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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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방황기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3. 14:56
피렌체의 우환을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로 떠났던 세 친구는 다시 볼로냐로 향한다. 베네치아의 높은 물가를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볼로냐 당국은 오른손 엄지손톱에 붉은 밀랍 표시를 받은 외지인에게만 체류를 허가하고 있었는데,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던 세 사람은 여관에서 허가청으로 보내졌다. 이 곳에서 우연히 만난 예술애호가의 보증으로 체류허가를 받게 되고,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서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잔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가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집에 일 년 가량 머물렀다. 알도브란디는 일찌감치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즉시 볼로냐 시에서 필요로 하는 작업에 투입시킨다. 니콜로 피사노가 작업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겨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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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1. 21:10
가장 위대한 참회 설교자이며 예언자는 1498년에 이미 피렌체에서 화형을 당했다. 페라라 출신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여기서는 그에 대해서 몇 마디만 하기로 하자. 그가 피렌체를 변화시키고 지배하였던 강력한 도구는 바로 그의 연설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대개는 즉석에서 불충분하게 옮겨 적은 설교들이 아주 제한된 개념만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외적인 수단들이 그렇게 대단했던 것 같지는 않다. 목소리, 발음, 수사적 표현 등은 오히려 그의 약점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빼어난 문체와 예술적인 설교자를 원하는 사람은 그의 경쟁자였던 수도사 마리아노 다 기나짜노에게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연설에는 특별한 개인적인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 이후로 루터에 이르기까지 두 번 다시 없었던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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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지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30. 13:03
성직 계급과 수도사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익숙해져 있으며, 자신들의 존재가 보통 사람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에서 오래되고 강력한 것들이 가지는 이점이었다. 보통사람은 누구나 친척 중에 성직자나 수도사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보호나 아니면 장차 교회 재산에서 이익을 얻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한가운데에는 로마 교황국이 있고,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을 갑자기 부자로 만들어주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혀와 펜을 묶어둘 수 없었다는 점도 분명하였다. 가장 대담한 풍자 작가들은 대개가 자신이 수도사이거나 성직의 록을 먹는 자들이었다. 을 쓴 포지오는 성직자였다. 프란체스코 베르니는 성당 참사 회원이었다. 테오필로 폴렝고는 베네틱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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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로마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9. 21:31
바로크가 대두하면서 현실도피적 경향을 밀어내고 등장한 현실 긍정적 태도는 무엇보다도 오랜 종교전쟁을 치르고서 사람들이 느낀 피로감의 징후이자 트렌토 종교회의 기간의 비타협주의를 대체하고 나타난 타협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교회는 역사적 현실의 요구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되도록 이러한 역사적 요구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비록 '이단자'들에게는 종전처럼 가혹한 박해를 가했지만 신자들에게는 점점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자기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많은 자유를 허용하였다. 주위의 세계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했으며 세속적인 삶의 제반 관심사와 즐거움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거의 어디서나 교회가 국가적 차원의 교회가 되고 국가 통치의 수단이 되었는바, 이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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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초기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6. 14:32
1490 년, 도메니크회의 수사 사보나롤라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묵시록에 관한 설교를 시작했다. 당시 그는 37세였고 미켈란젤로 15세, 성령으로 들끓는 것 같은 자그마한 남자가 토해내는 열변을 눈 앞에서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온통 피에 물든 신이 이탈리아를 분노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설교였다. 피렌체는 전율하였다. 청중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가장 이상적인 시민이었던 사람들이 수도회에 입회하겠다고 했고 피코 델라 미란돌라, 폴리치아노와 같은 학자들까지도 이성을 잃는다. 피렌체를 비유한 소돔과 고모라, 로렌조 일 마니피코를 암시하는 부유하고 두려움이 없는 자들의 죄악에 대한 설교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도 두려움에서 헤어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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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적・ 카톨릭적 바로크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25. 14:14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예술사에는 하나의 두드러진 방향 전환이 일어난다. 차갑고 복잡하며 주지주의적인 매너리즘이 물러나고 그 대신 관능적・감정적이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양식인 바로크가 들어선다. 이 양식은 전 시대의 정신 귀족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근본적으로 민중적인 예술관의 승리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적인 교양층이 주도하긴 했어도 좀 더 광범위한 대중을 고려한 예술관의 승리를 의미했다. 카라바지오의 자연주의와 카라치 일가의 주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예술관의 두 방향을 대표한다. 이들 두 방향의 어느 쪽도 매너리스트들의 높은 교양 수준에는 많이 뒤쳐지고 있다. 왜냐하면 카라치가의 아틀리에에서도 르네상스의 거장을 모방하면서도 비교적 단순한 것을 택하고 일반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은 표현하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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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도제생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4. 20:15
1475년 3월 6일생인 미켈란젤로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피렌체 시민으로 당시에는 카프레제Caprese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했는데, 교외(세티냐노Settignano)에 살고 있던 유모의 남편은 석수장이었다. 끌과 망치를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 미켈란젤로는 13세가 되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술가의 길을 택해 당시 거장 화가 중의 한 명이었던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의 도제 생활을 하게 된다. 1400년대 말의 피렌체는 길에서 베로키오, 보티첼리,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로쪼 같은 예술가, 폴리지아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학자들을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도시였다. 수많은 예술계 거장들이 피렌체 시내에 공방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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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의 생애 - 로맹 롤랑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3. 13:16
그는 피렌체의 시민이었다. 어두컴컴한 궁전과 뾰족한 첨탑, 몇 개의 완만한 구릉이 작은 떡갈나무와 물결처럼 굽이치는 올리브의 은빛 베일에 덮여 보랏빛 하늘에 아름답게 부각되는 도시 피렌체. 창백한 로렌조 데 메디치, 입이 크고 교활하게 생긴 마키아벨리가 보티첼리의 과 금발의 비너스와 얼굴을 마주쳤던 예리하고도 우아한 모습의 피렌체 - 시민들은 현명하면서도 협량 하며, 열광적이면서도 집념이 길어 신랄한 발언을 토해내곤 했다 그러나 의심이 많고 서로를 살피고 시기하고 멸망하게 하였던 이 도시 -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자유로운 정신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으며, 보티첼리가 마지막에는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와 같이 환상적 신비주의 가운데 사라졌고, 시뻘건 눈초리의 사보나롤라가 미술품을 불사르는 주위에서 수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