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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국가들의 외교 정책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6. 15:49

     

     대부분의 이탈리아 국가들이 창조물(반성에 의거하고 정확하게 계산되고 눈에 보이는 기초에 근거하고 의식을 지닌 창조물)이라고 한다면, 그들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외국에 대한 그들의 관계 또한 창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거의 모두가 상당히 최근에 일어난 권력 찬탈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정은 내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교관계에서도 치명적인 일이었다. 속셈 없이는 누구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제군주가 조용히 통치를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군주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확장하고 움직이려는 욕구는 모든 불법적인 권력에 공통된 현상이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외교 정책'의 고향이 된다. 이 외교 정책은 점차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종의 공인된 법률 체계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선입견이나 도덕적 고려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문제들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다루는 것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우아하고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바닥 없는 심연의 인상을 준다. 

     

    MEETING OF POPE PAUL III FRANCIS I CHARLES V

     

     책략, 연합, 군비, 매수, 배신 등이 모두 합쳐져서 당시 이탈리아의 외교 역사가 이루어진다...이탈리아 전체가 통합된 힘으로 지원했어야 마땅할 베네치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캉브레 동맹이 결성되었다...작은 나라들뿐 아니라 로도비코 일 모로, 아라곤 왕조, 교황 식스투스 4세 등이 이탈리아 전체에 가장 위험한 불안을 야기했다. 이 끔찍한 일이 이탈리아 안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 이런 사태의 특징이 그렇듯이 그들은 외국의 개입과 도움을 얻으려 하였는데 주로 프랑스와 터키가 이에 해당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처음에 주민들은 철저히 프랑스 편이었다. 두려울 정도의 단순성을 가지고 피렌체는 오래전부터 프랑스에 대해 교황당으로서의 공감을 드러냈다. 샤를 8세가 정말 알프스 남부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탈리아 전체가 환호성을 올려서 샤를 8세와 부하들이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상 속에(사보나롤라를 생각해 보라) 위대하고 현명하고 정의로운 기사 통치자라는 이상형이 살고 있었다. 샤를 8세가 돌아갈 때(1495) 모든 환상은 사라졌으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프랑스 왕들이 감추어진, 어떤 동기에 따라 움직였던가 하는 진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걸렸다. 국민들과는 달리 군주들은 프랑스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샤를8세가 행진해오기 훨씬 전부터 외국의 정복을 예견했다. 샤를이 다시 알프스를 넘어 돌아갔을 때 간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모두의 눈에 명백하게 보였다. 너무 늦게서야 사람들은 두 간섭 국가인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현대적인 대규모 국가가 된 것, 그들이 이제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과 소유권을 놓고 죽도록 싸우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중앙집중화가 이루어진 이탈리아 국가들과 똑같아졌고, 그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다만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 나라들을 훔치고 바꾸고 하는 일들이 한동안 무제한으로 이루어졌다. 결말은 에스파냐의 완벽한 우세로 나타났다. 에스파냐는 반종교개혁의 칼과 방패를 가지고 교황국마저도 오랜 종속 상태로 끌어들였다. 

    이탈리아와 터키 

     15세기 이탈리아는 공개적으로, 수치심도 없이 터키인들과 결속을 맺었다. 이는 다른 일들처럼 정치적 영향력의 수단으로 보였다. 단결된 '서양 기독교'라는 개념은 십자군전쟁에서 이미 심각하게 흔들렸고, 프리드리히 2세는 그런 것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오리엔트의 새로운 돌진, 그리스의 곤궁과 몰락 등이 전체적으로 다시 옛날과 같은 서양의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어 냈다. 이탈리아는 예외였다. 터키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실질적 위험이 아무리 컸어도,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모하메드 2세나 그 후계자들과 뻔뻔스러운 합의를 보지 않은 정부는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던 곳에서는 누구나 상대방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정책의 스타일

     당시 이 모든 이탈리아 국가 의 좋은 점을 말해보자면, 두려움, 정열, 혹은 악의로 미리 흐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선입견 없이 다루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곳에는 북유럽 국가와 같은 인위적으로 이끌어낸 권력을 가진 봉건제도가 없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실제로 권력을 가졌다. 또한 군주의 기분에 따라 온갖 진기한 추론들을 동원해서 추상적인 체면을 얻는 수행 귀족이라는 것이 없었다. 군주들과 그 조언자들은 오직 상황에 따라서만, 그리고 달성할 수 있는 목적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신분상의 거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교육받은 전제군주로서 자기 나라와 이웃나라들에 대해 북유럽 군주들과는 비할 바 없이 정확하게 알았고, 경제적, 도덕적 측면에서 친구와 적의 능력을 아주 세밀하게 계산하였다. 

     그런 사람들과는 담판이 가능하고 설득도 할 수 있다. 즉 실질적인 이유들을 근거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나폴리의 위대한 알폰소가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의 포로가 되었을 때(1434) 그는 자기 대신 앙주 가문이 나폴리를 지배하면 그것은 프랑스인들을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만드는 일이라고 비스콘티를 설득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비스콘티는 몸값도 받지 않고 그를 석방하고 동맹을 맺었다. 북유럽 군주라면 그렇게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비스콘티와 같은 도덕성을 가진 군주는 정말 드물다, 로렌조 일 마니피코가 신의 없는 나폴리의 페란테를 방문한 것도 실질적인 근거를 가진 권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증명해준다. 강력한 군주를 붙잡아서 몇 가지 서명을 받고 깊은 모욕을 준 다음 석방하는 일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겨졌다. 이 시기 특히 베네치아 대사들이 정치적 설득의 기술을 사용했다. 이런 외교 기술을 알프스 이북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배우게 된다. 물론 외교적인 교류에서 촌스러움과 단순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외교 사절 Legazioni>에 나타나는 정신은 우리에게 감동적인 것이다. 불충분한 지시를 받고, 장비도 빈약하고 하급 직원을 받으면서도 그는 절대로 자신의 자유롭고 높은 관찰 정신과 눈에 보이듯이 보고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특히 정치적인 '지령'과 '보고'의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아주 일찍부터 수많은 기념비들이 존재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폴리왕 페란테의 최후의 몇주동안 나온 저 대단한 급보, 폰타노의 손에서 나와 알렉산더 6세의 내각으로 전해진 이 급보는(1494.1.17) 이런 종류의 국가 문서들에 대한 훌륭한 개념을 만들어준다. 

     

     

    인물소개 :

    샤를 8세 https://ko.wikipedia.org/wiki/샤를_8세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https://ko.wikipedia.org/wiki/필리포_마리아_비스콘티

    로렌조 일 마니피코 https://ko.wikipedia.org/wiki/로렌초_데_메디치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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