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황 율리우스 II세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15. 18:46
교황 율리우스 2세(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는 제216대 교황(재위: 1503년 - 1513년)으로, 본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1443~1513)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교황 식스투스 4세(재위기간: 1471년 - 1484년)는 자신의 출신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의 부흥과 번영을 위해 초기부터 친족들을 중용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조카 6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는데, 덕분에 추기경이 된 줄리아노는 교황인 삼촌을 배경으로 교회 안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1480년 30대의 줄리아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4년간 프랑에 체류하였다. 식스투스 4세의 선종 이후에도 후임 교황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줄리아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추기경단 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한 후 후임 교황 자리를 놓고 줄리아노와 또 다른 유력자인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다투었는데, 최종적으로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선출되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이다. 줄리아노는 알렉산더 6세(재위 1492~1503)가 콘클라베 당시 뇌물로 추기경들의 표를 사들였다고 주장하면서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하여 교황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대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1494년 줄리아노 추기경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프랑스 파리로 피신하였다.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노린 프랑스의 샤를 8세가 1494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자 줄리아노는 그를 수행하여 로마에 입성, 부정한 교황의 폐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분개한 알렉산더 6세가 샤를 8세의 총신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면서 또다시 줄리아노 추기경의 계획이 무산되었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선종하고,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에서 줄리아노는 시에나의 피콜로미니 추기경을 지지하여, 그를 교황 피우스 3세를 즉위시켰으나 재위한 지 26일 만에 선종하였다.
피우스 3세의 선종 이후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뇌물과 계약 등의 방법을 총동원하여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들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얻어 교황직에 당선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줄리아노 추기경은 재위 초기부터 교황청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 관계나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일소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4세기 전의 교황 율리우스 1세의 이름을 계승하여 율리우스 2세가 된 그는 교황 선출 당일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보르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거룩한 교회를 더럽혔으며, 악마의 도움을 받아 교황권을 탈취하였다.” 실제로 교황궁 내에 있는 보르자 아파트는 19세기까지 봉인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교황의 영향력으로 당시 로마에서 세력이 강했던 두 귀족 가문인 오르시니 가문과 콜론나 가문을 화해시켰으며, 귀족 가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교황령에 복속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503년 말에 리미니, 파엔차 외 몇 개의 로마냐 지방 도시들이 보르자 가문에게 빼앗겼던 영지를 되찾아 준 대가로 베네치아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교황은 베네치아가 점거한 도시들이 본래는 교황령이었음을 내세워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베네치아는 거절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한 도시와 요새들을 탈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교황은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섰다. 이런 행위는 외세의 힘을 빌려 이탈리아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영향력은 크지 않아 로마냐 지방에서 베네치아군이 물러가게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직접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끌고 페루자와 볼로냐를 점령하였다.
기독교 세계의 수도로서의 로마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율리우스 2세는 스스로 라틴-기독교 제국을 이끌어가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위엄을 마치 황제와 같이 드높여 만인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과 동명이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모범으로 삼았던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야만인들을 몰아내자는 기치 아래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1508년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였다. 캉브레 동맹 전쟁 또는 신성 동맹 전쟁 기간 동안 이 동맹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510년 베네치아와 프랑스는 서로 적대 관계였다가 1513년에는 동맹을 맺는 등 전쟁 기간 동안 동맹은 수시로 바뀌었으나, 어쨌든 캉브레 동맹의 효과로 율리우스 2세는 당초 계획했던 목표인 로마냐 지방 반환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프랑스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당초 교황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야심을 보이자 율리오 2세는 프랑스 국왕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정을 맺어서라도 프랑스에 적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10년 초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손하게 율리우스 2세에게 용서를 구해 사죄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교황으로부터 성무 정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루이 12세는 1510년 시노드 소집을 요청하여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순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막시밀리안 1세의 협조를 얻어 율리우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고 1511년 11월 피렌체가 통치하고 있는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교황은 분노하여 피사 공의회 개최를 수용한 피렌체에 성무 정지를 선언하고 페르난도 2세,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1511년 신성 동맹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신성 동맹에 가담하였다.
1512년 8월, 교황군은 신성 동맹군과 합세하여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후 동맹국들이 만토바에 모여 향후 이탈리아에서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피렌체 응징을 결의하였다. 결의에 따라 조반니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이 이끄는 교황 군과 스페인군이 피렌체 공화국의 영지인 프라토(Prato)를 정벌하였다. 프라토 함락소식을 접한 피렌체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이 현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거칠어지던 중 교황 군 지휘관인 조반니 추기경으로부터 항복을 종용하는 서신이 도착하자 피렌체의 수상은 사임을 하고 망명을 떠났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은 1,500명의 교황 군을 이끌고 피렌체에 무혈입성하였다. 이로써 18년 만에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즉위 직후부터 개혁에 대한 반발로 인한 위험이 감지되자 율리우스 2세는 바티칸에서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 믿을만한 용병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근위대창설을 계획하고 스위스 연방에 스위스 출신 용병을 로마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1506년 1월 22일, 처음으로 150명의 스위스 출신 병사들이 로마에 입성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교황청 근위대 창설 날짜는 공식적으로 1월 22일로 지정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의 정치적 안정과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통일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삼촌인 식스토 4세의 유해와 더불어 훼손되었다. 오늘날 율리오 2세와 식스토 4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있는 교황 클레멘스 10세 기념비 앞에 있는 바닥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전사 교황’이라고 불리울 정도의 활발한 전쟁 활동 때문에 정치가의 인상을 주지만, 예술과 문학에 대한 후원 활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재임 시기는 전성기 르네상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로마 시를 아름답게 꾸며 그 가치를 높이는 일에 앞장섰고, 1506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신축을 지시하여 그 머릿돌을 놓았다. 특히 그는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절친한 사이였고 그들의 후원자였다. 교황의 후원으로 그들은 바티칸의 여러 가지 굵직한 예술 작업에 참여하였다. 특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비롯하여 미켈란젤로가 만든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는 율리오 2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오 2세의 동상을 만들 때 있었던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교황은 1506년 볼로냐 정복 성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신의 동상 제작을 미켈란젤로에 의뢰하였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율리오 2세는 성경 대신 칼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였다. 교황 자신은 학자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전사 교황다운 이야기다. 이 동상의 크기는 4.2미터였으며 볼로냐 산 페트로니아 성당 정문 위에 있었다. 그러나 1511년 5월에 발생한 시민 반란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율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의 개인적인 도덕률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는 교황제를 구제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저씨였던 식스투스 이후의 교황들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사태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교황의 명성의 참된 근거와 조건들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에 따라 통치를 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힘과 정열을 그 일에 바쳤다. 의심스러운 협상들과 성물 매매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일반적으로 갈채를 받으면서 베드로의 의자에 올랐다. 이제는 적어도 최고 직위들을 놓고 벌어지는 거래만은 중단되었다. 1
1.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내용 참조> 위키백과 / 위키피디어 이탈리아
'이.탈.리.아 역사 > 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밀라노 시기 (0) 2020.11.2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제생활 (0) 2020.11.19 벤베누토 첼리니 (0) 2020.11.03 브루넬레스키 Brunelleschi (0) 2020.03.13 마사치오 Masaccio (0) 2020.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