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 생활에서의 종교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20. 11:39
한 국민의 도덕성은, 신에 대한 의식의 문제, 곧 신이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믿음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믿음이 세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 아니면 비참함과 빠른 몰락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 상관없이 그렇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물론 장소와 사람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이 시대의 도시들은 결정적이고 신선한 행복감이 지배하고 있었다. 생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으 16세기에 외국의 지배가 확정되면서 비로소 분명하게 나타난다. 당시 이탈리아의 불신앙은 악명이 높았다. 그 증거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증언과 예제들을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의 과제는 분류하고 구별하는 것이다. 완결된 종합 평가를 내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와 교회
르네상스 이전 시대에 신에 대한 의식은 기독교와 그 대표 기관인 교회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교회가 타락하였을 때 인류는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확고하게 지켰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구는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국민 모두가 원칙과, 원칙의 표현 사이에 나타난 지속적인 모순을 견디어낼 만큼 충분히 침착하거나 감각이 무딜 수는 없다. 역사상 나타났던 가장 무거운 책임이, 당시 무너져 내리고 있던 교회에 주어졌다. 교회는 지배하기에 이롭게 스스로를 망가뜨린 빛바랜 교리를, 모든 폭력적인 수단까지도 함께 아울러 참된 진리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도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니고 극심한 타락에 빠져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교회는 국민들의 정신과 양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내면으로부터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수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무신앙과 절망 속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우리의 길을 가로막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난다. 어째서 정신적으로 그토록 강력했던 이탈리아는 교권에 대해 더욱 강력하게 반발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도이치 종교개혁에 앞서서 그와 같은 종교개혁을 성취하지 않았던 것인가?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의 기질은 교회 권력을 부정하는 일 이상을 하지 못했다. 반면에 도이치 종교개혁의 근원과 견고함은 긍정적인 교리의 덕을 입은 것이다. 특히 선한 행동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 덕분이었다.
이런 가르침이 도이칠란드에서부터 이탈리아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것은 물론 훨씬 뒷날 에스파냐의 세력이 광범위하게 커져서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청과 그 도구들 [종교재판]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억압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작용하였다. 그러나 13세기의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초기 종교 운동들에는 대단히 긍정적인 신앙 내용이 들어 있었다. 상황만 좋았더라면 그것은 성숙하였을 것이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대단히 긍정적인 위그노파 신앙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 같은 엄청난 사건들은, 그 필연성을 아무리 분명하게 전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인 상황, 그 발생과 진행 과정은 모두 역사 철학적인 추론을 벗어난다. 정신의 움직임, 그 갑작스러운 번쩍임, 그 퍼져나감과 멈춤 등은 우리 눈에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로 남는다. 적어도 우리가 이 과정에 작용한 힘들 중 이것 혹은 저것을 알 뿐, 절대로 모든 힘들을 다 알 수 없는 한에서는 언제까지나 그렇다.
성직 계급에 대한 비판
르네상스 전성기에 이탈리아 상류층과 중간층의 교회에 대한 느낌은 깊고도 경멸에 가득 찬 못마땅함, 교회의 관습이 온갖 방식으로 일상생활과 뒤섞인 것에 대한 묵인, 성사, 예배, 예식에 대한 종속감 등으로 요약된다. 이탈리아에 특별한 것으로는 성스러운 설교자들의 개인적인 영향력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단테 이후로 문학과 역사에 나타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반교회적인 불쾌감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미 이루어졌다. 일반 여론이 교황국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탐색을 해보았다. 권위 있는 원전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를 찾아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키아벨리의 <논의>에서, 그리고 삭제되지 않은 귀차르디니 판본에서 유명한 구절들을 읽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로마 교황청 바깥에서는 훌륭한 주교들과 일부 성직자들이 도덕적 존경을 받았다. 그에 반해서 단순히 봉록을 받는 사람들, 찬사 회원들, 수도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수상쩍었고, 전체 계층을 포괄하는 아주 수치스러운 뒷소문에 휘말려 있었다.
수도사들은 전체 성직자 계급의 희생양이라는 주장이 이미 전에도 나왔었다. 그들을 조롱하여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측면에서 맞지 않는다. 첫째, 단편소설과 희극은 지속적이고 알려진 유형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 장르에 고정된 유형으로 수도사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고정된 유형을 쓸 경우에 상상력은 암시하고자 하는 바를 덧붙이기가 아주 쉽기 때문이다. 둘째로 단편 소설은 세속의 성직 계층도 똑같이 조롱하였다. 셋째로 나머지 문헌의 수많은 묘사들은 교황과 로마 교황청에 대해서 얼마나 대담하게 말하고 판단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창조한 작품에서는 이런 종류의 비판을 기대할 수 없다. 넷째, 수도사들도 때로는 무서운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수도사들에 대해서 불쾌감이 가장 강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수도원 생활, 종교 단체 전부, 신앙 체계, 심지어는 종교 자체의 - 옳든 그르든 추론을 확대하기에 따라서 - 무가치를 입증하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탈리아는 두 개의 거대한 탁발수도회(도미니크화와 프란체스코회)가 생겨나는 과정에 대해서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더욱 분명한 기억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이들 수도회들은 13세기에 이단이라고 부르던 것, 즉 현대 이탈리아 정신의 초기의 강력한 활동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다는 점이다. 특히 도미니크회에 지속적으로 맡겨졌던 종교 경찰직[종교재판관]은 남모르는 미움과 조롱 이외의 감정이 생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수도사들
<데카메론>과 프랑코 사케티의 단편을 읽으면 수도승과 수녀들에 대한 뻔뻔스러운 말들이 지겹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정교개혁의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이런 어조는 한결 강해졌다. 아레티노는 여기서 제외하기로 하자. 그는 <논쟁>에서 자신의 천성에 자유를 주려는 방편으로 수도원 생활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 한 사람의 증인만 부르기로 한다면 바로 마수치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단편소설들 50개 중에서 앞쪽의 10개만 살펴보아도 그것들은 깊은 분노에 사로잡혀서, 이 분노를 퍼뜨릴 의도를 가지고 씌어진 것으로, 최고의 귀족들, 즉 나폴리의 페란테 왕과 알폰소 왕자에게 헌정된 것이다. 이야기들은 일부는 오래되었고, 일부는 이미 보카치오에 의해 알려진 것들이었다. 다른 것들은 무서울 정도로 나폴리의 현실을 담고 있었다. 거짓 기적을 일으켜서 국민을 현혹하고 착취하고 게다가 수치스러운 생활까지 일삼으니 여기서 생각에 잠긴 구경꾼은 진짜 절망하게 된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에 대해서 이런 말이 나온다. "그들은 속이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돈이 떨어지면 스스로 성자라고 내세우고 기적을 보여 준다. 그럴 때면 어떤 자는 성 빈첸조의 옷을 보여주고, 다른 자는 성 베르나르디노의 필적을 보여주고, 또 다른 자는 성 카피스트라노의 나귀 고삐를 보여준다..." 다른 자들은 "하수인을 고용한다. 그들은 눈이 멀거나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다가 사람들이 모인 한가운데서 수도승의 옷자락이나 아니면 가지고 다니는 성유물에 닿기만 해도 갑자기 낫는다. 그러면 모두들 '자비를 내리소서' 하고 외친다. 종을 울리고 방금 일어난 기적이 화려하게 보고된다" 또는 한 수도사가 연단에 서있으면 사람들 속에 있던 다른 자가 거짓말쟁이라고 외친다. 소리친 사람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이어서 설교하던 자가 그를 회개시키고 낫게 하는 일도 있었다. 모든 것이 완전히 코미디였다. 당사자와 그 하수인은 엄청난 돈을 모아 추기경에게서 주교구 하나를 살 수 있었고 평생 편안하게 먹고살게 되었다. 마수치오는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에게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민증은 그들의 미움과 당파 싸움에 말려 들어가서 공공 광장"에서 그것 때문에 싸우고 스스로 편을 가른다." 수녀들은 오로지 수사들의 것이었다. 그녀들이 속인들과 어울리면 감옥에 갇히고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수녀들은 수사들과 미사까지 올리면서 결혼식을 하고 마음껏 먹고 마신다...수도원 생활은 그런 일들과 또 다른 일들을 속에 감추고 있다. 물론 수도사들은 서로 고해를 해서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속인에게 라면 이교도처럼 모든 구원을 거절할 만한 일들에 대해서도 주기도문 한 번 외우라는 벌칙으로 끝이다. 그러니 땅이여, 입을 벌려 이런 범죄자들과 그들의 후원자들을 산채로 집어삼켜라." ...페란테 치하에서 왕에게 바친 책에 그렇게 쓸 수 있었다면, 이것은 어쩌면 왕이 자기를 노린 거짓 기적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타렌토 근처에 우선 파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낸 납관에는 에스파냐와 비슷하게 유대인을 박해하라고 왕에게 강요하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속임수를 꿰뚫어 보자 수도사들은 그에게 대들었다. 그러자 그는 전에 이미 그의 아버지 알폰소 왕도 한 번 그랬던 것처럼, 거짓 단식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하였다. 궁정은 적어도 어리석은 미신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을 진지하게 생각한 한 작가 - 마수치오-의 말을 들어보았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탁발 수도사들에 대한 조롱과 욕설은 엄청나게 많았고 문학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났다. 도이치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르네상스가 짧은 시간 안에 이 수도회들을 없애버렸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수도회의 인기 있는 설교자들과 성자들도 수도회를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면 레오 10세처럼 탁발 수도회를 경멸하는 교황과 적절한 시기에 약정만 맺었더라면 되었을 것이다. 시대정신이 이런 수도회들을 우스꽝스럽거나 역겨운 것으로 여겼다면 그들은 교회에 곤란한 존재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교황권 자체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도미니크 수도회의 종교재판관이 지속적으로 각 도시에 대해 가졌던 권한이 15세기 후반에는 너무 커져서 교양 계층을 괴롭히고 화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신앙심을 지속적으로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 이전 시대처럼 단순한 의견에 대해 벌을 준다는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체 성직 계급에 대해서 극히 가벼운 혀를 놀리던 사람도 본래의 이단에 대해서는 쉽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사보나롤라처럼 강력한 손길이 작용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북부도시들에서 비교적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고약한 마법이 형벌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15세기 말, 16세기 초에는 화형 판결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종교재판관들은 그저 형식적인 철회만으로 만족했던 듯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사형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낸 일도 있었다. 1452년 볼로냐에서 사제인 니콜로 다 베로나가 강신술사, 악마 쫓는 자, 성체 모독자 등의 죄목으로 성 도메니코 교회 앞에 세워진 나무 제단 위에서 성직을 박탈당하고, 장작단이 쌓인 광장으로 끌려가는 도중이었다. 그때 이단 보호자이며 수녀들을 욕보이는 사람으로 악명이 높은 요한 기사 수도 회원 아킬레 말베찌가 보낸 한 떼의 사람들이 그를 구해냈다. 교황사절인 베사리온 추기경이 그들 중 한 사람을 붙잡았으나 말베찌는 아무 일 없이 계속 잘 살았다.
더 높은 교단들, 즉 베네딕트 수도회와 지파들은 그 부유함과 쾌적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탁발수도회보다 훨씬 욕을 덜 먹었다. 이 수도회가 오래되었고, 경찰 의도 없이 설립되었으며 사생활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경건하고, 학식이 풍부하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피렌주올라는 그들의 평균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영양이 좋은 수도사들은 넉넉한 수도복을 입고서, 생애를 맨발로 돌아다니며 설교하는 일로 보내지는 않는다. 섬세한 코르도바 가죽으로 만든 실내화를 신고, 노송나무 판자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방 안에 앉아서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보낸다. 어쩌다 이 장소를 떠나야 할 일이 있으면 그들은 노새와 살찐 말 위에 앉아서 유람하듯이 길을 나선다. 그들은 많은 책을 읽느라고 정신을 지나치게 고단하게 만들지 않는다. 지식이 수도사의 단순함 대신 악마의 교만을 가져다주지 않도록 말이다"
그 시대의 문헌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세속적인 성직 계급과 수도사들에 대한 그런 평판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성스러운 것에 대한 믿음 자체를 흔들어놓았다는 사실이 아주 분명해진다. 거기서 얼마나 끔찍한 종합 판단을 듣게 되는가! 여기서는 일부만을 전했을 뿐이다. 그것이 최근에야 인쇄되었고 그래서 그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들 밑에서 오래 관리 노릇을 한 역사가 귀차르디니는 1529년 그의 격언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직자의 명예욕, 탐욕, 방탕함은 다른 누구보다 내 마음에 역겹게만 느껴진다. 이런 죄악 하나하나가 증오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중 하나 혹은 모두는 특별히 신에게 종속된 계층임을 스스로 고백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악덕들은 서로간에도 충돌하는 법이라 아주 특별한 개인만이 그것들을 모두 합쳐서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교황들 옆에서 보낸 나의 위치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의 위대성을 바라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나는 마르티누스 루터를 나 자신만큼이나 사랑했을 것이다. 흔히 말하고 이해하는 대로 기독교가 우리에게 부과한 법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무가치한 패거리가 자기들에게 합당한 한계 안에 머물러 악덕 없이 아니면 권한 없이 사는 것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귀차르디니는 초자연적인 모든 일에 관해서는 우리가 암흑속에 머물러 있고,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그것에 관해서 어리석은 소리만을 하고 있으며, 기적은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고 어떤 특별한 것도 입증한 것이 아니며 결국은 알려지지 않은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당시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들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산을 옮기는 신앙심을 신기한 현상이라고만 말했다. 신랄한 언급은 없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 역사 > 르네상스 rinascimen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보나롤라 (0) 2020.10.01 교회의 지위 (0) 2020.09.30 범죄 (0) 2020.09.17 사랑 (0) 2020.09.08 삶의 이상 (0) 2020.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