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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주의 정치의 이념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3. 08:24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콘타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카톨릭 개혁운동의 '인문주의적' 제1기는 종말을 고한다. 개명되고 인간적이며 관용적이던 사톨레토, 콘타리니, 폴레 들의 시대도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현실주의의 원리가 승리를 구가했다. 이상주의자들은 현실을 정복할 능력이 없음이 입증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이미 관용적인 르네상스에서 비관용적인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1542년에는 종교재판제도가, 1543년에는 출판 검열제도가 실시되었고 1545년에는 트렌토 종교회의가 열렸다. 레겐스부르크에서의 실패는 카톨릭교회로 하여금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고 권위와 권력에 의해서 카톨릭의 재건을 기도하도록 만들었다. 고위 성직자 중에서 인문주의자들인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광신적인 새로운 반 르네상스 정신이 도처에서 고개를 쳐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새로운 교단의 설립과 새로운 금욕주의 그리고 까를로 보로메오, 필리포 네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테레사 등 새로운 성자의 출현 등에서 이러한 반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방향의 전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예수회의 창설로서 이는 신앙상의 엄격주의와 교회적 기율의 모범이 될 것이었으며 전체주의 사상을 최초로 실현한 것이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원칙을 내걸고 나온 이 예수회는 현실정치 이념의 최고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자 이 세기의 정신적 기본 특징을 가장 날카롭게 표현해주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론과 강령을 최초로 전개한 사람은 니톨로 마키아벨리1469~1527이다. 그에게서 우리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념을 두고 씨름했던 마니에리즘의 전 세계관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실천을 기독교적 이상과 분리시킨 '마키아벨리즘'은 마키아벨리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당시의 중소 군주들은 모두가 이미 완전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었다. 단지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정치적 합리주의의 이론을 공식적으로 표현하였고 이 이론의 의식적・계획적・현실주의적인 실천을 최초로 냉철하게 옹호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는 그가 살던 시대의 대표자이자 대변자였을 따름이다. 만약 그의 이론이 영리하고 비정한 한 철학자의 기발한 사고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모든 도덕적 인간의 양심을 그처럼 뒤흔들 만큼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탈리아의 군소 독재자들의 정치적 방법에만 관계되는 일이었다면 그의 저서는 이러한 폭군들의 비도적적 작태에 대한 당시의 온갖 무시무시한 소문들 이상의 흥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실제 역사는 마키아벨리가 현실주의의 전형으로 내걸었던 도당의 두목이나 독살자들보다도 더 전형적인 현실주의의 예를 낳고 있었다. 예컨대 카톨릭 교회의 보호자 위치에 있으면서 교황의 생명을 위협하고 기독교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파괴한 칼 5세야말로 가차 없는 현실주의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근대 민중종교의 대표적인 창시자이면서도 지배자를 위해 민중을 배반했고 내면의 종교를 외부적인 생활에 가장 유능하고 세속적인 세계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사회계층의 신앙고백으로 만든 루터는 또 어떠했던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이야기에서처럼 부활한 예수의 가르침이 교회의 존립을 위협한다면 그리스도를 또 한 번 십자가에 못 박기라도 하였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도 바로 정치적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당대의 군주들치고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국민의 복지를 희생시키지 않은 군주가 어디 있었던가? 아니, 당시의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마키아벨리 이론의 실례가 아니었던가? 현실은 그 자체의 엄격한 필연성을 따를 수밖에 없고, 어떠한 이론도 이 무자비한 현실의 논리 앞에서는 무력하며, 따라서 인간은 이 논리에 적응하거나 파괴당할 수밖에 없음을 새로운 경제체제는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동시대인과 그 다음 한두 세대의 사람들에게 마키아벨리의 의의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기는 마르크스와 니체와 프로이드의 선구자인 최초의 폭로적 심리학자 마키아벨리를 접하고는 불안해하고 겁을 먹었으며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림을 맛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얼마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무대의 상투적인 등장인물이 되었고, 모든 간계와 기만의 화신이 되었으며, 마키아벨리라는 고유명사가 마키아벨리라는 보통명사로 변화하기 시작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의 영국 희곡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당대의 사람들을 경악・분노시킨 것은 폭군들의 폭력행위나 이들에 대한 궁정 시인들의 비굴한 아부가 아니라 이들이 사용한 수단이 폭력의 철학과 함께 자비의 복음을, 영악한 자의 권리와 함께 고상한 자의 권리를, '여우'의 도덕과 함께 '사자'의 도덕을 동시에 옹호하는 한 인간에 의해 정당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종,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한 이래로 언제나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위한 두 개의 상이한 도덕적 기준이 있어왔다. 마키아벨리는 단지 이러한 도덕의 이원성을 사람들에게 의식시키고, 국가의 정사에서는 사생활과 다른 행동기준이 통용되며 무엇보다도 성실과 정직이라는 기독교적 도덕 원칙이 국가와 군주의 행동기준을 절대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서양 역사에서 마키아벨리즘의 이중 도덕론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중세의 문화를 둘로 분열시켰고, 유명론과 자연주의가 도래하게 한 '이중 진리'의 학설뿐일 것이다. 중세의 학문적 세계에서 보였던 분열이 이제 도덕적 세계에서 일어난 것인데, 다만 이 경우는 훨씬 더 중요한 가치문제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한층 더 컸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를 계기로 생겨난 시대의 단층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당시의 중요한 저작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자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알기 전에 그 문헌을 썼는지 알고 난 후에 썼는지의 여부를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이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볼 필요까지는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도 드물었다. 정치적 현실주의나 '이중 도덕'의 개념은 당시 사람들의 공동재산이었고 온갖 경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생활영역에서 그의 신봉자와 추종자를 낳았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키아벨리즘에 감염된 사람으로 지레짐작을 한 경우도 많기는 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모두가 마키아벨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고, 예리한 지성은 모두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출처>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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