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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모 숭배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7. 08:20

     

    어마어마한 교회들이 거의 모두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졌고, 라틴어나 각자의 언어로 된 시문학의 일부가 성모 마리아를 찬양했던 북유럽에서 성모 숭배가 더 강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에서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들어서 기적을 행하는 마리아상들의 수가 비할 바 없이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도시들은 모두 일련의 마리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아니면 아주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성 루카의 그림들'부터 동시대 사람들의 작업에 이르기까지 성모 마리아의 그림들에게서 사람들은 드물지 않게 그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예술 작품은 여기서 바티스타 만토바노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무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갑자기 마법의 힘을 얻게 된다. 특히 여자들이 느끼는, 기적에 대한 민간의 욕구가 그런 식으로 만족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성유물들이 주목을 덜 받았다. 단편소설 작가들이 가짜 성유물을 비웃은 일이 진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나 작용을 했는지는 여기 그대로 남겨두자. 

    성모 숭배에 대한 교양 계층의 관계는 성유물에 대한 그것보다는 약간 더 분명하다. 우선 문학에서는 단테가 그의 천국편으로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성모 찬양 작가로 남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편 민간에서는 마돈나 찬가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만들어지곤 한다. 어쩌면 산나자로, 사벨리코, 그 밖에 다른 라틴어 작가들의 이름도 여기 넣고 싶어 질지 모른다. 다만 그들의 의도가 본질적으로 문학적인 것이라서 이 작품들은 성모 숭배를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15세기와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시들, 직접적인 종교심을 드러내는 시들은 개신교도들에 의해서도 똑같이 씌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Leonardo Da Vinci, The Head of the Virgin, 1508– 12

     

     

    로렌조 일 마니피코의 찬가들, 비토리아 콜론나, 미켈란젤로, 가스파라 스탐파의 소네트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신앙심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을 빼면 대개는 죄의 느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원 의식, 더 높은 세계를 향한 그리움 등이 주로 나타나고, 성모의 중재에 대해서는 아주 드물게만 언급될 뿐이다.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의 고전주의 문학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반종교개혁과 더불어 이탈리아에서는 성모 숭배가 다시 문학 작품에 나타난다. 물론 그동안에 미술은 마돈나 찬양을 위해서 최고의 일들을 했다. 성자숭배는 교양 계층에서도 드물지 않게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색채를 띤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카톨릭의 여러 측면들을 이런 방식으로 검토하면서 교양 계층이 민중 신앙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를 어느 정도까지는 확실하게 탐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둘 사이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조를 찾기는 어렵다. 반면에 예를 들어 교회를 건축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건축하고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계속되던 16세기 초기에 이런 교회들이 예배를 게을리하는 것을 몹시 탄식하는 말이 나온다. "여기저기서 사원들이 무너져 내리고 제단들이 더럽힘을 당하고, 예배는 점점 신성함을 잃어버린다." 루터가 로마에서 사제들이 미사를 올리면서 경건하지 못한 언행을 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낸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교회 축제들은 북부유럽에서는 짐작도 못하는 화려함과 취향으로 진행되었다. 상상력의 민족은 특별한 의미에서 특이한 일에 정신이 팔려서 평범한 것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회의 열풍

    여기서 잠깐 거론하려고 하는 참회의 열풍도 상상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참회설교자들의 영향과는 구별된다. 이런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규모 재앙 혹은 그런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중세에는 때때로 유럽 전지역에 이런 종류의 폭풍이 지나가곤 하였다. 그러면 대중은 십자군 전쟁이나 고행의 여행 같은 대이동에 들어가곤 하였다. 이탈리아는 이 두 가지에 모두 동참하였다. 최초의 아주 강력한 고행 행렬은 에쩰리노와 그 집안이 몰락한 직후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다. 그것도 뒷날 참회 설교자들의 주요 거점이 된 페루자 지방에서였다. 그리고 나서는 1310년과 1334년의 고행 행렬이 뒤를 잇고, 이어서 코리오가 들려주는 1399년의, 고행이 없는 대규모 참회 행렬이 나타난다. 흥분한 대중들로 이루어진 이 끔찍한 유랑 행렬을 가능하면 통제하고 해롭지 않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도 저 거대한 기념행사들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로레토처럼 그사이 새로 유명하게 된 이탈리아의 순례 지역들이 이런 흥분의 일부를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끔찍한 순간들에는 여기저기서 아주 뒷날까지도 중세식 참회의 열기가 깨어나곤 했다. 불길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고행을 하고 울부짖는 소리로 자비를 구해서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보려고 했다. 수많은 예들 중에서 두 가지만 거론하자면 1457년 볼로냐에서 페스트가 돌 때도 그랬고, 1496년 시에나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1529년 밀라노에서 전쟁, 굶주림, 페스트라는 3중의 불행이 에스파냐의 착취와 함께 어우러졌을 때 가장 무서운 절망이 나라를 뒤덮었다. 우연히도 에스파냐 출신인 수도사 토마소 니에토의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가리지 않고 맨발로 참회의 행진을 할 때에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체를 모시도록 하였다. 즉 아마포 옷을 입은 네 병의 사제들이 장식된 들것을 어깨에 메고 그 위에 성체를 묶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벽을 돌 때의 계약의 궤를 흉내 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난에 시달리던 밀라노 사람들은 신에게 옛날 사람들과의 결속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행렬이 다시 대성당으로 들어왔을 때 "자비를 내리소서" 하는 고통의 외침에 마치 거대한 성당 건물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은 아마 하늘이 그 어떤 구원의 기적으로 자연과 역사의 법칙 속에 개입하게 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에는 그런 시기에, 전체 분위기의 선두에 서서 참회의 마음을 직접 국가의 경찰력으로 정리한 정부가 하나 있었다. 곧 페라라의 공작 에르콜레 1세의 정부였다.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힘을 얻고 예언들과 참회가 광범위하게, 심지어는 아펜니노 산맥 너머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였을 때에 페라라에서는 자발적인 금식 운동이 일어났다(1496년 초). 어떤 나사로회 수도사가 설교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끔찍한 전쟁과 굶주림의 고통이 임박하였음을 알렸던 것이다. 그는 지금 금식을 하는 자는 이 불행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성모 마리아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러자 궁정은 금식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궁정은 손수 이 헌시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4월 3일 부활절에 도덕 및 종교에 관한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를 모독하는 행위, 금지된 게임들, 수간 및 동성애, 축첩, 창녀와 포주에게 집을 빌려주는 행위, 빵집과 채소상을 제외하고 축제일에 상점 문을 여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포고문이었다. 유대인과 에스파냐에서 도망쳐온 무어 사람들은 다시 노란색 '오 O' 자를 가슴에 꿰매 붙이고 다니라는 명령도 있었다. 금지령을 어기는 자들은 그때까지 법에 정해져 있는 형벌말고도 '공작이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더 큰 벌'을 받게 되리라고 했다. 곧 이어서 공작과 궁정 전체가 여러 날 동안이나 연이어 설교를 들으러 참석하였다. 심지어 4월 10일에는 페라라의 모든 유대인도 거기 참석해야만 했다. 5월 3일에 경찰대장은 - 앞에서 등장했던 그레고리오 짬판테 - 전령을 내보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소리쳐 알리도록 했다. 범법자로 고발되지 않으려고 병사들에게 돈을 준 사람은 신고를 하라. 보상금과 함께 돈을 돌려줄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병사들이 밀고하겠다는 협박을 통해서 죄 없는 사람들로부터 2두카토에서 3 두 카토 씩을 갈취했다가 자기들끼리 서로 배신하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짬판테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기 위해서 돈을 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포고령을 듣고 나타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로도비코 일 모로가 쓰러진 다음 1500년에 비슷한 분위기가 다시 나타났을 때 에르콜레는 자발적으로 새로운 행렬들을 명령하였다. 여기에는 예수의 깃발을 들고 흰 옷을 입은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 자신은 걷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말을 타고 행진에 동참하였다. 이어서 1496년의 포고문과 아주 비슷한 내용의 포고문이 다시 나왔다. 이 정부가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지은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들 알폰소를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결혼시키기 직전에 살아 있는 성녀인 수오르 콜롬바를 불러들였다. 특별 사절단이 15명의 다른 수녀들과 더불어 비테르보의 성녀를 마중하러 왔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에는 공작 자신이 손수 나서서 그녀를 준비된 수도원으로 안내하였다. 이 모든 일에 강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면, 우리는 그를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일까? 앞에서 이미 입증된 것처럼 에스테 가문의 통치 이념에는 종교를 이용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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