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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의 마니에리즘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2. 16:16
주로 1520-30년의 10년 동안에 걸쳤던 피렌체 마니에리즘의 비교적 짧은 제1기는 르네상스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반동이었는바, 이 경향은 16세기 중엽에 절정을 이룬 제2기에 와셔야 브론치노와 바사리를 중심으로 고조・강화되었다. 그러니까 마니에리즘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하나의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한 예술발전상의 단층을 동시대인들은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미 바사리가 폰토르모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과거와의 단절로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바사리는 폰토르모가 체르토사 디 발 데마의 벽화에서 뒤러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또래의 사람들 곧 1500~10년에 태어난 세대가 다시 높이 평가하게 된 고전주의적 이상에서의 이탈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폰토르모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들로부터 뒤러로 전환한 것은 실제로는 바사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단순한 취미나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폰토르모의 세대와 독일의 종교개혁을 맺어주던 정신적 친근성의 예술적 표현인 것이다. 북쪽의 종교성과 더불어 북쪽의 예술 또한 이탈리아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주로 독일 예술가들 중에서 본질적으로 가장 이탈리아 취향에 가깝고 그의 판화 보급으로 인하여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었던 뒤러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뒤러의 양식에서 폰토르모와 그의 동료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결코 이탈리아 예술가의 공통점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고전 예술에서 가장 결핍되었던 특성들, 곧 정신적 심화와 내면성, 고딕적 정신주의와 이상주의였다. 그런데 고딕과 르네상스 간의 대리관계가 뒤러의 경우에는 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마니에리스트들의 경우에는 화합되지 않고 화합될 수 없는 예술관의 모순으로서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었다.
매너리즘의 공간묘사
이러한 대립성은 공간을 취급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폰토르모, 로소, 베카푸미 등은 때로는 개개의 인물군을 화면의 깊은 곳으로 떠밀어 넣었다가 때로는 화면의 깊은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게 함으로써 공간적 효과를 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의 시각적인 통일성과 구조적인 동질성을 폐기함은 물론 화면 구도를 평면적 패턴에 맞추고는 깊이를 존중하는 성향과 평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연결시킴으로써 공간을 전혀 무시하기도 한다. 활력이 넘치는 모든 역동적인 문화에서 그렇듯이 르네상스에서 공간은 시각적 세계상의 기본 범주이다. 이러한 공간성이 마니에리즘에서는 우위를 상실하는데, 그렇다고 그 가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마니에리즘은 공간의 묘사를 완전히 포기하고 인물들을 깊이나 분위기도 없이 추상적 고립상태에서 묘사하는 정태적・보수적이며 현실도피적이고 정신주의적인 문화와도 대조가 된다. 현실적이고 현세 긍정적이며 팽창하는 문화에서의 회화는 인물들을 처음에는 빈틈없는 공간의 관련성 속에서 묘사하고, 다음에는 점차 신체 자체가 공간의 토대가 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인물과 물체들을 공간 속에 완전히 해소시켜 버린다.
그리스 고전주의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4세기의 예술을 거쳐 헬레니즘에 다다르는 일련의 발전이 바로 이러한 길을 걸었고, 초기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를 거쳐 인상주의에 이르는 과정 역시 그러했다. 중세 초기는 고대의 아케이즘과 마찬가지로 공간이나 공간성을 외면했다. 공간성이 처음으로 생동하는 삶의 원칙이 되고, 빛과 분위기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이러한 공간 의식의 공간에 대한 일종의 집념으로까지 변한다. 슈펭글러는 르네상스적 인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파우스트적 인간'의 공간적 시각과 사고가 모든 역동적인 문화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배경에 금빛을 까는 기법과 원근법은 단순히 배경을 처리하는 두 개의 상이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대하는 두 가지 기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쪽이 인간에서 출발한다면 다른 한쪽은 세계에서 출발하며, 한쪽이 공간에 대한 인물의 우위를 강조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공간을 표상의 기본 요소 내지 감각적 체험의 실체로 간주해서 공간이 인간의 실체성을 압도하도록 만들고 인간의 형상이 공간에 흡수되도록 만든다. 이와 관련된 르네상스의 견해를 가장 잘 대표하고 있는 폼포니우스 가우리쿠스는 "공간은 그 장소에 가져다 놓은 물체보다도 먼저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마니에리즘이 이와 같은 전형적인 태도와 다른 것은, 한편으로는 일체의 공간적 제한을 뛰어넘으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공간의 깊이에 의한 동적인 표현 효과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매너리즘의 화면 인물에서 자주 보이는 과장된 유연성이나 과도한 움직임은 상호 관련적인 하나의 체계가 아니라 이제 단순히 여러 공간 계수의 복합체가 되어버린 공간의 비현실성을 보상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공간 문제에 대한 이러한 모순된 태도는 예컨대 폰토르모의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요셉 형제나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마돈나에서처럼 결국은 일종의 환상적인 효과를 보이는데 이러한 환상성은 단순히 극단적인 기분을 내어본 것처럼 보기 쉬우나 실제로 그 근원은 당대의 동요된 현실감각에 있는 것이다.
군주제 지배가 확고해지면서부터 피렌체의 매너리즘은 유희적・기교적인 면을 많이 상실하고 주로 궁정적, 아카데미즘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으로는 미켈란젤로가 절대적인 표본으로 인정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확고한 사회적 인습의 제약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고전주의적 예술에 대한 마니에리즘의 의존도는 그에 대한 반대보다 더 커지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궁정적 피렌체를 지배하고 예술에서도 정해진 기준을 따르도록 했던 권위주의적 정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공작부인 엘레오노라가 그녀의 고향 에스파냐에서 가져온, 차갑고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귀족적인 분위기는 브론찌노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의 작품의 수정같이 투명하고 정확한 표현 형식을 두고 보면 그는 그야말로 타고난 궁정화가이지만, 미켈란젤로와의 관계나 예술에서의 공간 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는 양면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냉철한 자세의 갑옷 뒤에 숨겨진 균형이 흔들린 영혼"이라고 일컬어졌던 내면적인 모순을 두고 본다면 그는 동시에 전형적인 매너리스트이기도 했다.
좀 더 덜 엄격한 사회적 인습의 지배하에서 작업을 했던 파르미지아니노의 경우는 그 '갑옷'이 더 얇고, 따라서 내적 불안의 징표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는 브론찌노보다 더 섬세하고 신경이 예민하며 더 병적이엇다. 그는 피렌체의 궁정화가이자 궁정인이었던 브론찌노보다 좀더 자유스러울 수 있었지만 허식적이고 인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도처에서는 세련된 궁정 양식, 일종의 초 로코코적 양식이 발전했는데 그 섬세함은 18세기 프랑스 예술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고, 대로는 오히려 더 풍요하고 더 복잡하기까지 했다. 매너리즘은 이때 비로소 르네상스 예술이 한 번도 다다르지 못했던 보편적이고 범유럽적인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후로 유럽 전역에 파급되는 이 양식에서 로코코식의 정교한 기교는 엄격한 미켈란젤로식 규범에 못지않게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이 두 요소가 본질적으로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아무튼 미켈란젤로에게서 특히 승리자나 메디치가의 묘소 같은 작품에서는 이미 기교적 요소의 맹아가 싹터 있었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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