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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지위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30. 13:03

     

    성직 계급과 수도사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익숙해져 있으며, 자신들의 존재가 보통 사람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에서 오래되고 강력한 것들이 가지는 이점이었다. 보통사람은 누구나 친척 중에 성직자나 수도사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보호나 아니면 장차 교회 재산에서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한가운데에는 로마 교황국이 있고,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을 갑자기 부자로 만들어주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혀와 펜을 묶어둘 수 없었다는 점도 분명하였다. 가장 대담한 풍자 작가들은 대개가 자신이 수도사이거나 성직의 록을 먹는 자들이었다. <해학>을 쓴 포지오는 성직자였다. 프란체스코 베르니는 성당 참사 회원이었다. 테오필로 폴렝고는 베네틱트 수도사였고, 자신의 수도회를 웃음거리로 만든 마테오 반델로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그들은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아니면 이 계층의 전체적인 악명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려는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까? 라는 속셈을 담은 염세적인 이기심 때문이었을까? 아마 이 모든 요소들이 조금씩은 있었을 것이다. 테오필로 폴렝고의 경우에는 루터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에서 교황국을 논하는 기회에 이미 말했던 바와 같이 축복과 성사에 기대는 것은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어린 시절의 인상들과 전통이 된 상징이라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냈다. 사제로부터 죄의 사함을 얻으려고 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요구는 저 비텔로쪼 같은 사람에게도 남아 있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입증해주는 부분이다. 그의 경우보다 더 이것을 잘 가르쳐주는 예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제는 '지워버릴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사제의 개인적인 성품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사제의 이런 특성은 아주 광범위한 열매를 맺어서 사람들은 사제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경우에도 그의 종교적인 축복을 갈망하였다. 물론 미란돌라의 갈레오토 같은 반항자들도 있었다. 그는 16년 동안 파문당한 다음 1499년에 죽었다. 이 시기 동안 도시는 그로 인해서 성무 금지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미사도 교회의 장례식도 없었다. 

    참회 설교자들

    위대한 참회 설교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이 모든 이중성들과 나란히 놓고 보면 확실하게 다르다. 유럽의 나머지 전 지역은 때때로 성스러운 수도사들의 말에 감동받곤 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와 지방을 흔들어 놓던 감동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5세기 도이칠란트와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 유일한 인물은 아브루쪼 태생의 조반니 카피스트리노였다. 당시 북쪽에서 그처럼 깊이 있는 진지함과 종교적 소명을 한 몸에 지닌 사람들은 대체로 직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남쪽의 그들은 개방적이고 실용적이었으며 그들의 말에 대해 사람들은 높은 존경심을 보였다. 북유럽은 조용한 가운데 처음에는 수도원에서만 활동하지만 수백 년이 지나도록 영향을 남기는 '그리스도와 비슷한 사람'을 만들어냈다. 남유럽은 다른 사람들에게 순간의 엄청난 인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키워냈다. 이 인상은 본질적으로 양심을 일깨우는 데서 생겨났다. 그들의 설교는 아무런 추상 개념 없이 완전히 실제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성스럽고도 금욕적인 설교자의 인품에 의하여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되었다. 그의 인품은 때로는 흥분된 상상력에 의해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조반니 카피스트라노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데려오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십자가를 그어주고, 삼위일체와 자신의 스승인 성 베르나르디노의 이름으로 축복하기만 해도 그중 일부가 정말로 병이 나았다. 그것은 이런 경우 보통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브레쉬아의 연대기 작가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암시했다. " 그는 정말 기적을 행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Sano di Pietro, St Bernardino preaching in the Campo, 1445

     

     

    가장 강력한 논점은 지옥불과 지옥으로 위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악과 결탁한 개인에게 현세에서 작용하는 '저주'를 극히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면 살아서 그 결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만이 정열, 복수의 맹세, 범죄 등에 빠진 사람들을 화해하고 참회하도록 만들 수가 있었다. 화해와 참회가 결국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15세기에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 알베르토 다 사르짜나, 조반니 카피스트라노, 야코포 델라 마르카, 로베르토 다 레체와 그 밖의 사람들은 그렇게 설교를 하였다. 당시 탁발 수도회에 대한 선입견보다 더 강한 것은 없었으나 이들은 그것을 극복하였다. 오만한 인문주의는 그들에게 비판과 조롱을 퍼부었다. 예를 들어 포지오는 참회 설교자들은 모든 도시에서 똑같은 것만을 말하고, 사람들을 올 때보다 더 멍청하게 만들어서 돌아가게 만드니 참으로 편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참회 설교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아무도 인문주의의 비웃는 소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런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피렌체 사람들 같은 조롱꾼들은 14세기에 벌써 참회 설교자가 강단에 등장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서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사보나롤라가 나타났을 때 그는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좋아하는 교양과 예술을 자기가 점화시킨 불 속에 태워버리도록 만들었다. 위선적인 수도사들이 공모자들의 도움을 받아 청중에게 멋대로 감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멀리 퍼뜨리는 등의 못된 신성 모독을 한 것조차도 참회 설교자들에게 해를 입히지 못했다. 사람들은 지어낸 기적과 거짓 성유물을 보여주는 천박한 수도사들의 설교를 비웃으면서도 여전히 진짜 위대한 참회 설교자들을 존경하였다. 이들이야말로 15세기에 이탈리아의 진정한 전문 분야였다. 

    수도회는 - 보통은 프란체스코회. 그것도 이른바 감독부 - 요구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내보냈다. 주로 도시에서 불안과 부도덕이 무서울 정도로 증가하면서 공공 분야의 다툼과 개인 간의 다툼이 몹시 심해질 때면 그런 요구가 나타나곤 하였다. 그러나 한 설교자의 명성이 높아지면 모든 도시들이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그를 원하였다. 그는 수도회 장로들이 보내는 곳으로 갔다. 터키 사람들에 맞서 십자군을 일으키자는 설교는 이런 활동의 특별한 형태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참회 설교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기로 하자. 설교의 순서는 방법론으로 관찰을 해보면 단순히 치명적인 죄를 교회식으로 나열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급한 순간일수록 설교자는 직접적으로 목표 지점을 향하였다. 그는 아마도 수도회 소속 교회나 주교좌성당에서 설교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곧 도시의 가장 큰 광장은 사방에서 몰려든 인파를 수용할 수 없게 된다. 설교자는 오고 가는 것마저도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는 것이다. 보통 설교는 어머어마한 행렬로 끝을 맺었다. 도시의 일급 관리들이 설교자들을 둘러싸지만, 그에게 몰려들어 손과 발에 키스하도록 수도복 한 자락을 잘라가려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보호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가장 쉽게 먼저 나타나는 성과는 고리대금, 선매, 수치스러운 유행 등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난 다음, 감옥 문을 여는 일, 말하자면 가난한 채무자를 풀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사치품과 위험한, 혹은 무해한 소일거리 장난감들을 불태우는 일이었다. 주사위, 카드, 온갖 종류의 놀이 기구들, 가면, 악기, 마법 주문 공식 적은 것, 가발 등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무대 위에 모양을 내서 쌓아 올리는 데, 맨 위에 악마의 모습을 고정시켜 놓은 다음 불을 붙였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성과는 고집 센 사람들 차례이다. 오랫동안 고해를 하지 않던 사람들이 고해를 하러 온다. 부당하게 압류한 재산이 다시 돌아가고, 장치 살인 사건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나쁜 말들이 거두어진다.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 같은 설교자들은 매우 부지런하고 정확하게 사람들의 일상적인 교제와 도덕법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오늘날 우리 신학자들 중에서는 베르나르디노가 당시 피렌체 대성당에서 한 것처럼 '계약, 배상, 공공 채무, 딸의 배당에 관해' 아침 설교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조심성이 부족한 설교자들은 어떤 계층, 직업, 관리들을 너무 심하게 공격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였다. 그렇게 되면 청중은 흥분해서 곧장 이들에게 대들어 화풀이를 했다. 베르나르디노가 로마에서 행한 설교 하나도 카피톨 언덕에서 화장품과 마법 용품들을 불태우는 것 말고 또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어서 마녀 피니첼라도 불태워졌다. 악마의 수단들을 써서 많은 아이들을 살해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다. 로마시 전체가 구경하려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런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싸움의 중재이며 복수의 포기였다. 그것은 보통 설교 과정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타났다. 일반적인 참회의 물결이 점차 도시 전체를 사로잡고, 사람들 전체가 외치는 "자비를 내리소서" 하는 외침으로 공기가 진동할 무렵이 되어서야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적대하던 당파 간에 살인 사건이 있었을 경우라도 화려한 화해와 포옹이 이루어졌다. 이미 추방된 사람들도 이런 성스러운 일을 위해 일부러 도시에 돌아오도록 했다. 그런 화해는 고양된 분위기가 사라지고 나서도 보통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면 수도사에 대한 기억은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남게 된다. 그러나 사납고 무서운 위기들도 있었다. 1482년 로마에서 발레 가문과 크로체 가문 간의 싸움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위대한 로베르토 다 레체가 소리를 높였지만 헛일이었다. 

    폭력적이고 스스로 비틀린 사람들은 자주 참회 설교의 영향을 받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곤 했다. 그들 중에는 산적들과 범죄자들도 있었고, 물론 밥벌이를 잃은 병사들도 있었다. 그러면 경탄이 일어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다못해 외적인 생활 태도라도 경건한 수도사를 닮으려고 애쓰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설교는 순수한 축복의 말이었다. 그것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하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설교자를 따라 이웃 도시로 가서 그곳에서 설교의 전 과정을 한 번 더 듣곤 하였다. 

    이 성스러운 사람들의 엄청난 힘을 보면 성직 계급과 정부로서는 적어도 그들을 적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 수단은 수도회나 해당 단체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정도의 낮은 직급을 수도사나 성직자들을 고집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한계를 둘 수는 없었다. 교회와 강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온갖 종류의 행사들, 재판, 포고, 강의 등을 위해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인문주의자와 속인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사도 성직자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세상을 등진 불확실한 계층이 당시 이탈리아에 존재했는데, 수많은 은둔자들이었다. 그런 사람들도 예고 없이 등장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갔다. 

    이탈리아의 운명이 결정되던 수십 년간 사방에서 예언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특정 계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수도사들 자신도 대로는 영주, 관청, 성직 계급, 수도사들을 전혀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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