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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29. 14:06

     

    종교개혁이 사회학에서 결정적인 사실은 이 운동이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에서 출발하였고 이 운동을 전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성직자들의 탐욕, 면죄부와 교회 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장사 행위였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압박받고 착취당하던 사람들은 부자는 저주받고 가난한 사람은 축복받는다는 성경 말씀이 단순히 하늘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봉건적 특권에 대한 투쟁에 열광적으로 참가했던 브르주아들은 그들의 목적이 일단 달성되자 이 운동에서 한 발 물러났을뿐더러, 하층민의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일체의 진보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처음에는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민중운동으로 시작되었던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제 주로 지방 영주나 시민계급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루터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안목으로 혁명 계급이 성공할 전망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으로,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사회계층에 점차 편승했다. 그리고 그는 단지 대중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영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도적과 같은 흉악한 농민들'이라고 선동・사주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은 사회적 혁명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음이 분명하다. 

    루터의 배신이 가공할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가 빈약한 것은 아마 재세례파 계통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배반당한 계층 중에서 실제로 이렇다 할 대변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음울한 세계관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의 진행과정에 대해 느꼈던 일반적인 환멸의 간접적인 표현이다. 루터의 '이성적인' 행동은 당시의 현실정치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하나의 가공할만한 예이다. 물론 종교적 이상이 실제적 현실과 타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스도 교회의 전역사는 하느님의 것과 황제의 것 사이의 조정과 균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타협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여러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것도 일반대중이 정치적 사건의 배후를 거의 알 수 없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서 종교개혁운동의 변질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것도 인쇄술이 발명되어 팸플릿이 마구 쏟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진행되었다. 당대의 정신적 대표자들이 농민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심지어 이와는 전혀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의 위대한 이념이 변질・타락되는 이 엄청난 광경을 보았을 때, 비록 그들이 종교개혁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지라도 이 광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농민문제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절대주의 시대의 모든 혁명적 이념이 거쳐야 했던 발전과정의 한 징후에 불과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카톨릭의 개혁운동

    종교개혁운동은 16세기 전반부, 즉 일련의 종교전쟁과 트렌토 종교회의 (1545~1563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부정기적으로 열린 카톨릭교회의 회의), 그리고 비타협적인 반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단순히 교회나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고대의 소피스트 운동이나 18세기 계몽주의 또는 오늘날의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책임의식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문제였다. 종교개혁 후에는 성실한 카톨릭 신자라면 예외 없이 교회의 부패와 교회 정화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비롯된 사상은 그들에게 더욱 깊은 영향을 끼쳤다. 즉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사라져 간 내면성과 초세속성, 그리고 비타협성을 의식하게 되었고 이를 회복하려는 달랠 길 없는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유럽의 모든 선량한 기독교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의 이상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을 자극하고 열광시킨 것은 종교개혁의 반물질주의,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새로운 석죄론, 신과 직접적인 교섭을 할 수 있고, 신도는 누구나 곧 사제일 수 있다는 이념 등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이 오로지 정치에만 관심이 있는 영주와 무엇보다도 경제에만 관심이 있는 시민계급의 종교 신조가 되고 새로운 교회 조직으로의 길을 밟게 되자. 이에 가장 큰 실망을 느낀 계층은 지금까지 종교개혁을 단순히 하나의 정신적 운동으로 간주해왔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이었다. 

    종교생활의 내면화, 심화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했던 곳은 로마였고 - 물론 이러한 감정과 생각이 교황이나 측근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 독일의 종교개혁 때문에 다가오는 교회분열의 위험성을 유럽의 어느 곳보다 가장 잘 의식하고 있었던 곳 역시 로마였다. 카톨릭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잘못과 근본적인 수술의 필요성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계몽된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급진주의는 교황의 절대적 권위와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고 하였다. 아무튼 그들은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그 방법으로 자유롭고 광범위한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이 제의를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런 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520년 경 로마에는 '하느님의 사랑의 수도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경건한 신앙의 모범이 되고 또 종교개혁에 자극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여기에는 당시 로마 성직자들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고 명망있던 싸돌레토 , 지베르티, 티에네와 카라파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로마 약탈' 사건은 이러한 움직임도 중단시켰고, 그 구성원들도 제각기 뿔뿔이 흩어졌으며 한참 후에야 다시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운동은 그 후 베네치아에서 사돌레토, 콘타리니, 폴레를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여기서는 그 후의 로마에서도 다시 그랬던 바와 같이 이 운동의 목표를 루터주의와 화해하고 종교개혁의 도덕적 내용, 특히 신앙석죄론을 카톨릭교회를 위해 살려서 활용하는 데 두고 있었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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