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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죄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17. 11:30

    다른 어떤 국민보다 이탈리아 국민을 깊이 지배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정열이 진행되면서 더욱 격렬해지고 상황에 따라서는 범죄적인 수단까지 동원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과격한 허약함과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힘의 방종을 볼 수 있다. 때때로 그것은 거대한 규모로까지 발전되었다. 범죄는 독특하고 개인적인 밀도를 얻었다.

    한계는 아주 드물었다. 불법적이고 폭력에 근거한 경찰국가의 통제에 대해서 누구나, 비천한 국민조차도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속박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법의 정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살인이 일어나면 더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보통 살인자 쪽에 동정심을 느꼈다. 처형이 있기 전에 그리고 처형이 처해지는 동안에 남자답고 자부심 있는 행동을 하면 완전한 경탄을 얻게 되어, 이야기꾼은 아주 쉽게 이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이런 벌을 받는지 말하는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정치적 소요의 시기에, 내심 법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나 수많은 복수행위들에 대해서 형벌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때로는 국가와 시민 생활이 해체되려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나폴리는 아라곤 왕조에서 프랑스 왕조로, 다시 에스파냐 왕조로 이행될 때에 그런 순간을 겪었고, 밀라노도 스포르짜 가문을 여러 번이나 쫓아냈다가 그들이 다시 돌아올 때면 그런 순간을 겪었다. 그럴 때면 속으로는 국가와 사회를 한 번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살인강도식 이기심에만 따르는 사람들이 사회의 전면에 나타나곤 하였다. 비교적 작은 범위에서 나온 이런 종류의 이야기 하나를 예로 들어 보자.

    갈레아쪼 마리아 스포르짜가 죽은 이후 1480년경에 내부의 위기로 인해서 밀라노 공국이 완전히 흔들리게 되었을 때 지방 도시들에서는 치안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파르마에서도 밀라노 총독은 살해 위협에 겁을 먹고 끔찍한 범죄자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자 가택 침입, 건물 파괴, 공공연한 살인 행위 등이 일상사가 되었고, 처음에는 복면한 범죄자들이 개별적으로 돌아다니더니 나중에는 매일 밤 아무 거리낌 없이 무장한 떼거리를 이루어서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뻔뻔스러운 농담, 풍자, 협박 편지 등이 나돌고, 당국을 비웃는 조롱의 소네트가 나타났다. 이것은 물론 이 끔찍한 상황 자체보다도 당국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수많은 교회에서 성체가 든 성감까지 도둑맞았다는 것은 이 범죄의 특별한 색깔과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부와 경찰이 활동을 중지하고도 여전히 존재함으로써, 다른 임의의 통치 체제가 형성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세계 어느 나라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복수라는 요소가 강하게 끼어들면서 특수한 성격을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일반적으로, 보통 때에도 다른 나라들보다 큰 범죄가 더 많았던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우리가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도 특별한 경우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 실제로 범죄에 영향을 준 상상력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꾸며내기도 했다는 점 등의 사정이 우리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범죄 행위의 총량은 다른 곳과 같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1500년경 강하고 부유한 도이칠란트에 그 많은 대담한 떠돌이들, 폭력을 쓰는 거지들, 강도짓을 하는 기사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곳이 전체적으로 보아 이탈리아보다 더 안전했을지, 삶이 본질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었을지 장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탈리아의 범죄는 미리 모의되고,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고, 제삼자의 손으로, 조직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거대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Marcantonio Raimondi,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 ca. 1512–13

     

     

    강도 떼(비적)

    우선 강도질을 보면 당시 이탈리아는, 특히 토스카나 같은 행운의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북부 유럽 나라들보다 강도들의 기습을 더 많이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적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정열에 의해서 사나워지고, 점차 강도 떼의 두목이 되는 성직자란 다른 곳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이런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가 전해지고 있다. 1495년 8월 12일에 페라라의 성 줄리아노 교회 종탑 옆의 쇠창살이 둘러쳐진 우리 안에는 피가롤로 출신의 신부인 돈 니콜로 데 펠레가티가 갇혀 있었다. 그는 전에 두 번이나 사제로서 미사를 집전한 적도 있었다. 첫 미사를 보던 날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이어서 로마에서 사면을 받았다. 뒤에 그는 사람을 넷이나 죽이고, 두 여자와 결혼을 해서, 그 여자들과 함께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그는 수많은 살인 사건의 현장에 있었고, 여자들을 강간하거나 납치하고, 대규모로 노략질을 하였다. 사람들을 더 많이 죽였고, 페라라에서는 제복을 입고 무장한 강도단을 거느리고 돌아다니면서 온갖 폭력으로 음식과 거처를 얻어냈다. 이런 것이 얼마나 더 많은 세부 사항들을 포함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규모의 범죄였다. 당시에 감시는 적고 특권은 많았던 사제와 수도사들 중에는 살인자와 못된 범죄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펠레가티 같은 사람은 없었다. 찬양할 일은 아니라도 타락한 인간들이 법을 피해 수도승의 의복 속으로 숨어들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마수치오가 나폴리의 수도원에서 알게 되었던 해적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유명한 강도 떼 두목들의 시대는 훨씬 더 뒷날, 17세기가 되어서야 시작된다. 정치적 대립들, 곧 교황당과 황제당, 에스파냐 사람들과 프랑스 사람들이 나라를 더 이상 흔들어놓지 못하게 된 다음이었다. 강도 떼가 당파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문화가 스며들지 못한, 외진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지역 사람 전체가 자기들 지역으로 들어온 외부인을 모두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있었다. 나폴리 왕국의 변방지역들, 어쩌면 로마의 '대농장' 시대 이후로 아주 오래된 야만성이 자리 잡고서, 아무런 죄가 없더라도 이방인과 적을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지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 사람들은 비종교적이지는 않았다. 한 목동이 겁에 질려서 고해실로 찾아와서는 금식기간 동안에 치즈를 만들면서 우유 몇 방울을 입 안에 흘려 넣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물정을 잘 아는 고해 신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그가 동료들과 함께 자주 여행자들에게서 물건을 약탈하고 죽이곤 했다는 것, 다만 이런 일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라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도 농부들이 얼마나 자주 강도 떼로 변할 수 있었는지는 앞에서 이미 암시하였다. 

    청부살인

    강도질보다 더 고약한 당시 도덕의 표지는 돈을 주고 제삼자를 고용해서 행해지는 범죄가 아주 빈번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는 나폴리가 단연 다른 도시들을 앞섰다. "여기서는 사람 목숨보다 더 값싼 것은 없다" 고 폰타노는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도 이런 종류의 끔찍한 악행들을 보여준다. 이런 범죄는 그 동기에 따라서 분류하기는 어렵다. 정치적 목적, 당파 간의 미움, 개인적 적대감, 복수, 두려움 등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발전한 국민인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가장 적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명예가 되는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곳에는 정당한 불만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정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더 높은 문화가 사람들에게 운명의 바퀴 속으로 범죄가 끼어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바꾸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살인죄가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인지,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이른바 유용한 범죄에서 진짜 지속적인 이익을 얻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를 사람들이 이해하는 곳이 있었다면 바로 피렌체가 그런 곳이었다. 피렌체 공화국이 붕괴되고 난 다음 암살, 특히 청부 살인이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코시모 1세 정부가 경찰의 힘으로 암살을 제압할 때까지 말이다. 

    그 밖의 이탈리아 지역에서 청부 범죄는 각각 지불 능력이 있는 고용주가 존재하는 데 따라 많거나 적거나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의 통계를 내겠다는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법원이 간주한 사망사건만 해도 그중 일부만이 정말 살인사건이긴 했지만, 어쨌든 엄청난 숫자였다. 영주와 정부들은 물론 가장 고약한 모범을 보였다. 그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살인을 자기들의 전권을 유지하는 수단의 하나로 여겼다. 그런 일을 위해서는 체사레 보르자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스포르짜도 아라곤도, 나중에는 카를 5세의 신하들도 목적에 적합하게 여겨지는 일들을 감행하였다. 

    독살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상력은 점차 이런 종류의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서 권력자들이 자연사했다는 것을 잊지 않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독약의 효능에 대해서도 어이없는 환상을 가졌다. 저 끔찍한 하얀 가루가 보르자 부자를 위해서 특별한 날짜에 작용하도록 계산되었을 수도 있다고 우리까지도 믿게 만든다. 그렇듯이 살레르노의 영주가 아라곤의 추기경에게 준 독약이 진짜로 정해진 날짜에 작용하는 독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것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며칠 이내에 죽게 될 거요. 당신 아버지 페란테 왕이 우리 모두를 짓밟으려 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카테리나 리아리오가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보낸 독 묻은 편지는 교황이 이 편지를 읽었다 하더라도 그를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폰소 대왕이 코시모 메디치가 보내준리비우스의 책을 읽지 말라는 의사들의 경고를 받고서, 그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대답했다면 그는 올바르게 말한 것이다. 피치니노의 비서가 교황 피우스 2세의 운반용 의자에 발라두려고 했던 독은 아마도 약간 자극을 주는 정도였을 것이다. 광물의 독과 식물의 독이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나 쓰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화가 로쏘 피오렌티노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 사용한 액체는 분명히 강렬한 산이었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남몰래 무기, 특히 단도를 사용하는 일은 밀라노와 나폴리, 그 외 다른 지역의 권력자들에게 끊임없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했던 무장 병사들 사이에서 단순히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여기저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주인이 자신의 수행원들 중 한두 명에게 암시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많은 잔학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John Collier, A glass of wine with Caesar Borgia

     

     

    극단적인 범죄

    범죄의 비밀 수단들 중에는 - 적어도 의도로 판단하자면 - 마법도 들어간다. 물론 매우 부수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기는 했지만, 요술, 혹은 마법 등의 말이 나오는 경우는 대개 어차피 미움을 받던 사람을 향해, 생각해낼 수 있는 두려움을 덧붙히기 위해서였다. 14세기와 15세기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궁정에서 범죄적이고 치명적인 마법은 이탈리아의 상류층에서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하였다. 

    개인주의가 모든 점에서 절정에 이른 이 나라에서 마침내 극단적인 포악함을 지닌 몇몇 개인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범죄 자체를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로서, 그들에게 범죄는 그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온갖 심리적 규범을 벗어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맨 먼저 몇몇 용병대장들이 이런 끔찍한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몬토네의 브라치오, 티베르토 브란돌리노, 그리고 우르슬링겐의 베르너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은으로 만든 베르너의 흉갑에는 '신, 동정심, 자비심의 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들이 전체적으로 보아서 가장 일찍 등장한, 완전히 규범을 벗어난 범죄자들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고약한 범죄가 -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생각에 의하면 - 종교적인 금지에 맞선 것이었으며, 그들의 개성 전체가 저 창백하고 무시무시한 빛에 비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훨씬 더 조심스럽게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브라치오의 경우 교회에 대한 미움이 아주 심했다. 예를 들면 그는 찬송가를 부르는 수도사들을 보자 몹시 화가 나서 그들을 종탑 아래로 떨어뜨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다만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서만 충실하고 위대한 장수였다" 용병대장들의 범죄는 대개 어떤 이익을 위해서, 비도덕적인 자신들의 위치에 자극을 받아 저질러졌다. 얼핏 보기에 경박스러운 잔인성도 보통은 그 나름의 목적을 가졌으며, 하다못해 일반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아라곤 사람들의 잔인성은 복수욕과 두려움에 주요 원인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살인욕, 파괴에 대한 악마적인 쾌감 등은 에스파냐 사람인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잔인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혹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목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리미니의 전제 군주인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에게서 악에 대한 쾌감을 볼 수 있다. 그가 살인 강간 간통 근친상간 성물 도둑질 위증 배신 등의 범죄를,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 저질렀다고 선언한 것은 로마 교황청뿐만이 아니고 역사의 판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추악한 것은 자기 아들 로베르토에 대한 강간 시도였다. 아들은 칼을 뽑아 들고 그것을 물리쳤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한 방종만은 아니고 점성술 아니면 마법의 미신이었던 것 같다.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아들인 파르마의 피에를루이지 파르네제가 파노의 주교를 강간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똑같은 이유가 제시되었다. 

    개인주의와 범죄

    최고 계층의 삶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당시 이탈리아인의 주요한 성격적 특성들을 요약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 성격의 중요한 결함은 동시에 그 위대성의 조건이기도 했으니, 곧 발전된 개인주의였다. 개인은 우선 대부분 전제적이고 불법적인 국가에서 내적으로 벗어났다. 이제 그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옳든 그르든 반역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사방에서 승리하고 있는 이기주의를 보면서 그는 자기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였다. 자신의 내적인 평화를 산출한다고 믿으면서 그는 자신이 행한 복수를 통해서 어두운 폭력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의 사랑은 다른 개인주의를 향하였으니, 곧 자기 이웃의 아내였다. 모든 객관적인 사실, 모든 종류의 한계와 법칙에 맞서서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감정을 내세웠다. 명예심과 이익, 영리한 판단과 정열, 체념과 복수욕 등이 그의 내면에서 타협하는 데 따라 모든 개별적인 경우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렸다.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나 이기주의가 모든 악의 뿌리이며 근원이라면, 그 이유만으로도 당시 이탈리아 사람은 다른 나라의 국민들보다 악에 더 가까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주의적인 발전은 그 자신의 잘못으로 그에게 온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만 온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이탈리아 문화의 힘을 입어서 유럽의 다른 모든 국민에게도 찾아왔으며, 그 이후로는 그들이 그 안에서 활동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발전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현대의 선과 악이 만들어졌으며, 중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도덕적인 책임감이 발전되어 나왔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은 이 새로운 시대의 강력한 첫 파도를 견뎌야 했다. 자신의 재능과 정열로써, 그는 이 시대의 모든 눈높이와 깊이에 대해서 가장 뚜렷한 대표자가 되었다. 극심한 방탕과 나란히 개성의 가장 고귀한 조화가 발전되었으며, 개인의 삶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예술이 발전하였다. 그것은 고대도 중세도 이를 마음이 없었거나 이룰 수 없었던 예술이었다. 

     

     

    출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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