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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국과 그 위기 III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0. 10:00

     

    율리우스 2세

     율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의 개인적인 도덕률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는 교황제를 구제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저씨였던 식스투스 이후의 교황들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사태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교황의 명성의 참된 근거와 조건들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에 따라 통치를 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힘과 정열을 그 일에 바쳤다. 의심스러운 협상들과 성물 매매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일반적으로 갈채를 받으면서 베드로의 의자에 올랐다. 이제는 적어도 최고 직위들을 놓고 벌어지는 거래만은 중단되었다. 

     

    Pope Julius II ordering Bramante, Michelangelo and Raphael by Horace Vernet

     

     율리우스에게는 총신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대단히 품위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특별한 행운을 통해 친척 등용만은 초월할 수 있었다. 율리우스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든 벌어들인 것, 통치를 해서 혹은 전쟁에 나가서 벌어들인 것을 높은 자부심으로 집안이 아니라 교회에 물려주었다. 그는 해체 위기에 있던 교황국에 취임해서, 완전히 통제된 국가를, 그것도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덧붙여서 훨씬 규모를 키운 상태로 물려주었다. 페라라가 교회에 편입되지 못했던 것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산탄젤로Sant'Angelo에 보관시켜둔 70만 두카토를 관리관이 반드시 다음 교황에게 남겨주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는 로마에서 죽은 추기경들,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의 재산을 상속하였다. 그것도 가차없이, 난폭한 방식을 이용해서였다. 그러나 한 사람도 독약을 먹이거나 죽이지 않았다. 그 자신이 직접 전쟁에 출정했던 것은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루 아니면 망치가 되어야 했던 시대, 개인의 품성이 가장 훌륭한 권리보다 더 큰 작용을 하던 시대에 그의 출정은 분명히 쓸모있는 일이기도 했다. 

     율리우스는 교회에 대해 불손한 이탈리아 영주들로 부터 '끔찍한 교황pontefice terribile' 이라는 칭호를 들었으나, 상대적으로 양심의 가책 없이 공의회를 로마로 소집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유럽 전체의 반대파들의 공의회 요청에 저항하였다. 이런 지배자는 자신의 방향을 나타내는 위대한 외적 상징들을 필요로 한다. 율리우스는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이 이런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브라만테가 생각했던 교회의 기초는 모든 통합된 힘 중에서 가장 위대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예술분야에서도 이 교황의 생각과 모습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 계속 살아 남았다. 당시의 라틴어 문학도 전임자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불꽃을 피워올렸다...율리우스는 교황 공의회에서 우레와 같은 법령을 통해서 교황선출시에 성물 매매를 금지하였다. 그가 죽은 다음 돈을 밝히는 추기경들은 전체적인 기부금 협정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금지령을 피해가려고 했다(1513). 교황으로 선출되는 사람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성직록과 직위들을 자기들까지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다는 협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가장 녹이 많은 추기경을 뽑으려 했을 것이다. 이때 성직자단에 속하는, 특별히 자유주의적인 교황을 원했던 젊은 추기경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런 끔찍한 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반니 메디치, 그 유명한 레오 10세를 선출했다.

     

    레오 10세

     앞으로도 르네상스 전성기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는 장에서는 자주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치하에서 교황권이 다시 커다란 내적, 외적 위험을 겪었다는 것만 말하기로 하자. 추기경들의 반란은 이런 위험에 끼지도 못한다. 레오는 전에는 없었던 31명의 새 추기경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짜 방어 수단을 찾아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진짜 공적을 세워 보답함으로써 훌륭한 방어 효과를 만들어냈다.  가장 위험했던 것은 레오가 교황직을 맡고 처음 2년 동안 취했던 특별한 정책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인 줄리아노에게 나폴리 왕국을 그리고 조카 로렌조에게 북부 이탈리아에 밀라노, 토스카나, 우르비노, 페라라를 포함하는 대규모 왕국을 마련해주려고 애썼다. 그런 방식으로 사방을 둘러싼다면 교황국은 메디치 가문의 영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교황국을 세속화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Leone X and Giulio de' Medici, Luigi de' Rossi by Raffaello

     

     그 계획은 일반적인 정치 상황으로 인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줄리아노는 바로 죽었다. 그래도 로렌조에게 왕국을 만들어주기 위해 레오는 우르비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쫓아내려고 시도했다. 이 전쟁을 통해 그는 비할 바 없는 미움과 빈곤을 자기에게 불러들였다. 그리고 1519년에 로렌조도 죽자 그는 힘들여 정복한 땅을 교회에 넘겨주어야 했다. 자발적으로 했더라면 영원한 명성을 가져다주었을 일을 명성도 없이 마지못해 행했던 셈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도 그가 페라라의 알폰소에 맞서 시도했던 일들, 몇몇 작은 전제군주들과 용병대장들에게 실제로 행했던 일들은 명성을 높여줄 종류의 일이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서양의 왕들이 엄청난 정치적 카드 놀이판에 해마다 점점 더 익숙해지던 기간에 일어났다. 그들이 카드 놀이판에 걸었다가 따는 것은 언제나 이탈리아 지역들이었다. 그들이 각기 자기 나라에서 지난 몇십 년 동안 그토록 힘을 키웠으니 언젠가는 교황국을 향하여 손길을 빧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것인가. 레오는 1527년에 완성될 일의 전주곡만을 경험하였다. 1520년 말에 한 떼의 에스파냐 보병들이 교황국을 약탈할 속셈으로 국경선에 나타났지만 교황 군대에 쫓겨갔다. 성직자 계층의 부패에 대해 일반 여론이 마지막 재위 기간 동안 전보다 더 빠르게 무르익었다. 예를 들면 미란돌라의 젊은 피코처럼 예측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절박하게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 사이에 독일에서는 이미 루터가 등장해 있었다. 

     

     

     

    인물소개 :

    율리우스(율리오) 2세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율리오_2세

    레오 10세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레오_10세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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