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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성술에 대한 거부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29. 14:46

     

     

    Palazzo schifanoia, salone dei mesi, 04 aprile (f. del cossa)

     

     

    명료한 이탈리아 정신이 이런 망상에 대하여 펼친 싸움은 그럴수록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이다. 파도바의 살롱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들, 페라라에 자리 잡은 보르소의 여름궁전Palazzo Schifanoia에 있는 벽화들 같은, 점성술에 대한 기념비적 찬양과 나란히, 그리고 베로알두스 1세가 감행한 저 대담한 찬양과 나란히 점성술에 현혹되지 않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의 항의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쪽 편을 위해서도 고대의 선구적인 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고대인의 말을 따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건강한 인간 이성과 관찰에서 얻은 것을 발언하였다. 페트라르카는 점성술사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냉담한 조롱으로 가득하다. 그는 점성술의 거짓된 체계를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단편소설들은 이미 탄생 단계부터, 즉 <백 개의 옛이야기> 이후로 거의 언제나 점성술에 적대적이었다.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 망상이 전통과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할 수밖에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장 용감하게 그것을 거부하였다. 조반니 빌라니는 여러 번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별자리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필연성 속으로 강제로 밀어 넣을 수는 없다. 하물며 신의 뜻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마테오 빌라니는 점성술은 피렌체 사람들이 다른 미신과 함께 조상인 이교도 로마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죄악이라고 선언하였다. 그것은 문서로만 머물지 않았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놓고 공공연히 논쟁을 벌인 것이다. 1333년과 1345년에 무서운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별자리에 따른 운명과 신의 의지와 형벌의 정당성을 놓고 점성술사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극히 복잡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런 항의들은 르네상스 전기간 내내 완전히 멈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직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점성술을 옹호하는 편이 그것에 반대하는 것보다 권력자들에게서 인정받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점성술의 반대자들

    로렌조 일 마니피코 주변에 있던, 가장 유명한 플라톤 아카데미 회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점성술을 옹호해서 영주 가문의 자녀들에게 탄생점을 쳐주었다. 그중에서도 어린 조반니가 나중에 교황 -레오 10세- 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서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이 문제에 대해 유명한 반론을 펼쳐서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별을 믿는 것 속에 모든 불신앙과 부도덕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점성술사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행성들을 신으로 숭배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서 모든 행운과 재앙이 나온다고 하니까 말이다. 다른 모든 미신도 점성술에서 도움을 얻는다. 흙점, 손금점, 모든 종류의 마법 등이 시간을 선택하기 위해서 우선 점성술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코는 도덕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스스로 악의 원인처럼 보인다는 것보다 더 악을 촉진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행복에 대한 믿음도, 저주에 대한 믿음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 피코는 경험적인 방법을 써서 점성술사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한 달 뒤의 날씨를 예언한 것 중에서 4분의 3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세계 지배와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 긍정적인 기독교 이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교양 계층에게 모든 참회 설교자들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참회 설교자들은 교양 계층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Astrology and Anti-Astrology-De sphaera manuscript-Ferrara

     

     

    무엇보다도 그는 점성술사들이 그들의 이론 체계를 계속해서 출판하는 것을 힘들게 했다. 그때까지 그런 책을 낸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조비아노 폰타노는 운명론에서 이런 망상 학문을 완전히 인정하고 자신의 작품에서 그 옛날 피르미쿠스의 방식을 따라서 이론적으로 그것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뒤에 그는 대화편 <에기디우스>에서 점성술은 몰라도 점성술사 노릇은 포기하였다. 그리고 자유 의지를 찬양하고 별들의 영향을 육체의 일에만 국한시켰다. 점성술 자체는 아직도 널리 성행하고 있었지만 전처럼 그렇게까지 삶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게 되었다. 15세기에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망상을 찬양하던 회화는 이제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라파엘로는 키지 예배당의 천장에 사방으로 행성의 신들과 항성을 그렸다. 그러나 이들은 장엄한 천사들의 모습이 지키고 있고 위로부터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Santa Maria del Popolo (Rome) - Chigi chapel, Raffaello

     

     

    그리고 또 다른 요소가 이탈리아의 점성술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것 같다. 바로 에스파냐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거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들의 장군들도 아니었다. 그리고 에스파냐 사람들에게서 은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공공연하게, 이 학문이 반 회교적이기 때문에 반 이교적이고, 자신은 이 학문의 적대자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물론 1529년에도 귀치아르디니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점성술사들은 1백 가지 거짓말을 하고도 단 하나만 진실이면 사람들이 믿어주니 얼마나 좋으랴. 다른 사람들은 1백 가지 진실을 말하고도 단 하나만 거짓으로 드러나면 모든 신용을 다 잃어버리는 데 말이다. 점성술에 대한 경멸이 꼭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점성술을 경멸하고도 그냥 일반적인 불확실한 숙명론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탈리아는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도 르네상스의 문화적 충동을 끝까지 건강하게 체험할 수 없었다. 외국의 점령과 반종교개혁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인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런 공상적인 어리석음은 완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과 카톨릭의 반응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탈리아 국민이 거기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로 인해 생겨난 정신적인 손실을 정당한 형벌이라고 볼 것이다. 다만 유럽도 거기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용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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