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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27. 16:16
마니에리즘은 16세기의 전 유럽을 동요시켰고 정치, 경제, 정신생활의 모든 영역에 파급되었던 위기의 예술적 표현이다. 정치적 변혁은 근대 최초의 제국주의적 강대국인 프랑스와 에스파니아가 이탈리아를 침범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는 봉건주의로부터의 왕권 해방과 백년전쟁의 성공적인 종결 결과 강국이 되었고, 에스파니아는 독일 및 네덜란드와의 통합이라는 우연의 산물인데 칼 대제 이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성장하였다. 칼 5세가 상속받은 영토를 합쳐 정비한 국가판도는 프랑크 왕국을 독일에 합병한 것과 같은 크기의 규모라고 비교되어왔는데, 교회와 황제권의 통일을 재현하려던 최후의 대시도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은 중세 말기 이후로는 현실적 근거를 가지지 못했고, 그리하여 원했던 통일 대신에 정치적 갈등이 일어나 그 후 400여 년간의 유럽 역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외세 지배하의 이탈리아
프랑스와 에스파니아는 이탈리아를 황폐화하고 굴복시켜 절망의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다. 샤를르 8세가 이탈리아 정벌 길에 오를 때만해도 이탈리아에서는 중세 독일 황제들의 침입에 대한 기억이 이미 완전히 희미해져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끊임없이 서로 싸우기는 했지만 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산 지 오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침입에 어리둥절해했고 그 충격에서 다시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나폴리를, 이어서 밀라노를, 마지막으로 피렌체를 점령했다. 남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은 곧 에스파니아군에 의해 다시 축출되지만, 롬바르디아 평원은 수십 년에 걸쳐 이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 지역은 1525년 프랑스와 1세가 파비아의 전투에서 칼 5세에게 패해 에스파니아로 끌려갈 때까지 오랫동안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칼 5세는 이때부터 이탈리아를 완전히 수중에 장악하고 더 이상 교황의 음모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1527년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응징하기 위해 칼 5세의 지휘 하에 1만 2천의 용병이 로마로 향했다. 이들은 도중에 부르봉가의 한 원수가 이끄는 황제군과 합류하여 영원의 도시 로마를 습격해서 8일 후에는 로마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고 떠났다. 그들은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신부와 수도사들을 살상했으며 수녀들을 능욕, 학대하였고 산 피에트로 성당을 마구간으로, 바티칸 궁을 병정들의 막사로 만들었다. 르네상스 문화의 근거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였다. 교황은 무력해지고 고위 성직자나 은행가들도 로마에서 위험을 느꼈다. 로마의 예술활동을 지배했던 라파엘로파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한동안 로마는 예술도시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했다. 1530년에는 피렌체마저 에스파니아와 독일 연합군의 희생물이 되었다. 칼 5세는 교황과 합의하여 알레산드로 메디치를 세습 군주에 앉힘으로써 공화국의 마지막 흔적마저 없애버렸다. 로마 약탈 이후 피렌체에서 일련의 혁명적 소요가 일어나 메디치가의 추방으로까지 치달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황제와 결합하려는 교황의 결심을 촉진시킨다. 교황은 이제 황제의 동맹자가 되었고 나폴리에는 에스파니아 부왕이, 밀라노에는 에스파니아 총독이 직접 주재했고 그밖에도 피렌체는 메디치가를 통하여, 페라라는 에스테 가를 통하여, 만투아는 곤자가 가를 통하여 에스파니아가 지배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두 문화 중심지인 피렌체와 로마에는 에스파니아적인 생활양식과 관습, 그리고 에스파니아적인 예절과 우아함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니아 문화는 이탈리아 문화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정복자의 정신적 지배는 깊이 침투하지 못했고, 이탈리아 예술은 이탈리아 전통과 계속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탈리아 문화가 에스파니아의 영향에 무릎을 꿇은 것같이 보이는 경우에도 사실은 스스로 궁정적 형식주의를 추구하던 친퀘첸토의 여러 전제들로부터 나온 이탈리아 문화 자체의 내면적 발전경향을 따른 데 불과했던 것이다.
칼 5세는 독일과 이탈리아 자본의 도움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하였다. 황제의 선거까지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돈문제였는데, 이는 푸거 家(14~16세기 활약한 독일의 은행가들로 합스부르크가의 재정적 지원자였으며 칼 5세의 전쟁도 지원)가 주도하는 은행가 연합에 의해 처리되었다. 선거후(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 선거권을 가진 왕과 제후들)의 값은 결코 싸지 않았고, 교황은 자신의 지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적어도 1만 두카트를 요구하였다. 이때부터 금융자본가의 세계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칼 5세가 그의 적들을 정복하고 자신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군대는 바로 이러한 금융자본의 산물이었다. 물론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수행한 전쟁들은 당대 최대의 자본가들을 파멸시켰지만, 또한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지배의 길을 연 것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아직 규칙적으로 세금을 거두어 상비군을 유지할 만한 형편은 못되었다. 권력은 근본적으로 아직도 지방 영주의 손에 놓여 있었다. 그의 손자 칼 5세에 와서야 비로소 순수한 기업적 원칙에 의한 국가재정의 조직화, 통일적인 관료기구와 대규모적인 용병제도의 창설, 봉건귀족의 궁정 귀족 혹은 관료 귀족으로의 전환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중앙집권적인 군주국가의 기초가 닦인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이었다. 영주들이 토지를 직접 경영하지 않고 소작시킨 이후로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신하의 수가 줄어들었고, 이로써 중앙권력의 강대화가 이루어질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건 아래서 절대주의로 발전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고 또한 돈문제였다. 왕실의 수입은 대부분 귀족이나 특권계급이 아닌 사회계층의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이러한 계층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국가의 이익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물론 위급한 국면에서는 이들 계층에 대한 배려가 대자본의 이익 앞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왕들이 그들의 정규적인 세원에도 불구하고 대자본의 도움을 포기할 정도는 못 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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