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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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의 지배와 자본주의의 발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1. 09:50
메디치가의 지배 이러한 민중정부가 진압되고 난 뒤의 피렌체는 치옴피 반란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다시 지배권을 장악한 것은 이른바 포폴로 그라쏘popolo grasso(대시민)들이었다. 종전과 비교해서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정치권력을 전체 시민계급이 아니라 몇몇 부유한 집안이 행사하고 또한 그들이 장악한 권력이 더이상 심각하게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 동안은 이들 부호집단은 그들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혁명적 운동이라고 간주되는 일체의 정치적 운동은 지체없이, 그것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진압하였다. 알베르티가, 카포니가, 우자노가, 알비찌가와 이들 가문의 추종자들이 비교적 단기간에 걸친 지배가 끝난 후에 드디어 권력을 잡은 것이 메디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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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르네상스의 연속성 - 사회학적 관점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9. 10:10
이탈리아가 경제적 합리주의로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을 서두를 장식했던 것처럼 예술에서도 이탈리아 예술은 통일성의 원리에 의해서 유럽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발전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전성기나 매너리즘이 전유럽적 운동이었던 것과 달리 초기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문화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현하게 된 것은 이 나라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서구의 여러 나라보다 한발짝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경제의 부흥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재정과 운수 기술상의 이점 때문에 십자군 원정도 여기서 조직되었으며 중세 길드조직의 이상에 맞서서 새로운 자유경쟁 경제가 발달되고 유럽 최초로 은행제도가 생긴 곳도 이탈리아였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는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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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과잉의 인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8. 17:46
유럽의 중세는 필요-충족을 목적으로 한 사회 원리가 기본적으로 작동하던 시대였다. 9세기경까지는 일반인은 물론 영주들조차도 사치의 맛을 잘 몰랐다. 영주들은 수공업자나 농민들한테서 거둔 각종의 공납품을 영내의 각지에 쌓아놓고 부하나 하인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쌓인 공납품이 없어질 때까지 먹고 놀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들이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성의 크기, 부하나 하인의 숫자, 식량이 많은 것 등이었고, 그밖에 보물이니 좋은 곳이니 좋은 식사니 하는 것은 아직 자랑할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유럽 사회의 내용은 10세기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학문과 예술이 진보하고, 생활 태도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인간 생활 의식의, 즉 인간 정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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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명성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8. 09:25
지금까지 서술한 개인의 발전과 잘 어울리는, 새로운 종류의 인정받는 방식이 생겨났으니 곧 현대적인 명성이다. 14세기 명성 개념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여러 계급들이 각기 자기 계급에 어울리는 중세적인 계급 명예심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음유시인과 연가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오로지 기사 계급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이탈리아에서는 전제군주 아래서나 아니면 민주주의 체계에서 각 계급이 평등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이탈리아 문학과 라틴어 문학에 기반을 둔 보편적인 사회의 첫 흔적들이다. 이러한 토양에서 비로소 저 새로운 삶의 요소인 명성이 싹틀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열심히 탐구하였던 로마시대의 시인들이, 명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거기 탐닉하였다는 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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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완성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2. 16:36
전인全人 아주 날카로운 문화사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15세기에 들어와 완전한 수양을 쌓은 사람들이 차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신적, 외적 존재를 조화롭게 다듬는 것을 의식적인 목표로 삼았는지는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지상의 존재에게 가능한 범위에서 그런 생각을 가졌다. 예를 들면 로렌조 일 마니피코를 행운, 재능, 성격 등에 따라 총결산 해보는 일은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 대신 아리오스토 같은 개인을, 특히 그의 풍자에 나타나는 개성을 관찰할 수는 있다.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의 자랑, 자신의 향락에 거역하는 아이러니, 가장 섬세한 조롱과 가장 깊은 호의 등이 얼마만한 화음으로 조율되어 나타나는지를 말이다. 이러한 충동이 당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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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발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2. 10:27
이탈리아 국가와 개인 공화국이든 전제국가든 이탈리아 국가들의 특성속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현대적 인간으로 일찌감치 형성된 이유,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이유가 들어 있다. 개인주의의 형성 중세에는 의식의 두 측면 - 곧 세상을 향한 것과 인간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 - 이 하나의 공통된 베일 아래 감싸여서 꿈꾸거나 아니면 반쯤 깨어 있었다. 그 베일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 등으로 짜여진 것이었다. 그 베일을 통해서 내다보면 세상과 역사는 이상하게 채색되어 보였고, 인간은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당파, 분대, 가족, 그 밖에 어떤 형태든지 보편성의 모습으로만 인식하였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이 베일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국가와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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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국과 그 위기 IV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1. 10:25
하드리아누스 6세(재위 1521~1523) 치하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소심한 개혁들은 저 위대한 독일 종교개혁에 대비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고작해야 지금까지 벌어지던 일들, 성직 매매, 친척 등용, 낭비, 살인강도, 음란함 등에 자신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정도의 일밖에는 하지 못했다. 루터에게서 오는 위험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 치하에서 로마의 전 지평선은 누런 잿빛의 시로코 열풍 비슷한 증기로 뒤덮였다. 교황은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도 외국에서도 미움을 받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쾌감이 계속되는 동안, 로마의 길거리와 광장에는 설교하는 은둔자들이 나타나서 이탈리아와 세계의 멸망을 예언하고 교황을 안티 크리스트라고 불렀다. 추기경 폼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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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국과 그 위기 III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0. 10:00
율리우스 2세 율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의 개인적인 도덕률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는 교황제를 구제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저씨였던 식스투스 이후의 교황들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사태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교황의 명성의 참된 근거와 조건들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에 따라 통치를 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힘과 정열을 그 일에 바쳤다. 의심스러운 협상들과 성물 매매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일반적으로 갈채를 받으면서 베드로의 의자에 올랐다. 이제는 적어도 최고 직위들을 놓고 벌어지는 거래만은 중단되었다. 율리우스에게는 총신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대단히 품위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특별한 행운을 통해 친척 등용만은 초월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