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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베누토 첼리니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3. 08:10

     

     

    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는 미켈란젤로 다음가는 르네상스의 가장 훌륭한 조각가이다.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이 교향 피렌체에서 치러질 때, 장례위원 중 첼리니는 조각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선출될 만큼 자타가 인정하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오늘날 첼리니의 명성은 금세공이나 메달 제작자나 조각가로서보다는 그가 불행했던 말년에 쓴 자서전 때문에 드높다.

    첼리니의 자서전은 모든 것을, 자신의 명예에 치명적인 사실들까지 속임없이 솔직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심지어 그의 적과 경쟁자를 살인한 사실과 여인들과의 민망한 이야기들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첼리니의 자서전을 처음 독일어로 번역한 괴테는 여인들과의 정사장면을 아예 그의 번역본에서 빼버렸다. 물론 괴테는 당시 유럽의 도덕관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첼리니의 미술과 여행담, 그의 대담한 성격에 더 끌렸던 것 같다.

    괴테는 첼리니야말로 이태리 르네상스 정신의 실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칼을 차고 다니면서 자기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자기밖에 의존할 것이 없던 르네상스 시대를 설명하면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태리인의 성격이 첼리니에게서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는가, 피해를 입은 자는 적의 피를 흘려 자신을 치유할 때까지는 육체적인 병 만큼이나 자신을 괴롭히는 열병에 사로잡힌다. "

    오늘날에는 무모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첼리니의 성격이나 대담한 행동은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한다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첼리니의 전기를 쓴 영국의 미술사학자 존 포프 헤니세시는 그의 저서 첼리니에서 첼리니의 살인 주머니(3명)는 당시의 험난한 사회상에 비쳐 볼 때 비교적 적은 수라고 주장한다. 첼리니 자서전의 진정한 가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납득이 안 되는 살인사건이나 그가 저지른 성적 이야기들보다는 그의 작품들의 미술사적인 가치와 제작과정의 체험에 있다. 

     

     

     

     

    첼리니의 찬란한 미술 업적과 그의 험난한 인생을 되돌아볼 때 당시의 예술가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알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은 교황과 왕과 군주들 그리고 그들의 여인들이 행사했던 무한한 권력에 한 예술가의 생사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첼리니는 피렌체에서 150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금세공을 배웠다. 지금도 피렌체인들은 첼리니를 그들의 자랑스러운 금세공의 원조로 모시고 있다. 피렌체의 오래된 다리 양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은방들이 들어선 폰테 베키오에는 첼리니를 기념하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18세나 19세에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처음 간 후에 그는 한 곳에서 4,5년 이상 머물지 않았다. 항상 좋은 직장을 찾아 로마로, 페라라로, 만투아로, 베네치아로 프랑스이 파리와 퐁텐블로로, 교황 크레멘테7세와 파울로 3세,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와 수없는 추기경들과 군주들을 찾아 57세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타향살이를 해야했다.  타향살이는 그의 출세하려는 야심과 동시에 전염병과 전쟁을 피하려는 방편이었으나 그는 가끔 자신이 효성을 다하던 아버지와 사랑하던 누이와 조카딸이 생각나서, 그리고 병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렌체로 돌아가곤 했다. 

    첼리니는 일생동안 많은 위기를 겪었다. 샤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강점했을 때(1527) 그는 교황 클레멘테 7세가 피난해 있던 산 안젤로 성곽에서 임시 차용당한 대포의 사격수로 생명을 걸고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교황 클레멘테는 첼리니를 불러 그 성곽에서 교회의 삼중관의 보석들을 떼어내어 감추고 금들을 녹이게 할만큼 그를 신뢰했다. 1534년에 발생한 그의 경쟁자인 폼페이오 데 카프티네이의 살인사건과 로마 강점시대에 교황 클레멘테의 보물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538년 체포되었다. 그가 무죄를 주장한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당시의 취조 문서가 발견되어 증명되었다. 당시의 사건들이 그의 자서전과 취조서에 너무도 생생하고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첼리니는 아이러니칼하게 이 사건과 모략 때문에 자기가 교황청을 방어한 비로 그 산 안젤로 성곽의 동굴에 교황 파올로 3세에 의해 감금되었다. 그는 그 높은 성곽에서 다리를 부수면서까지 대담하게 탈출했다. 그러나 다시 체포되어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석방되었다. 그가 더럽고 햇빛도 들지 않는 동굴 감옥에서 겪었던 고통 속에서 신앙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신에 대한 간절한 절규와 기도의 이야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애절하다. 

    1540년 석방된 첼리니는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의 안전과 명성을 추구하여 이탈리아를 빠져 나갔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받았던 것과 같은 높은 보수와 성을 거처로 받고 파리와 퐁텐블로에서 작품을 만들어 명성을 얻는다. 그는 왕이 자주 찾아와 작품들을 보려고 할 정도로 높은 신망을 얻는 조각가가 되었다. 

     

     

    Benvenuto Cellini “Saliera”,  Gold 

     

     

    그 당시에 프랑스와 1세를 위해 만든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소금 그릇'은 오늘날 빈의 미술사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금세공의 최상의 작품인 소금 그릇의 제작동기와 디자인의 상징적인 의미, 그리고 완성하는 과정 등이 자세하게 자서전에 기술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그의 프랑스 체류는 왕의 애첩의 질투와 갈등으로 생명의 위험까지 초래했다. 1545년 그는 퐁텐블루의 작업을 미완성한 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온다. 피렌체에서 그는 <페르세우스와 메두사>의 거인상을 완성한다. 이 작품을 위해 그는 직접 용광로를 건설하였다. 

     

     

    Perseus of Benvenuto Cellini

     

     

    첼리니가 고향 피렌체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로마에서 일하던 미켈란젤로를 고향으로 데려오려던 그의 노력에서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집까지 찾아갔던 그는 미켈란젤로 뿐만 아니라 그가 데리고 있던 하인의 저항을 체험했다. 죽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미켈란젤로의 장례식에 첼리니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회화계를 대표하는 바사리와 조각계를 대표하는 첼리니가 장례식의 절차와 장소로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첼리니는 조각가로서의 미켈란젤로를 추념하기를 원했으나 바사리가 자신의 주장대로 관철했기 때문이었다. 

    첼리니의 말년은 불행했다. 1557년, 5년전에 저지른 남색에 대한 고소로 그는 금 50스쿠디의 벌금과 4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군주 코시모 1세의 개입으로 실형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어떤 작품이나 외부 활동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에서 그는 승려가 되려고 1558년 종단에 수도사 서약을 했다. 그러나 1560년 이 서약을 파기한다. 

    이 기간에 그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직접 썼으나 시간 낭비가 심해 이웃에 있는 학생을 시켜서 자기의 회고록을 받아쓰게 했다. 이 자서전은 4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려 완성되었으며, 1567년, 원고를 축소하여 자비로 피렌체에서 출판했다. 말년의 어려운 처지의 첼리니에게 코시모 1세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산타 크로체 성등 근처에 집과 정원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는 첼리니에게 일감도 주지 않고, 피렌체를 떠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1571년 사망한 첼리니는 피렌체의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교회에서 아카데미아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 곳에 매장된다. 그의 작품과 인생을 추념하는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군중과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서로 입장하려고 밀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느 미술가도 그와 같이 자신의 찬란한 작품과 험난한 인생살이에서 겪은 잘 잘못을 숨기지 않고 전한 예가 없다. 그런 그의 자서전을 통해우리는 그가 산 16세기 전후반기의 르네상스를 체험하는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받게 된다. 

     

     

     

    내용 출처> 첼리니의 자서전 서문 / 최승규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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