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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 시대 신앙과 숭배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6. 08:11

     

    이제 성직자와 수도사 계층을 빼고 옛날 신앙[이교신앙]의 강도를 측정하려고 한다면 어떤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조명에서 보는가에 따라 그것은 아주 미약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하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성사와 축복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말했다. 이제 일상생활에서의 신앙과 숭배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대중과 그들의 습관, 그리고 이 둘에 대한 권력자들의 배려 등이 상당히 중요하게 부각된다. 

    참회와 선한 일을 통해 복을 얻는 것, 이 두가지와 연관된 모든 것이 북부 유럽에서와 똑같은 발전과 타락의 양상을 보이며 농부들과 하층 계급 사이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교양 계층도 때로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고 영향을 받았다. 고대 이교도들이 신들을 불러내고 신들에게 선물을 하고 비위를 맞추는 방식에서 유래한, 민간 카톨릭 신앙의 측면들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인용된, 바티스타 만토바노의 여덟 개의 목가는 성모 마리아를 향한 농부들의 기도를 포함한다. 이 안에서 성모는 농경 생활의 상세한 이모저모를 위한 수호 여신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저런 구난의 여신으로서의 성모의 다양한 모습들, 사람들은 대체 어떤 개념들을 만들어낸 것인가! 저 피렌체 여인, 집을 비운 남편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애인인 수도사가 포도주 한 통을 천천히 다 마셔버렸기 때문에 수태고지 성모에게 봉헌물로 밀랍 한 통을 바칠 때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 각각의 성자들은 특별한 생활영역을 위한 수호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제의 관습 상당수가 이교도의 예배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자주 탐구되었다. 그리고 교회 의식과 결합된, 지역적이고 민간적인 관습 다수가 유럽의 다양한 이교 문화의 잔재라는 사실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이교 신앙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관습들도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성 베드로 축제 이전 4일 간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을 밖에 내놓는 것이 그렇다. 그것은 2월 18일에 열리는 고대 페랄리아 시절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것들이 당시에 아직 널리 남아 있다가 그 이후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민간 신앙은 이교 신앙일 경우 아주 특별히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다고 말하면 역설 같지만 진실이다. 

    이런 종류의 신앙이 상류층에도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던가 하는 것은 상당히 정밀하게 입증된다. 이미 성직 계급에 대한 관계에서 언급되었듯이 이것 또한 습관의 힘과 어린 시절의 인상이라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교회 축제의 화려함에 대한 사랑도 한 몫을 했다. 그리고 조롱꾼들과 회의론자들도 저항하기 어려운 저 거대한 참회 열풍까지 가세하였다. 

     

    성유물 숭배 

    Gentile Bellini, Miracle of the Cross at the Bridge of San Lorenzo, 1500

     

    그러나 이런 종류의 문제에서 섣불리 일반적인 결론을 향해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를 들면 성자들의 유품에 대한 교양 계층의 태도를 가지고 우리는 최소한 그들의 종교 의식에 대한 하나의 열쇠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도의 차이들이 입증되지만 기대하는 만큼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다. 우선 15세기의 베네치아 정부는 성자들의 유골에 대해서 당시 유럽 전 지역에 나타나 있던 것과 같은 의견을 가졌다. 베네치아에 살던 외국인들도 이런 편집증에 동조하였다. 학식이 높은 대학 도시 파도바에 대해서 그곳의 지지 학자인 미켈레 사보나롤라의 글을 보고 판단해도 된다면 이곳도 베네치아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미켈레는 경건한 두려움이 뒤섞인 격앙된 감정을 가지고 위험한 시기에 밤이면 도시 전체를 통해서 성자들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 그리고 성 키아라 교회에 있던 한 성녀의 시체에서 손톱과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것, 그리고 이 시체는 재앙이 눈 앞에 닥치면 소리를 내고 팔을 쳐든다는 것 등을 들려준다. 산토에 있는 안토니우스 교회를 서술하면서 저자는 완전히 자신을 잊고 말을 더듬으며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적어도 밀라노의 일반 민중은 성유물에 대해서 대단한 열광을 보였다. 한 번은(1517) 성 심플리치아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중앙 제단을 개축하면서 성자들의 시체 6구를 부주의하게 노출시켰다. 그러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사람들은 이 일을 성유물 모독 탓으로 돌려서 길거리에서 만난 수도사들을 두들겨 팼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심지어는 교황들마저도 그 어떤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들에 대해서 훨씬 더 의심스럽게 여겼다. 우선 그리스에서 성 마우라 교회로 옮겨진 사도 안드레아의 머리를 피우스 2세가 화려한 의식과 함께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했을 때 (1462) 얼마나 큰 소동이 있었는지는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보고에 따르면, 많은 영주들이 성자의 유해를 차지하려고 다투던 시절 그는 이 일을 일종의 수치심을 가진 채 행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로마를 각 교회에서 쫓겨난 성자들의 유물을 위한 대피소로 만들자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식스투스 4세 치하에서 도시 주민들은 이 일에 대해서 교황보다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시 행정부는 식스투스가 죽어가는 루이 11세에게 교황궁의 유물 일부를 넘겨주기로 약속했을 때(1483) 심하게 불만을 터뜨렸다. 이 무렵 볼로냐에서는 에스파냐 왕에게 성 도미니쿠스의 유해를 팔아서 그 수익금을 공적으로 유익한 일에 쓰자는 대담한 주장도 나왔다. 

     

     

    Lorenzo ghiberti, ark of san zanobi, 1432-35 ca

     

    유해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적은 사람들은 피렌체 사람들이었다. 도시의 수호 성자인 짜노비를 기리기 위해 새로운 관을 만들기로 한 결정과, 실제로 기베르티에게 그것을 주문한 것 사이에는 19년이라는 시간(1409-1428)이 놓여 있다. 그것마저도 기베르티가 마침 그와 비슷한 작은 일을 아주 훌륭하게 끝낸 것을 계기로 우연히 주문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간교한 나폴리의 수녀원장이 대성당의 수호성인 성 레파라타의 팔을 나무와 석회로 만든 모조품으로 속인(1352) 이후로 사람들은 성유물에 싫증이 난 것도 같다. 아니면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주로 사체의 일부나 이미 곰팡이가 핀 옷과 기구들로 이루어진 성유물에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라도 생각해도 될까? 아니면 명성에 대한 현대적인 감각이 12 사도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더욱 화려한 무덤에 차라리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유해를 모시려고 한 것일까? 어쩌면 이탈리아에서는 베네치아와 아주 예외적인 로마를 빼면 성유물 숭배는 성모 숭배에 밀려서 유럽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많이 쇠퇴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형식 감각이 일찍부터 두드러졌다는 것도 비록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이 점에서 알 수 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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