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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8. 08:58

     

    결혼생활과 사랑

    그러나 상상력이 지배자의 모습을 하고 도덕성에 영향을 미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허락되지 않은 남녀 간의 교제에 대해서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세 시대는 통상적인 매춘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매독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 온갖 종류의 매춘에 대한 비교 통계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서 특징으로 보이는 것은 결혼과 그 권리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어쨌든 더욱 의식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조심스럽게 제외되어있던 높은 신분의 처녀들에 대해서는 관찰이 되지 않는다 모든 정열은 결혼한 여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결혼이 명백하게 감소하지 않았다는 것, 가족 생활이 광범위하게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주 멋대로 살려고 하였지만 가족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자기 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할 경우에도 그랬다. 또한 그런 이유에서 종족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 16세기 중반에 나타나는, 얼핏 보기에 정신적인 쇠퇴는 정치적, 종교적인 종류가 아주 특별한 외적 요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르네상스에 가능한 성취들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온갖 방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건강하고 인구가 많은 종족에 속하였다. 그리고 물론 풍속이 개선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이점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랑의 도덕성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진술들이 이상하게 엇갈리는 것을 알게 된다. 단편소설 작가들과 희극 시인들은 사랑이 오로지 쾌락일 뿐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극과 희극의 모든 수단이 허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대담하고 뻔뻔스러울수록 더욱 재미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더 나은 시인들과 대화 작가들을 읽어보면 그들 내면에서 이 정열은 가장 고귀한 깊이와 정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사랑의 최후 최고의 표현을, 신적인 본질 안에 남녀의 영혼이 원래 하나였다는 고대의 이상에서 찾고 있다. 이런 두 가지 생각은 당시에 모두 진짜였고, 동일한 사람 안에 들어 있을 수 있었다.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 내면에도 이런 감정들이 여러 단계에서 발언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식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예술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은 찬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엄연한 사실이다. 고대인이 그랬듯이 현대인도 이런 점에서 소우주인 것이다. 중세인은 소우주가 아니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Unknown Artist - Renaissance Lovers

     

     

    간통

    우선 단편소설에 나타나 있는 도덕성을 주목해보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경우, 결혼한 여인이 등장하고 있으며 주로 간통이 다루어졌다.  앞에서 언급된,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관점은 여기서 극히 중요하다. 교양이 높고 개인주의적으로 발전된 여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북유럽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자유를 지녔다. 간통은 밖으로 그 결과가 드러나지만 않으면 북쪽에서처럼 그녀의 삶을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아내의 정절에 대한 남편의 권리는, 북유럽에서 구혼 및 약혼 시절에 주고받은 시와 정열을 통해서 획득한 것 같은 확고한 기반을 갖지 않았다. 장래의 남편과 알게 된 직후에 젊은 아내는 부모의 집에서 아니면 수도원의 감금생활에서 풀려나 곧바로 세상으로 들어선다. 이제서야 그녀의 개체성이 아주 빠른 속도로 형성된다. 주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내의 정절에 대한 남편의 권리는 대단히 제한된 것이었다. 이 권한을 '법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외적인 행실 하고만 연관 지었지 마음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한 노인의 아름답고 젊은 아내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겠노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젊은 아내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겠노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젊은 애인의 선물과 심부름꾼을 돌려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젊은이의 사랑이 대단히 훌륭한 것을 기쁘게 여기고 고귀한 여인은 명예를 잃고도 훌륭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과 행동을 구별하는 태도에서 완전한 헌신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게다가 남편이 불성실하다면 다른 사랑에 자신을 바친 일은 거의 정당한 것이 된다.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여자는 남편의 불성실을 고통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비웃음과 경멸, 기만으로 여기고, 많은 경우 지극히 냉정한 의식을 가지고서 남편의 행동에 대해서 복수를 한다. 이 상황에서 적절한 형량을 결정하는 것은 그녀의 분별력에 맡겨진다. 예를 들면 가장 깊은 상처라도 그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을 경우 화해와 장래의 평화로운 삶을 향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게 되었거나 아니면 시대의 분위기에 맞도록 그런 일을 지어낸 단편소설 작가들은 복수가 아주 적절하게 행해져서, 그것이 하나의 예술품일 경우 완전한 경탄을 표현했다. 남편이 속으로는 아내의 보복의 권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오직 두려움에서 아니면 신중함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신중함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남편이 아내의 불성실을 예측하거나 아니면 제삼자를 통해 그런 소식을 듣게 될까 걱정할 경우에는 사태는 비극으로 진행되었다. 드물지 않게 가장 잔인한 보복이나 살인이 행해졌다. 남편 말고 오빠들과 아버지도 간통한 여자에게 복수할 권한 혹은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은 이런 행동을 일으키는 진짜 공기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질투심은 이런 행동과 아무 상관도 없고, 도덕적 감정 역시 별 관계가 없었으며, 다만 제삼자의 조롱을 피하겠다는 소원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던 것이다. 반델로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남편을 독살하는 여자를 볼 수가 있다. 그러면 과부가 되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여자는 금지된 교제가 들통날까 두려워 애인을 시켜 남편을 죽인다. 그러면 아버지, 오빠, 남편들이 눈앞에서 치욕을 없애기 위해서 독, 칼, 그리고 다른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그런데도 많은 여자들은 아직도 자신의 생명과 명예를 함부로 여기고 정열을 좆아 살고 있다." 다른 기회에 그는 좀 더 온건해진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매일같이 이 남자는 아내의 간통을 눈치챘기 때문에 그녀를 죽였다. 저 사람은 딸이 몰래 결혼했기 때문에 그녀를 목졸라 죽였다. 또 다른 사람은 누이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말 좀 안 듣고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가련한 여자들에게는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잔인한 일이다. 그녀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 우리는 곧장 밧줄, 단도, 독을 집어 든다. 자신과 집안 전체의 명예를 한 여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면 남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그런 일의 종말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어서 작가들은 종종 위협을 받고 있는 애인이 아직 살아서 돌아다니는데도 죽은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사인 안토니오 볼로냐는 아라곤 집안 여자로 과부가 된 아말피의 여공작과 남몰래 결혼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오빠들은 그녀와 자식들을 붙잡아서 어느 성에서 다 죽여버렸다. 안토니오는 그들이 죽은 것을 모른 채 그들을 만날 희망을 품고서 밀라노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고용된 살인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토니오 볼로냐는 이폴리타 스포르짜의 집 모임에서 자신의 불행한 이야기를 류트 반주에 맞추어 노래했다. 이 집안의 친구인 델리오는 " 이 이야기를 스키피오네 아텔라노에게 들려주고 나서 안토니오가 곧 살해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것을 자신의 단편소설에서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실제로 델리오와 아텔라노 눈앞에서 벌어진 살해사건은 반델로에 의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단편소설 작가들은 한동안 계속해서 간통에 수반되는 온갖 재치, 간교함, 우스꽝스러움 등을 편들었다. 그들은 집안에서의 숨바꼭질, 의미심장한 손짓과 심부름꾼, 애인이 몸을 숨기면 몰래 들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쿠션이나 과자 등을 미리 채워놓은 궤짝들 등을 즐거운 마음으로 묘사하였다. 기만당하는 남편은 상황에 따라 집에서부터 원래 웃기는 인물이나 아니면 무시무시한 복수자로 그려졌다. 여자가 악의적이고 잔인하고, 남편이나 애인이 죄 없는 희생자로 묘사되는 경우가 아니고는 다른 유형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제 삶에서 뽑아낸 경고의 예들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6세기가 지나는 동안 이탈리아의 생활이 에스파냐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수법이 지독하게 잔인한 질투가 차츰 늘어났다. 그러나 이런 질투는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정신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었던, 불성실에 대한 보복과는 구별을 해야한다. 에스파냐의 문화적 영향이 감소함에 따라 절정에 도달했던 질투심은 17세기 말에는 정반대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즉 아내의 애인을 집안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보고, 그 밖에도 한두 명의 일시적인 애인들까지도 내버려 두는 무관심의 경지로 바뀐 것이다. 

    방금 묘사한 상황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부도덕의 총량을 다른 나라들에 있었던 그것과 비교하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예를 들면 15세기 프랑스에서 결혼은 정말 이탈리아에서보다 더 성스러운 것이었을까? 우화시와 소극들을 보면 강한 의심이 생겨난다. 아마도 불성실은 똑같이 빈번한 일이었겠지만 다만 개체성이 그 정도로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적 종말이 드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게르만 계열 민족들에게 유리한 하나의 증거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바로 여자들과 처녀들에게 더 큰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인데, 그것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머물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아주 유쾌하게 여겨졌던 일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지나친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에서도 불성실은 똑같이 빈번한 일이었고, 개인주의적으로 발전된 인간은 비극에 이를 때까지 보복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북방의 영주들이 최초의 의심만으로 아내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해보라.

     

    Malvolio and the Countess

     

    정신적 사랑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단순히 천박한 쾌락이나 보통 사람들의 둔감한 욕망만이 금지된 영역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고귀한 사람들의 정열도 역시 이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 사회의 바깥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완전한 남자는 결혼을 통해서 이미 성숙해진 여성에게 가장 강하게 이끌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서정시의 최고 음조를 만들어내고, 논문과 대화에서도 몸을 여위게 만드는 정열의 가장 빛나는 모습, 곧 '신적인 사랑'을 서술하려 시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날개 달린 신 에로스의 잔인함을 탄식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애인의 냉혹함이나 소심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의 부당함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랑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런 불행을 넘어서려고 했다. 그것은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으로, 피에트로 벰보가 이런 사랑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였다. <이솔라니> 제3권에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는 카스틸리오네가 <궁정인> 제4권 끝부분에서 피에트로 벰보의 말이라고 제시하는 화려한 연설에서 들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스토아적인 생애를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벌써 유명하면서도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유명하고도 선하다는 두 가지의 술어를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을 진실이라고 느꼈다. 그러니 우리도 그것을 단순한 미사여구라고만 여길 수는 없다. 힘들여서 <궁정인>을 읽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일부 발췌한 문장들만으로는 이 사랑의 개념을 거의 전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몇 사람의 고귀한 여인들이 살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런 종류의 관계를 통해서 유명해진 사람들이었다. 줄리아 곤자가, 베로니카 다 코레지오, 그리고 특히 비토리아 콜론나 등이었다. 가장 심한 탕아들과 위대한 조롱꾼들의 나라는 이런 종류의 사랑과 이런 여인들을 존경하였다. 그들을 위해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어떤 허영심이 있었는지, 비토리아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들에게서 나온, 희망 없는 사랑의 섬세한 표현들이 자기 주변에서 울리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는지 누가 그것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이것이 유행이 될 때마다 어쨌든 비토리아는 여기서 제외되지 않았고, 뒷날까지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다른 나라들이 이와 비슷한 현상을 갖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한참 더 걸렸다. 

     

     

    Vittoria colonna / Michelangelo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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