씬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고딕과 같은 범유럽적 현상이었다. 이와 달리 바로크는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궁정적・카톨릭적 그룹의 바로크가 시민적・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와 판이하게 다르고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이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과 다른 내적・외적 세계를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