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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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후반기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27. 12:52
1506년, 프랑스 왕이 파견한 통치자 샤를 당부아즈가 피렌체 의회로부터 허락을 얻어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초청했으나, 한정되었던 체류기간은 양국 간의 정치적 긴장 때문에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그로 인해 대작 〈앙기아리 전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샤를 당부아즈의 관대한 후원을 받으며 지낸 두 번째 밀라노 체류는 6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시기 다 빈치에게 부과된 임무는 주로 건축에 대한 조언이었고, 그 때문인지 미술작품이 많지 않다. 그는 〈암굴의 성모〉 두 번째 버전과,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기마상〉 구상 소묘 등을 그렸으며, 피렌체에서 가져온 〈성모자와 성 안나〉와 〈레다〉 작업을 계속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해부학과 식물학, 광학, 공학, 지질학, 물리학 등을 더욱 심도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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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피렌체 2기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24. 11:37
1499년,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밀라노에 입성하고 루도비코 일 모로가 몰락하자 다 빈치는 밀라노를 떠나 잠시 만토바에 머물면서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해 3월에는 베네치아 의회로부터 터키의 침공에 대한 자문을 의뢰받고 위협을 받는 지역에 물이 범람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1500년,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해에 그는 산프란체스코 알몬테 교회의 기반과 골조의 손상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건축 전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산타 아눈치아타 수도원에서 세르비테 수도회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성모자와 성 안나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 이듬해(1502) 여름 그가 피렌체를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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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밀라노 시기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22. 13:33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게 되어 피렌체를 떠났는데, 30세의 예술가가 그리다 만 와 팔라쪼 시뇨리아의 산 베르나르 교회 제단화 의뢰를 버려둔 채 밀라노로 떠나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경험 지향적 사고 방식에는 당시 피렌체 상류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신 플라톤주의보다는 밀라노의 엄격한 학문적 분위기가 맞았을 수도 있고, 동성애자라는 익명의 고발 때문에 여러 가지 기회에서 제외되었던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고, 루도비코 스포르자 백작의 화려한 궁정과 그를 기다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을 밀라노에서 보냈다. 왕실 명부에 pictor et ingeniarius ducalis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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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제생활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19. 08:38
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제 이 인물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토스카나 지방 빈치 Vinci 마을의 레오나르도,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어떤 항목에서도 평균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의 명성은 '역사라는 필터를 통해 충분히 검증되고 걸러진' 것이며 1, 심지어는 키도 훤칠하고 용모도 빼어났고, 목소리조차 좋았다고 한다.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Vinci)' 마을에서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인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던 레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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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 Theismus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1. 18. 09: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깊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강력한 종교심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것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만 유신론 혹은 이신론 Deismus이다. 감정을 위해 다른 대체물을 구하거나 찾아내지 않고서 기독교를 벗어버린 사고방식이 이신론을 주도하였다. 유신론은 신적 존재를 향한 더욱 높은 긍정적 신앙심이다. 중세는 이런 신앙심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기독교를 배제하지 않으며 언제라도 죄, 구원, 불멸성 등 기독교의 가르침과 결합될 수 있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 없이도 사람들 마음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경건성은 때때로 유치한 단순성을 가지고, 절반은 이교적인 울림을 가지고 등장한다. 신은 여기서 모든 소원을 이루어지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알베르티는 결혼식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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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율리우스 II세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15. 18:46
교황 율리우스 2세(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는 제216대 교황(재위: 1503년 - 1513년)으로, 본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1443~1513)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교황 식스투스 4세(재위기간: 1471년 - 1484년)는 자신의 출신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의 부흥과 번영을 위해 초기부터 친족들을 중용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조카 6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는데, 덕분에 추기경이 된 줄리아노는 교황인 삼촌을 배경으로 교회 안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1480년 30대의 줄리아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4년간 프랑에 체류하였다. 식스투스 4세의 선종 이후에도 후임 교황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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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불멸에 대한 의문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1. 11. 11:52
높은 발전을 이룬 사람들 사이에서 불신앙이 이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이것은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말과 그림으로 재생한다는 지상의 위대한 과제가, 고도의 정신력과 영혼의 모든 힘을 요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런 르네상스의 필연적인 세속성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나아가 이런 탐구와 예술을 통해서 다시 똑같은 필연성을 가지고 일반적인 회의와 의문의 정신이 생겨 나왔다. 그런 정신이 문학에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예를 들어 성서 이야기에 대한 비판이 극히 개별적인 시작들만 보였다고 해서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만 그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모든 분야에서 묘사하고 그릴 필요성에 밀려서, 다시 말해 긍정적인 예술 충동에 밀려서 잘 들리지 않은 것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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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신앙심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1. 10. 09:15
기독교에 등을 돌림 불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앞에서 말한 미신과 고대의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이 문제는 현대 정신의 발전과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당시 미움을 받던 교회에서 내적으로 아무런 덕도 입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불멸에 대한 모든 의심의 원천이었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에피쿠로스파라고 부르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죽음의 순간에 다시 마음이 돌아와 종부 성사를 받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특히 가장 활동적인 시기에 내적으로 교회의 덕을 입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품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런 마음이 전체적인 불신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하고, 나아가 역사적으로는 모든 방식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