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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와 르네상스의 연속성 - 사회학적 관점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9. 10:10

     

     이탈리아가 경제적 합리주의로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을 서두를 장식했던 것처럼 예술에서도 이탈리아 예술은 통일성의 원리에 의해서 유럽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발전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전성기나 매너리즘이 전유럽적 운동이었던 것과 달리 초기 르네상스는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문화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현하게 된 것은 이 나라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서구의 여러 나라보다 한발짝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경제의 부흥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재정과 운수 기술상의 이점 때문에 십자군 원정도 여기서 조직되었으며 중세 길드조직의 이상에 맞서서 새로운 자유경쟁 경제가 발달되고 유럽 최초로 은행제도가 생긴 곳도 이탈리아였다.  

     

    medieval bank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는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봉건주의와 기사제도가 덜 발달되고 지주귀족이 일찍부터 도시에 정착하여 도시의 금융귀족에 완전히 적응, 동화함으로써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도회지 시민계급의 사회적, 정치적 해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예술문화가 싹튼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로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고대의 문화적 유산이 잘 보존되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고대 전통과의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Imperial cult of ancient Rome - Marcus Aurelius  ( head covered ) sacrificing at the Temple of Jupiter

     

     두루 알다시피 르네상스의 성립에 관한 학설들은 바로 이 요인에 아주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시초를 단일하고 직접적인 외부적 영향 탓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야 그보다 더 간단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학설이 잊고 있는 것은 외부적, 역사적 영향이 결코 정신적 변화의 최종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하나의 외부적 영향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부적 영향을 수용할 전제조건이 이미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외부의 영향과 함께 여러 현상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근거는 외부적 영향 그 자체만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현상이 어느 시각에 와서 현실화되느냐 하는 문제, 즉 현실성 그 자체가 밝혀져야만 한다. 따라서 고대문화가 어느 시기부터 종전과 다른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왜 사람들이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종전과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됐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서두에서 제기했던 의문, 즉 르네상스가 왜 중세와 다르며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의문만큼이나 범위가 넓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힘들며 쉽사리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초기의 고대문화 수용은 단지 하나의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르네상스 초기에 고대문화 수용이 가능했던 것은, 기독교 초기에 고대문화가 거부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 만한 사회적 전제조건이 이미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르네상스의 고대문화 수용이 가지고 있는 징후적 의미 자체를 너무 과대평가해서도 안된다. 르네상스의 담당자들이 재생이라는 획기적인 시대의식과 고대문화의 정신을 새롭게 한다는 감정을 갖고 있긴 했지만, 이러한 감정은 이미 뜨레첸토 예술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유에서 단테와 페트라르카를 르네상스에 속한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고대 옹호론의 반대자들이 그랬듯이 재생이라는 감정의 연원을 중세에까지 소급해서 찾고 중세와 르네상스의 연속성을 연구하는 쪽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연원이 중세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저명한 학자들은 프란체스코회의 운동이 르네상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간주하고, 특히 단테와 지오토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대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서정시적 감수성이나 자연감정 그리고 개인주의를 성 프란체스코로 대표되는 새로운 종교감정의 주관주의 및 내면성과 결부시키면서, 15세기의 고대의 발견이라는 것이 기왕에 전개되고 있던 발전 과정에 하나의 단절을 가져왔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르네상스와 중세 기독교 문화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근대로의 이행이 바로 중세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 이론들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는 바다. 콘라트 브르다흐는 르네상스의 이른바 이교도적인 특징을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있고, 칼 노이만은 르네상스는 "중세적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놓은 거대한 정신적 힘"에 의존하고 있으며 15세기의 개인주의와 사실주의가 실은 "성년에 이른 중세적 인간들의 마지막 발언"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고대 예술과 문학의 모방이란 일찍이 비잔틴에서 문화의 경직상태를 초래했던 것처럼 르네상스에서도 문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 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루이 꾸라조는 심지어 르네상스와 고대의 내면적 관계를 일체 부정하면서 르네상스란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고딕 예술이 자연적으로 부흥된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들 역시 르네상스가 중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의식하고 있지만, 이 두 시대의 상호 연관관계가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연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즉 헨리 토데가 강조한 프란체스코회의 정신, 노이만이 강조한 중세적 개인주의, 그리고 꾸라조가 강조한 자연주의 등이 하나같이 중세의 자연경제가 종말을 고하면서 유럽 사회의 모습을 변모시킨 저 사회적 동력에 근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합리주의

    실제로 르네상스는 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제도로 나아가고 있던 중세적 발전 경향을 이때부터 전유럽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합리주의라는 방향으로 심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예술의 규범이 되는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브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은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동시대 경제에서 보이는 계획성, 목적성, 타산성처럼 계산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체의 것에 대한 혐오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원리들은 또한 그 당시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그리고 국가통치, 외교, 전쟁수행 방법에서 관철되고 있던 동일한 정신의 소산이다. 모든 예술의 발전은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던 전반적인 합리화 과정의 일부분으로 이루어지고, 비합리적인 것은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관계가 수적으로 표현 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서 모순이 배제되고, 그리고 공간의 부분들 상호간에도 모순이 배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미적 감정을 갖게 된다. 투시도법이 공간의 수학화이고 비례의 원리가 하나의 묘사 속에 나타난 형상들의 체계화이듯이, 예술적 질을 말하는 일체의 규준들은 점차 이성적인 근거에 종속되고, 예술의 법칙들은 하나같이 모두 합리화되었다. 이러한 합리주의는 물론 이탈리아 예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북쪽지역에서도, 이탈리아에서보다는 좀 통속적인 양상을 띠기는 해도 더욱 명확하고 소박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이탈리아 밖에서의 새로운 예술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면 그것은 로베르 깡뺑의 <런던의 마리아상>인바, 이 마리아상의 배경에는 난로 가리개가 있으며, 이 난로 가리개의 윗부분은 동시에 성모 마리아의 후광을 형성하는 데 쓰이고 있다. 여기서 화가는 비이성적, 비현실적 요소를 일상적인 현실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모양의 우연한 일치를 이용하고 있는데, 비록 그가 난로 가리개라는 감각적 사물의 실체와 마찬가지로 후광이라는 초감각적 현실을 굳게 믿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초감각적 현상에 자연주의적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작품의 매력을 높일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비록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Robert Campin - The Virgin and Child before a Firescreen (National Gallery London) 1440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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