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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의식과잉의 인간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8. 17:46

     

    유럽의 중세는 필요-충족을 목적으로 한 사회 원리가 기본적으로 작동하던 시대였다. 9세기경까지는 일반인은 물론 영주들조차도 사치의 맛을 잘 몰랐다. 영주들은 수공업자나 농민들한테서 거둔 각종의 공납품을 영내의 각지에 쌓아놓고 부하나 하인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쌓인 공납품이 없어질 때까지 먹고 놀다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들이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성의 크기, 부하나 하인의 숫자, 식량이 많은 것 등이었고, 그밖에 보물이니 좋은 곳이니 좋은 식사니 하는 것은 아직 자랑할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유럽 사회의 내용은 10세기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학문과 예술이 진보하고, 생활 태도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인간 생활 의식의, 즉 인간 정신의 혁명이었다고 얘기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 르네상스 시대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도처에서 감탄과 환희에 찬 표현이 발견된다. 예컨대, 독일의 방랑자이면서 종교개혁에 협조한 인문주의자 울리히 폰 후텐은 이런 말을 한다. "오오 세기여, 학문은 훌륭하고, 예술은 소생했다. 산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고향에서 버림받고, 가족과 생이별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고, 직장인 빈 대학에서도 배척당했던 사람조차 그런 말을 할 수 있던 살아볼만한 세상, 그것이 르네상스였다. 

    인문주의의 선구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찬양하고 추억한 것은, 먼저 그들의 선조인 로마인이었다. 위대한 제국, 뛰어난 예술, 문학, 사상, 과학,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거의 완벽하게 훈련된 사람들, 더구나 로마의 노예들까지 찬양과 추억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 시대의 이탈리아인에게는 게르만인이 피가 많이 섞여 있었으나, 그래도 자기네는 영광스런 로마인의 자손이고, 얼마 전까지 자신들을 지배해온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인은 야만인이고, 그들의 문화는 야만의 문화고, 자신들은 야만을 배격하고 위대한 로마를 부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일찌기 로마는 그 전성기에 게르만인에게 침입을 받아 일거에 붕괴하였고, 그로부터 중세 암흑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단테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즉 고대의 문화에 심취해 있던 인문주의자들의 선구자에 해당한다. <로마의 성벽조차도 옷깃을 가다듬고 보아야 한다> 라고 말한 사람이다. 원래 단테는 독일 황제를 로마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자신을 국제인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혼자 모든 것을 알려는 자에게는 어느 것이나 이향이란 것이 없다. 그는 모든 도시의 시민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 방식은 그 무렵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독일 영주들의 사고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지지했고,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처럼 "이탈리아의 통일에 교회가 방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 단테는 중세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라틴어 대신에 이탈리아어를 중시하고, 인간성과 인간의 현실적인 행동의 가치를 주장하고, 현세의 명예를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르네상스 사람에 가깝다. 

    만능의 천재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는 인간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잘 사용하는 특출한 사람들 뿐 아니라, 무엇이나 다 잘하는 <만능의 천재universal genius>도 있게 된다. 원래 이 만능의 천재라는 것은 백과전서처럼 무엇이나 다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특출하게 독창적인 일을 해 내는 인물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대 만능의 천재로는 회화, 조각, 건축 뿐 아니라 시, 음악, 자연 과학에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포츠, 건축, 조각, 시, 법학,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있다.

    원하는 것을 행하라

    프랑스 인문주의자 라블레Rabelais 1494-1553는 종교인이었지만 고전학자, 의사, 해부학자로도 유명했다. 투우렌의 농촌에서 태어난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명한 소설 <가르간튀야와 판타그뤼엘 Gargantua et Pantagruel>은 참신한 문체, 인류에 대한 숭고한 사랑, 정의와 진리에 대한 열정은 그 작품을 라블레의 대표작으로 꼽게 할 뿐 아니라 프랑스 문학의 최고 걸작의 하나이다. 가르간튀아라는 거인의 모험과 전력에 관한 이야기로, 그가 가는 지방은 공상적인 세계가 아니고 당시의 지리 상식에 따라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거인 가르간튀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이에 반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은 가르가튀아 같은 초인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절대왕권에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북방과, 시민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이탈리아와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Gargantua et Pantagruel 삽화

     

    보카치오와 사켓티

    1313년 출생한 지오바니 보카치오의 부친은 아들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일찍부터 그를 나폴리로 보내 상업과 법률을 익히게 한다. 하지만 나폴리에서도 보카치오는 상업이나 법률보다도 그리스어, 라틴어, 시작법 등에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젊은 보카치오는 바르디 금융의 나폴리 지점 직원 신분으로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의 궁정에 출입하면서 왕으로부터 <왕의 아들, 신뢰하는 상담역, 조역, 상인>이란 찬사를 받았다. 그 무렵 23세의 보카치오는 교회에서 로베르토 왕의 서출공주인 마리아 다퀴노 백작부인을 보게 되면서 사랑의 소네트와 칸초네를 쏟아냈다. 피암메타(작은 불꽃)로 묘사되는 마리아 다퀴노 백작부인은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달리 자의식이 강렬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무 거리낌없이 보카치오의 구애에 응한다. 이들은 3년간 맹렬하게 사랑하고,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다룬 보카치오의 유명한 시 <필로콜로><필로스트라토><피암메타 비가><아메토><사랑의 환영> 등을 생산하게 한다. 1340년 바르디 상사가 파산하자 보카치오는 피렌체로 돌아가게 되는데, 상업과 공업의 도시 피렌체가 보카치오의 산문 정신을 일깨워 이탈리아어로 100편의 주옥같은 단편으로 이루어진 <데카메론>이 완성되었다. 데카메론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속박이나 인습을 깨트리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평범한 인물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데카메론에는 에고이즘이나 속임수, 여자의 사악한 면이나 간사한 계략, 사이비 신자의 속임수 등 인간의 본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각자의 욕망이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신이나 국가를 이용한다.

     

    Decameron 삽화

     

    사케티(Franco Sacchetti 1330(35) - 1400)의 소설 두 편에서는 비양심적이고 교활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격은 커녕 공론조차 불가능하던 교회와 국가라는 권위에 맞서 개인의 이익이나 취미를 추구한 새로운 인간상을 엿볼 수 있다. 사케티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신의 의지, 신념, 욕망에 따라 기성 개념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얼마든지 발견된다. 에고이스트, 정의의 투사, 음란한 여자, 불경한 자, 신앙이 두터운 자 등 '원하는 것을 행하는'자들의 만화경이다. 그러나 여기에 일관되는 정신은 기존 사상에 대한 격렬한 반감이다. 이것이 중세에 저항한 르네상스의 본질이다. 

     

     

    출처> 대세계사 8권 근대의 서곡 / 김성근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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