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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니에리즘의 예술이론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1. 12:24

     

    예술이론에서도 일반적인 정신적 위기에 상응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르네상스의 자연주의, 철학적 용어를 빌리면 르네상스의 '소박한 독단주의' 와는 반대로 마니에리즘은 최초로 예술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 즉 예술과 자연의 일치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르네상스에서 자연은 예술적 형식의 근원이었고, 예술가들은 자연에 산재해 있는 미의 요소들을 수집・정리하는 '종합'의 행위를 통해 형식을 획득하였다. 그러니까 예술의 패턴은 비록 주관에 의해 조직되지만, 그 원형은 이미 객관 속에 있었다. 매너리즘은 이러한 예술의 모사설을 파기한다. 새로운 이론에 의하면 예술이 '자연을 따라서'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자연과 함께' 창조를 수행한다는 것이다. 로마조와 페데리코 주카리는 모두 예술의 근원은 자발적인 정신에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조에 의하면 예술적 천재는 신의 힘이 자연에서 작용하는 것 같이 예술에서 작용하며, 페데리고 주카리에 의하면 예술적 상념 - 그의 이른바 '내부의 데생 - 은 예술가의 영혼에서의 신성의 나타남인 것이다. 페데리고 주카리는 예술의 '상념'이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예술은 그 진리 내용을 어디서 얻으며, 정신의 형식과 현실의 형식 사이의 일치가 어디서 연유하느냐 하는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다. 그의 대답은 사물의 진정한 형식은 예술가의 영혼 속에서 신적인 정신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확실성의 기준을 이루는 것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 근대의 데카르트에서처럼 타고난 관념 내지는 신에 의해 인간의 영혼에 심어진 관념이라는 것이다. 현실의 사물을 생산하는 자연과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인간 간의 일치는 신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페데리고 주카리는 스콜라 철학자들보다는 물론이요 데카르트보다도 정신의 자발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이미 르네상스에서 자신의 창조적 본성을 자각하는 데까지 발전한 바, 마니에리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발성의 근거를 신에다 둔 것은 인간 정신을 더욱 높은 차원에서 옹호한 것일 뿐이었다. 르네상스 미학의 종착점이던 예술가와 자연 사이의 소박한 주관・객관의 관계는 해체되어, 이제 천재는 자신이 근거를 잃었고 자신을 보완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르네상스에서 생겨난 예술창조 능력의 개인주의와 비합리주의 이론, 그중에서도 특히 예술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으며 예술가는 타고나야 한다는 주장은 마니에리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장 첨예하게 표현된다. 특히 예술적 창조의 자유뿐만 아니라 그 무규칙성을 말한 지오다노 부르노의 생각이 그러했는데, 그는 "규칙이 시의 원천이 아니고 시가 규칙의 원칙이며, 규칙의 수는 진정한 시인의 수만큼 많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신적인 영감을 받은 예술가라는 이념과 자주적인 천재라는 이념을 통일시키려고 한 이 시대의 미학 이론인 것이다. 

     

     

    The statue of Giordano Bruno

     

     

    미술 아카데미 이념의 전개

    이러한 미학이론을 지배하는 규칙성과 무규칙성, 구속과 자유, 신적 객관성과 인간적 주관성 사이의 대립관계는 미술 아카데미즘에 관한 사고방식의 변천 속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아카데미의 본래 목적과 의도는 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아카데미는 미술가들을 길드에서 해방시켜 수공업자보다 더 높은 사회적 위치로 올려놓는 역할을 하였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어느 한 길드에 속해야만 하고 길드의 제약을 지켜야만 하는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피렌체에서는 아카데미아 델 디제뇨의 회원들은 이미 1571년부터 그러한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아카데미들은 단지 미술가들을 대표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교육기관으로서의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단체로서의 길드만이 아니라 교육기관으로서의 길드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기관으로서의 아카데미는 결국 엄격하고 반진보적이던 구제도를 답습하는 또 하나의 형태에 불과하게 되었다. 오히려 아카데미의 수업은 길드보다도 한층 더 엄격한 규율에 얽매였다. 아카데미는 그 후 이상적인 교수 규범을 정립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비록 이러한 규범이 실현된 것은 다음 시기의 프랑스에 와서이지만 그 근원은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반종교개혁운동, 권위, 아카데미즘, 마니에리즘, 이러한 것들은 동일한 정신의 각기 다른 측면들이며, 그런 점에서 최초의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매너리스트 바자리가 최초의 상설 미술 아카데미아의 창설자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아카데미와 유사한 그전의 학원들은 단순히 즉흥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들은 아무런 체계적인 교과과정도 없이 생겨났고, 대부분 일련의 비정기적인 야간수업 과정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선생과 학생들 모두 수시로 변하는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집단이었다. 이와 달리 매너리스트 시대의 아카데미들은 철저하게 조직된 제도였고, 특히 선생과 제자의 관계는 길드 작업장에서의 장인 ・도제의 관계와 그 원리는 비록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분명한 것이었다. 미술가들은 일찍이 여러 곳에서 길드 조직 이외에도 좀 더 자유롭게 조직된 종교적・자선적 단체, 이른바 동업조합을 형성했었다. 피렌체에도 이러한 종류의 산 루카 조합이 있었고, 뒤이어 바사리는 1561년에 대공 코시모 1세를 움직여서 아카데미아 델 디제뇨를 설립할 때 이 선례를 참조했다. 강제성을 띤 길드 조직과는 달리 바사리의 예술 아카데미 회원은 동업조합의 임의 원칙에 따라 피선되었고,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는 것은 독립해서 창조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에게만 부여되는 명예였다. 견실하고 다방면에 걸친 교양은 이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다. 대공과 미켈란젤로는 이 아카데미의 원장이었고, 빈첸조 보르기니가 원장 대리 즉 실질적인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36명의 예술가가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교사들은 다수의 다수의 젊은 제자들을 그의 작업장이나 아카데미의 교실에서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매년 3명의 선생들이 시내의 여러 작업장을 돌아다니는 방문교사로서 학생들의 수업 현장을 감독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작업장에서의 수업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기하학이나 원근법 또는 해부학 같은 이론적인 보조 과목들만 학교 수업의 형식으로 교수되었던 것이다. 1593년 페데리고 주카리의 창의에 힘입어 로마의 산 루카 아카데미아는 일정한 장소와 체계적인 교수방법을 지닌 미술학교로 승격했고, 이로써 그 후에 설립되는 모든 미술학교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아카데미처럼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대표단체였고 현대적인 의미의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페데리고 주카리는 미술학교의 사명과 지켜야 할 교수방법에 관해 모든 아카데미 제도의 모범이 될 아주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세대에서는 수공업적 교수방법이 골수에까지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계획을 끝까지 관철시킬 수 없었다. 예술정책적・직업조직적인 성격이 좀 더 지배적이었던 피렌체에 비해서 로마에서는 교육적인 목적이 좀 더 뚜렷이 부각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성취된 결과를 보면 당초 계획에는 훨씬 못 미쳤다. 페데리고 주카리의 개원 연설은 덕성과 경건성을 닦아야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 점에서도 흥미롭거니와 특히 예술이론상의 여러 문제들 중에서 제일 먼저 취급될 문제는 르네상스 이래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한 여러 예술장르의 서열 문제에 대한 논쟁과 모든 마니에리즘 예술이론의 기본 개념이자 슬로건이었던 '디제뇨(소묘, 스케치)'의 정의였다. 아카데미 회원들의 강연은 그 뒤에 인쇄되어 일반 대중들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는데, 다가올 2세기 동안의 유럽 예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파리 아카데미의 저 유명한 강좌도 바로 여기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미술 아카데미의 과제는 직업인으로서의 미술가들이 조직 문제나 예술교육, 미학적 문제에 관한 토론 등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이미 바사리의 아카데미는 모든 예술적 문제의 자문기관이었다. 이 아카데미는 미술품의 진열방법에 관한 상담에서부터 예술가의 추천, 건축계획에 관한 전문 감정 등을 의뢰받았고, 심지어는 수출허가서를 다시 검토・확인해주는 일까지 하였다. 

     

     

    Giorgio Vasari / St Luke Painting the Virgin, after 1565

     

     

    아마추어 비평의 문제

    300여 년 동안 아카데미즘은 공식적인 미술정책, 공적인 미술 장려 및 미술교육, 장학금과 상금을 주는 원칙, 전람회 개최에 관한 문제와 부분적으로는 미술비평까지도 완전히 지배했다. 그중에서도 고전적 모델의 추종으로 대체시킨 것은 이 아카데미즘이 한 일이었다. 19세기 자연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카데미의 위신은 뒤흔들리게 되고 아카데미 창설 이후 계속해서 지켜져온 고전주의적 예술이론도 새로운 방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카데미라는 사상은 이탈리아 내에서는 나중에 프랑스에 이식되면서 생긴 것과 같은 경직화와 협소화 현상을 겪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도 점점 더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초기에는 이 기구에 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예술가를 수공업자와 구분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은 좀 더 교양 있고 더욱 물질적 자립을 누리던 일부 예술가들이 그들보다 교양과 재산을 덜 가진 예술가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아카데미아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인 교양이란 날이 갈수록 사회적 차별의 기준이 되었다. 일찍이 르네상스에서도 몇몇 예술가들에게는 이례적인 영예가 주어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비교적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카데미에 속한 화가는 모두 미술교수의 칭호를 누렸고, 예술가들 사이에서 카발리에레(기사)가 나오는 것도 이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분화과정은 예술가들의 사회적 통일성을 파괴하고 그들을 완전히 서로 소외된 여러 계층으로 분열시키는 작용을 했을뿐더러, 그들 중에서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동료 예술가보다도 예술 감상자의 상류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아마추어와 문외한들도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는 사정은 교양 있는 감상자층과 예술가들 사이에 지금까지의 예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유대관계를 낳았다. 피렌체의 귀족계급은 아카데미아 델 디제뇨에 많은 대표자를 참가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종전의 패트런 제도와 결부된 예술에 대한 관심과는 전혀 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아래쪽으로는 예술가들을 비예술적인 수공업자와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던 아카데미즘은 위로는 생산하고 작업하는 예술가와 고상한 신분의 아마추어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회계층의 이러한 혼합은 예술비평가들이 이제부터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예술애호가를 위해서도 글을 썼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저 유명한 <묵상>의 저자인 라파엘레 보르기니는 분명히 그렇다. 다만 자신이 직접 작품 제작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예술에 관해 글을 쓴다는 사실을 변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예술가들 사이에 아직도 아마추어 비평에 대해 상당한 저항감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이다. 로도비코 돌체는 라레티노(1557)에서 확실히 예술가가 아닌 사람이 예술 문제에서 심판 노릇을 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를 상세히 논하면서 교양 있는 문외한에게도 매우 기술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권한이 부여되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따라서 새로이 등장한 예술 이론가들의 저서에는 르네상스의 논문들과는 달리 예술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취급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예술론을 주로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이 쓰게 된 결과, 세부적인 기술문제와 결부된 것보다는 모든 예술분야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예술의 특징이 더 강조되게 마련이며 또 그전보다도 더 주의 깊게 논의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술의 기술적・수공업적인 면을 등한시할뿐더러 개개 예술의 특수성을 얼버무리고 예술의 일반적 개념의 정립을 지향하는 미학 이론이 지배적이 된다. 이러한 예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어떻게 순수한 이론적 문제에까지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예술가들의 이러한 신분상승과 상류층의 예술계 참여는 비록 우회적으로나마 개개 예술에서의 기술의 독자성을 지양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아가서는 예술은 원칙적으로 하나라는 이론을 낳게 하였다. 페데리고 주카리나 로마조와 더불어 예술에 관한 저술에서도 직업적인 예술가들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대세는 역시 비직업적인 예술가들이 예술비평을 독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좁은 의미에서의 예술비평, 다시 말해 정도의 차는 있지만 작품 하나하나의 예술적 가치를 기술적・철학적 이론과는 독립하여 논하는 전문분야로서의 예술비평은 물론 예술사의 다음 시기에 가서야 처음으로 중요성을 갖게 되었지만, 그 시초에서부터 이미 비예술가의 전담 소관이었던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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