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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28. 14:12

     

    칼 5세가 지배권을 확립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터키의 위협과 신항로의 발견, 그리고 대서양에 인접해있는 여러 유럽 국가들이 유력한 경제 실력자로 등장함으로써 세계 무역의 중심지는 지중해에서 서쪽으로 옮아갔다. 세계 무역의 판도에 종래의 이탈리아 소국가들을 대신해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한 영토와 부유한 재력을 가진 통일국가들이 등장하자, 초기 자본주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바야흐로 대규모 근대 자본주의가 막을 올리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에스파니아로 유입된 귀금속은 비록 가치수단의 증가와 물가의 앙등 같은 직접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대자본주의 시대의 도래를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시 사람들은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아메리카의 은을 중상주의자들의 이론에 따라 단순한 보화로 취급하여 그것을 고정시켜 국내에 묶어두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아메리카 은의 개입보다도 국가와 자본의 결탁 및 그러한 결탁의 결과 칼 5세와 펠리페 2세가 벌인 정치적 사업들이 개인적 자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비교적 소자본으로 운영되던 수공업적 기업이 대규모의 공업적 기업으로 발전하고 상품교역이 금융업으로 발전하는 경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났었다. 이러한 경향은 15세기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경제중심지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그러나 수공업적인 소규모 경영이 대규모 산업에 의해 밀려나고, 금융업과 상품교역의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15세기 말에 이르러서이다. 자유경쟁을 제한하고 있던 모든 구속의 해제는 한편으로는 조합적 원칙에 종언을 고하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날이 갈수록 경제적 활동을 생산과는 동떨어진 영역으로 옮겨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소규모 경영은 대기업에 편입되었고 소자본가는 점점 더 금융사업에만 전념하는 대자본가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제의 결정적 요인들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점점 더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경기라는 것은 신비스럽고 또 그런 만큼 더 냉혹한 현실이 되었으며, 피할 수 없는 일종의 초인적인 힘으로 사람들 머리 위에 군림하였다. 하층민과 중산층은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길드 내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함에 따라 생활의 안정감을 잃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자본가들이 불안을 안 느낀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규모가 커질수록 더 위험한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16세기 후반부에는 일련의 재정적 위기가 연달아 도래했다. 1557년에는 프랑스의 파산과 에스파니아의 1차 파산이 1575년에는 두번째의 에스파니아 재정파탄이 일어났다. 이러한 파국적인 사건들은 주요한 무역상들의 기초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소상인들을 몰락시켰다. 

     

     

    money / finance, money changer, woodcut by Hans Weiditz (circa 1500 - 1534), people, capitalism, table, coins, exchange, Europe, 16th century

     

     

    가장 구미가 당기는 사업은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일이었다. 동시에 제후들이 과중한 빚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가장 위험한 사업이기도 했다. 이러한 투기사업에는 은행가와 직업적 투기꾼 이외에 중산층도 그들의 재산을 은행에 예금한다든가 아니면 당시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증권거래소에서 주를 매매한다든가 함으로써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개별적인 은행의 자산만으로는 군주들이 필요한 만큼의 자본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빚을 얻기 위해서 안트베르펜과 리용에서 증권거래소의 기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이와같은 거래와 관련하여 온갖 형태의 증권투기 사업들, 예컨대 증권매매, 기한거래, 중개매매, 보험업 등이 발전하였다.

    전유럽은 이제 상장 분위기와 투기열로 뜨겁게 되었고, 이러한 투기열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외무역상사가 지금까지 꿈도 못 꾸던 이익의 배당금을 일반대중에게 제공함으로써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는 광범위한 대중에게는 파국적이었다. 농업생산에서 공업생산으로 관심이 옮겨짐과 동시에 실업이 유발되었고 도시인구의 과잉, 물가상승 및 임금억제가 어디서나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적 불만이 절정에 달한 곳은 한때 최대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진 독일에서였고 그 불만이 터진것은 사회에서 가장 도외시되었던 계급인 농민들에 의해서였다. 사회적 불만은 종교적인 대중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폭발했는데, 한편으로는 종교적 운동 자체가 당시의 동적인 사회발전에 힘입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항적인 세력이 하나의 종교적 이념의 기치 아래 가장 쉽게 모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혁명과 종교적 혁명이 혼연일체를 이룬 것은 결코 당시의 재세례파 경우만이 아니다. 금융경제와 독점경제, 고리대금과 토지투기등, 요컨대 울리히 폰 후텐과 같은 사람이 표현한 대로 '푸거 작풍'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던 시대적 분위기로 보면, 당시의 사회적 불만이라는 것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단계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불만은 사회적 혁명보다는 종교적 혁명에 더 관심을 가졌던 계층과, 종교적 혁명보다는 명확히 사회적 혁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계층을 결합시켜 주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떤 비중으로 결합되었든지간에 아직도 중세에서 멀지 않은 시기였던만큼 당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이념들은 모두 신앙이라는 사고형식 및 감정형식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음울하고 열병에 들뜬 당시의 시대상황, 그리고 갖가지 종교적, 사회적 동기가 응집되어 일어난 막연하나마 보편화된 구원에 대한 기대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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