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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국과 그 위기 II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9. 01:24

     

    보르지아 가문

     엄격하게 보자면 이탈리아 문화 형식들을 논하는 책에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다루지 않아야 할 사람이다. 보르자 가문은 나폴리 가문이나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체사레와 공공연하게 에스파냐어로 대화했고, 루크레치아는 페라라궁에 맞아들여질 때 에스파냐 옷차림이었으며, 에스파냐 테너 가수들이 노래했다. 집안의 가장 가까운 하인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이었고, 마찬가지로 1500년 전투에서 체사레의 악명 높은 병사들도 에스파냐 사람이었다. 체사레의 온갖 이질적인 행위 중에는 폐쇄된 궁전 정원에서 투우를 즐기는 것도 있었다. 부정부패에서도 이 일가는 선두에 등장한다. 

     

    Alessandro VI , by Pinturicchio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어떤 일을 했는가는 자주 저술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는데, 그것은 작은 군주들을 전부 몰아내거나 근절하고, 로마에서 두 개의 큰 귀족 집안, 즉 교황당으로 자처하는 오르시니 일가와 황제당을 자처하는 콜론나 일가를 깨끗이 평정하고 교황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용된 수단들이 너무 끔찍해서, 우연한 사건(부자가 동시에 병이 걸렸다는)이 상황 전체를 갑자기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그들 행동의 결과로 교황국 자체가 몰락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서양의 도덕적 분노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까운 주변에게는 두려움과 숭배를 강요하였다. 외국 군주들은 그의 편이 되었고 특히 루이 12세는 전력을 다해 그를 도왔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 즉 샤를 8세가 가까이 왔던 순간도 뜻밖에 다행스럽게 끝났다. 이 교황의 재임 기간에 점점 커진 위험은 순전히 알렉산더와 아들 체사레 자신들에게 원인이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지배 욕구와 탐욕, 쾌락 등 강렬하게 빛나는 자연성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는 권력과 잘 산다는 측면에서 즐길만한 요소는 무엇이 되었든 바로 첫날부터 가장 광범위하게 누렸다. 이런 목적을 위한 수단을 취하는 데 그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지불했던 희생을 그 이상으로 보상받았다는 것, 그리고 성직을 산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았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금방 알아챘다. 알렉산더는 전에 궁내부대신과 다른 직위를 지내면서 돈이 나올 원천을 잘 알게 되었고, 다른 어떤 추기경보다도 더 큰 사업적 재능으로 그것을 이용했다. 1494년, 카르멜 수도사인 제노바의 아다모가 로마에서 성직 매매에 관해 설교했다가 스무군데의 상처를 입고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 있었다. 알랙산더는 엄청난 액수가 아니고는 추기경을 임명한 적이 없었다.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 by  Bartolomeo Veneto 

     

     시간이 흐르면서 교황의 아들이 지배를 하게 되자 폭력의 수단은 완전히 악마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런 특성은 필연적으로 목적에 대하여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로마의 위대한 가문들과 로마냐 왕조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일어난 일은 신의가 없고 잔인하다는 점에서 나폴리 아라곤 가문이 전세계에 보여주었던 정도를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기만의 재능도 훨씬 더 뛰어났다. 체사레가 아버지를 격리시킨 방법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그는 자신의 형제와 매제와 다른 친척들과 신하들이 교황의 은총을 많이 받거나, 아니면 그들의 위치가 불쾌하게 여겨지기만 하면 모두 죽여버렸다. 교황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 간디아 공작의 살해까지 승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자신도 체사레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체사레의 가장 깊은 계획들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시니갈리아에서 용병대장들을 죽이고 교황국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던(1503) 통치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의 측근에 있던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공작은 단지 저 도당들과 전제군주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오직 교회에 이롭기만을 바란다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고작해야 로마냐 지방만을 자신의 영토로 인정하고 오르시니와 콜론나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다음에 오는 교황들이 자기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이 그의 최종 목적이라고 믿지 않았다. 교황 알렉산더 자신이 베네치아 대사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베네치아를 보호하는 일에 아들을 추천함으로써 그 이상의 속마음을 드러낸 일이 있다. "나는 언젠가 교황국이 그의 손에, 아니면 베네치아 공화국에 떨어지도록 애쓰고 있어요" 체사레는 물론 여기에 덧붙여 말하기를 베네치아가 원하는 사람만이 교황이 될 것이고, 이런 최종 목적을 위해서 베네치아 추기경들이 힘만 합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발언은 아들에게 교황직을 물려주려는 의도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체사레가 알렉산더 교황이 죽은 다음 교황으로 선출되든 안 되든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교황국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할 생각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동안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고 난 다음에 교황이 되어서는 이런 일을 오래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교황국을 세속화했다면 바로 체사레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더 오래 지배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을 것이다. 모든 증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야말로 마키아벨리가 이 위대한 범죄자를 남모르는 공감으로 대했던 본질적인 이유였다. 마키아벨리로서는 '상처에서 쇠를 뽑아낼', 그러니까 이탈리아에서 모든 간섭과 모든 분열의 원천이 되는 교황제를 파괴하는 일은 체사레가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체사레의 속마음을 안다고 믿은 음모가들이 그에게 토스카나 왕권을 슬쩍 내비쳤을 때 그는 경멸감을 보이며 물리쳤다. 

     그러나 그런 전제들로부터 이끌어낸 모든 논리적 결론들은 어쩌면 공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예를 들면 프리들란트 공작 처럼 체사레도 거의 갖지 않았던 특별히 악마적인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용한 수단들이 시종일관된 행동 방식과는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토록 정도가 지나친 악행 속에서는 교황제를 구제할 전망이 다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그의 통치를 끝낸 저 우연한 사건이 없었더라도 말이다. 교황국에서 중간급 지배자들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 체사레에게는 오로지 호감만을 가져다주었다고 보고, 1503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최고 기술자로 삼고서 체사레의 행운을 뒤따른 패거리가 이탈리아 최고의 병사와 장교들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가졌던 원대한 가능성의 증거로 본다고 해도, 다른 부분은 다시 비합리성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당시 사람들의 판단처럼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방금 얻은 국가를 유린하고 학대하고도 체사레는 그것을 계속 움켜쥐고 지배할 생각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알렉산더 6세의 마지막 몇 년 간 로마와 교황국의 상태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식으로 추방자 리스트를 작성했든, 살해 결정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든 보르자 부자는 자기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아니면 유산이 탐나는 모든 사람들을 은밀히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돈과 동산은 그 중 가장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교황에게는 성직자들의 종신 연금이 소멸되는 것과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 그들의 직위에 따른 수입을 차지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가 새로 취임하는 경우 그 판매금을 차지하는 쪽이 수입이 훨씬 좋았다. 베네치아 대사 파올로 카펠로는 "매일 밤 로마에서는 너댓 명의 피살자가 발견된다. 주교들, 고위 성직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로마 전체가 공작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다." 밤이면 체사레 자신이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두려움에 잠긴 도시를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그리고 이런 일은 자신의 미친 살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아무나 모르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1499년에 이미 이에 대한 절망감이 너무나도 크고 널리 퍼져서 일반 민중이 교황의 경비병들을 습격하여 죽이는 일들이 일어났다. 보르자 일가가 공개적인 힘으로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은 독약에 쓰러졌다.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눈처럼 하얗고 맛이 순한 가루가 이용되었다. 그것은 서서히 작용하는 것으로 알아채지 못하게 음식이나 음료에 섞을 수 있는 독약이었다. 알렉산더가 샤를 8세에게 넘겨주기 직전에 (1495) 쳄 왕자는 달콤한 음료수에 탄 이 독약을 마셨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아버지와 아들 역시 어떤 부유한 추기경을 위해 마련된, 독약을 탄 포도주를 우연히 마심으로써 독약에 중독되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부유한 고위 성직자들이 이런 종류의 의심을 받지 않고 죽는 경우란 거의 없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독약은 지방 도시에 은둔한 조용한 학자들에게도 찾아갔다. 교황 주변이 정말로 수상쩍어지기 시작하였다. 벽과 방들을 무너뜨리는 번개와 폭풍우 바람이 전에도 이상한 방식으로 나타나서 그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 적이 있다. 1500년에 이 현상이 다시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것을 '악마의 장난'이라고들 했다. 

     이런 소문은 로마의 1500년 기념식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마침내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당시의 수치스러운 면죄부 착취가 함께 작용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로마로 향하였다. 로마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순례자들 이외에도 하얀 옷을 입은 특별한 참회자들이 이탈리아에서 북쪽으로 향했다. 그들 중에는 변장을 하고 교황국에서 도망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침묵만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판비니오는 이렇게 말한다. " 그가 자기 아들을 위한 대담한 의도들 한가운데서 죽음의 기습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머지 부유한 추기경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그들도 없애고 말았을 것이다."

     

    Cesare borgia leaving the vatican by Giuseppe Lorenzo Gatteri

     

     

     

    인물 소개:

    알렉산더 6세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알렉산데르_6세

    체사레 보르자 https://ko.wikipedia.org/wiki/체자레_보르자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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