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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국과 그 위기 IV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1. 10:25

     

     하드리아누스 6세(재위 1521~1523) 치하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소심한 개혁들은 저 위대한 독일 종교개혁에 대비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고작해야 지금까지 벌어지던 일들, 성직 매매, 친척 등용, 낭비, 살인강도, 음란함 등에 자신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정도의 일밖에는 하지 못했다. 루터에게서 오는 위험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Martin Luther’s Reformation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 치하에서 로마의 전 지평선은 누런 잿빛의 시로코 열풍 비슷한 증기로 뒤덮였다. 교황은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도 외국에서도 미움을 받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쾌감이 계속되는 동안, 로마의 길거리와 광장에는 설교하는 은둔자들이 나타나서 이탈리아와 세계의 멸망을 예언하고 교황을 안티 크리스트라고 불렀다. 추기경 폼페오 콜론나,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교황국에 저주가 되었던 이 추기경은 클레멘스가 죽거나 잡히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교황이 될 속셈으로 로마를 기습하였다(1526). 클레멘스가 산탄젤로 성으로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로마에 행운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뒤로 미룬 운명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강한 자에게만 허용되어 있고 약한 자에게는 오히려 멸망을 부르는 종류의 거짓을 통해 클레멘스는 부르봉과 프룬츠베르크가 이끄는 에스파냐-도이치 군대가 행진해 들어오도록 만들고 말았다... 카톨릭 교도였고 왕이자 황제였던 카를 5세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자기 부하들의 손에 죽지 않은 우연에 감사해야 한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어떤 변론으로도 이 사건의 공범자라는 죄목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황과 추기경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수없이 살해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문으로 약탈당하고, 인신매매까지 일어났던 것이 '로마 유린Sacco di Roma' 이다. 카를 5세는 또다시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교황에게서 엄청난 액수를 강탈한 다음 그를 나폴리로 보내려고 했다. 클레멘스는 나폴리 대신 오르비에토로 도망갔다. 

     

    로마대약탈 Sacco di Roma. Francisco Javier Amérigo Aparicio, 1884

     

    교황권

     위기의 해였던 1527년으로부터 수확이 많아서 진지한 목소리들을 다시 경청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로마는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서 파울루스 3세(재위 1534~1549) 같은 사람의 치하에서도 다시 레오 10세 시절의 명랑하고 기강은 엉망인 로마가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교황국이 한 번 그토록 깊은 고통을 받고 나자 교황국에 대해 정치적, 종교적인 종류의 공감이 나타났다. 왕들은 자기들 중의 누군가가 교황에 대한 특별 간수직을 맏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교황의 해방을 위해서 아미앵 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적어도 황제군의 행적을 향한 미움을 충분히 이용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에스파냐에서 자신의 고위 성직자들과 대공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거센 항의를 받게 되었다. 성직자와 세속인 시중꾼들이 전부 상복을 입고 나타나자 카를은 몇해 전에 진압했던 코무니다데스 폭동과 같은 종류의 위험한 사태가 발생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그는 교황을 함부로 대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로서는 모든 외교 정책과는 별개로 심하게 상처를 입은 교황과 화해를 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되었다. 자기에게 다른 길을 제안할 것이 뻔한 도이칠란드의 분위기나 전체적인 상황에 그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 유린의 기억을 통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그래서 화해를 서둘렀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 화해는 교황의 집안인 메디치 가문에 피렌체를 항구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조인되었다. 교황의 조카로서 새로 공작이 된 알레싼드로 메디치는 황제의 서출 딸과 결혼 하였다. 

     공의회 계획을 통해서 카를은 교황을 본질적으로 손아귀에 넣고 억압하면서 동시에 보호하였다. 교황들과 그 친척을 통해 교황국 내부에서 나온 가장 큰 위험, 곧 세속화의 위험은 도이치 종교개혁을 통해서 수백년 동안 제거되었다. 종교개혁이 로마 유린에 가능성과 성과를 부여하였지만 그것은 또한 교황국이 정신적인 세계 권력의 표현이 되도록 만들었다. 

     클레멘스 7세의 마지막 재위 기간, 파울루스 3세 파울루스 4세와 그 후계자들의 치하에서 유럽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는 가운데 완전히 새롭게 부활된 교권 제도가 점차 성숙하였다. 이 제도는 교황국 안에 있는 온갖 위험한 일들, 특히 친척 등용을 피하고 새로이 종교적인 분발을 느끼는 카톨릭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이 제도는 앞서 떨어져나간 사람들과 반대된다는 측면에서만 존재하였고, 또 그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권이 도덕적 측면에서 불구대천 원수들에 의해 구원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진실이다. 이제 교황의 정치적 의미는 점차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고정되었다. 교황국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신하들이 사망할 때 페라라와 우르비노 공작 영지를 상속했다.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교황국 전체는 아마 오래 전에 세속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인물소개:

    마르틴 루터 https://ko.wikipedia.org/wiki/마르틴_루터

    카를 5세 https://ko.wikipedia.org/wiki/카를_5세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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