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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렌토 종교회의와 예술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4. 23:19

     

     

    트렌토 종교회의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최대 수련장이 되었다. 이 회의는 교회제도와 신앙의 기본 원칙을 현대 생활의 여러 조건과 요구에 적응시키는데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조치들을 냉철하고도 실무적인 태도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의 정신적 지도자들은 정통적인 신앙과 이단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고자 하였다. 카톨릭교회로부터의 이탈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이러한 폐해가 계속적으로 확대되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주어진 상황에서는 대립관계를 얼버무리기보다 그것을 강조하는 편이 더 현명하고, 신도들에 대한 요구조건을 완화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가중시키는 편이 더 바람직한 일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견해의 승리는 통일된 서양 기독교 세계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러나 18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종교회의가 종결되자 곧 강력한 현실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또 하나의 정책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이 정책 전환은 종교회의 기간 중의 특히 예술 문제에서의 엄격주의를 근본적으로 완화시켰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통적인 신앙의 해석에 관한 오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당면과제는 전투적인 카톨리시즘의 음침함을 밝게 만들고, 감각을 통해서도 신앙의 전파에 힘쓰며, 예배의식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교회를 만인을 위한 화려하고 매혹적인 정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과제는 바로크에 와서야 만족할 정도로 해결되었지만 - 매너리즘에서는 아직도 트렌토 종교회의의 엄격한 규정들이 지배적이었다 - 그러나 금욕주의적인 엄격성으로 나아가는 경우든 감각에의 영합으로 나아가는 경우든 의식적이고 냉철한 현실주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렌토 종교회의의 소집과 더불어 교회의 자유주의는 예술과의 관계에서도 끝나고 만다. 교회관련 예술 제작은 신학자들의 감독하에 놓였고, 화가들은 특히 규모가 큰 미술품 제작의 경우 담당 성직자의 지시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 예술 문제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권위자이던 지오반니 파올로 로마쪼 는 종교적 대상을 그릴 경우 화가는 신학자의 조언을 받을 것을 요망하고 있다. 타데오 주카리는 카프라롤라에서 심지어 색채 선택에 관한 문제에서도 교회의 지시에 따랐고, 바사리도 파올리나 예배당의 임을 맡은 동안 도미니코 수도사로서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빈첸조 보르기니가 내린 지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매너리즘의 벽화 시리즈나 제단화들에 담긴 사상적 내용은 대부분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화가와 신학자의 공동작업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없는 경우에도 그러한 공동작업을 전제해야 할 정도이다. 중세의 신학이 트렌토 종교회의에서 본래의 권리를 회복했을뿐더러 그 영향력을 심화시켜서 중세에는 스콜라 철학에 전적으로 위임되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문제점들이 이제는 권위주의적으로 해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적 수단의 선택 문제도 대개의 경우 그러한 문제가 예술가의 자유재량에 맡겨졌던 중세보다도 여러 면에서 더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특히 교회에 이단적인 학설로부터 영향을 받은 미술품을 두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예술가들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공식화된 형식이나 교리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을 지켜야만 했다. 안드레아 질리오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수염 없는 예수와 신화적인 카론의 배, 또 그의 의견에 의하면 마치 투우장에서 구경하고 있는 듯한 성직자들의 몸가짐, 그리고 묵시록에 나오는 천사들의 배열이 성서와는 반대로 그림의 네 모퉁이에 나뉘어 있지 않고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 등등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The Last Judgment 1536–1541 / Detail : A boat rowed by an aggressive  Charon

     

    베로네제는 [레위가의 만찬]에서 성서에 열거된 인물 이외에 난쟁이, 개, 앵무새를 데리고 있는 바보 등과 같은 임의로 선택한 모티프를 묘사에 첨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 소환당했다. 

     

    The Feast in the House of Levi  (1573) / Paolo Veronese

     

    종교회의의 규정은 신성한 교회 안에 나체 그림이나 자극적이고 상스러우며 불결한 그림을 두는 것을 금지하였다. 트렌토 종교회의 이후에 나온 종교 예술에 관한 모든 저작, 특히 질리오의 [화가의 오류에 관한 대화]나 라파엘레 보르기니의 [묵상]은 교회 예술에서의 나체 그림에 대해 일체 반대하고 있다. 질리오는 설령 성경의 내용에 따라 어떤 인물을 반드시 나체로 그려야 하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요포를 두르도록 권장하고 있다. 카를로 보로메오는 자신이 판단해서 상스럽다고 느껴지는 그림을 그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신성한 장소에서 제거하도록 했다. 조각가 암마나티도 성공적인 생애의 만년에 가서는 그가 젊은 시절에 그린, 그 자체로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나체 그림을 배척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관용적 정신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보기로서는 아무래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가 하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1559년 바오로 4세는 다니엘레 다 볼테라에게 이 벽화에서 특히 자극적으로 보이는 나상을 덮어 씌우게 하였다. 게다가 1566년 피우스 5세는 이 벽화에서 그의 비위에 거슬리는 몇몇 부분을 제거시켰다. 드디어 클레멘스 8세는 이 벽화 전체를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으나 이와 같은 그의 의도는 산 루카 아카데미아의 탄원서로 간신히 만류되었다. 그러나 교황들의 이러한 태도보다 더욱 우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바사리까지도 그의 [훌륭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 제2판에서 최후의 심판 중의 나체상은 이 그림이 놓인 장소에 비추어 적합한 것이 못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트렌토 종교회의의 기간을 두고 '요조숙녀인 척하는 얌전빼기의 탄생기'라고 규정한 학자가 있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귀족주의적인 또는 초현세적인 경향을 지닌 문화는 나체의 묘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고대 초기의 귀족주의 사회와 중세의 기독교 사회는 성적인 문제에 관해 '얌전을 빼지' 않았다. 그들은 나체 묘사를 기피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인간의 육체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화과 잎'으로 국부를 가림으로써 성적인 것을 숨기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강조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로틱한 감정의 애매성은 마니에리즘과 더불어 비로소 대두하였고, 이러한 애매성은 가장 솔직한 감정과 가장 역겨운 허식, 가장 엄격한 권위의식과 극단적 개인주의, 가장 정숙한 표현과 가장 외설적인 형식 등의 극단적인 대립을 그 내부에 지니고 있던 마니에리즘 문화의 분열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경우에 '얌전 빼기'는 당시 대부분의 궁정에서 개발되고 있던 교회와 관련 없는 예술의 도발적인 외설성에 대한 의식적인 반동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억제된 외설성의 한 형태인 것이다. 

     

     

     

    출처> 문학와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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