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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와 미래의 해석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31. 15:27
전조에 대한 믿음은 별의 해석보다는 훨씬 더 순진한 것처럼 보인다. 중세 전체가 다양한 이교 신앙으로부터 그것을 위해 엄청난 축적물을 남겼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점에서 전혀 뒤질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태에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인문주의가 이 인기 좋은 망상에 공헌한 부분이다. 인문주의는 전해오는 이교의 흔적에 문학적인 작업을 덧붙여주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미신은 분명 전조를 예감하고 거기서 결론을 내리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거기에는 대개 해롭지 않은 마법이 가세하였다. 우선 대담하게 이 문제들을 조롱하고 그러면서 그것을 보고하는 학식 있는 인문주의자들이 있다. 대규모의 점성술 책을 쓴 조비아노 폰타노는 <카론>에서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나폴리의 미신을 나열한다. 수탉이나 거위가 혓병을 얻게 되면 나오는 여자들의 탄식, 사냥용 매가 없어지거나 말이 발을 삐었을 때 하는 고귀한 신사들의 깊은 걱정, 광견병이 나라를 어지럽히면 세 번의 토요일 저녁 안에 외우는 풀리아 농부들의 주문 등이다. 동물의 세계는 고대에도 그랬듯 전조에서 특권을 가졌다. 국가의 돈으로 사육되던 사자와 표범 등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흔히 살아 있는 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529년 포위 기간 동안 총에 맞은 독수리가 피렌체로 날아들자, 시 당국은 그것을 가져온 사람에게 4두카토를 주었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특별한 사건들을 위해서 유리한 혹은 불리한, 아니면 아예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들이 있었다.
바르키가 전해주듯이, 피렌체 사람들은 토요일을 운명의 날로 여겼다. 그 날 좋고 나쁜 모든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곤 하였다. 전쟁을 위해 출정할 때 특별한 문을 통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 페루지아 사람들에게 성문의 하나인 상아문은 행운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래서 발리오니 가문 사람들은 전쟁을 하려면 언제나 이 문을 통해서 나가야 했다. 다음으로는 유성들과 하늘의 조짐들이 중세와 똑같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구름이 특별한 모양을 이루어도 상상력은 다시 군대를 그려보고 그 함성 소리가 대기 중에서 들린다고 믿었다. 미신이 성스러운 것들과 결합되면, 예를 들어 성모의 그림들이 눈을 움직이거나 눈물을 흘리면, 그리고 나라의 재앙이 어떤 특정한 죄악과 결합된 것으로 밝혀지면 사람들은 그 속죄를 요구하였다.
1478년 피아첸짜에 아주 오랫동안 폭우가 내려 사람들이 고생을 하게 되자, 얼마 전에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묻힌 고리대금업자가 이 성스러운 땅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비가 멎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주교가 시체를 파내는 일을 거절하자 젊은이들은 강제로 시체를 파내어 무시무시한 함성 속에 시체를 도시의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마지막에 포강에 빠뜨렸다. "그러자 곧장 비가 멎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연대기 작가가 덧붙이고 있다. 물론 안젤로 폴리찌아노 같은 사람도 자코모 파찌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바로 이런 관점을 받아들였다. 파찌는 같은 해인 1478년 피렌체에서 그의 성을 따라 이름 붙여진 파찌 모반의 주동자였다. 사람들이 그를 목매달았을 때 그는 끔찍한 말로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맡겼다. 그러자 여기서도 역시 비가 쏟아져서 곡식의 수확이 위험해졌다. 그때 사람들 한 떼가(대부분 농부들) 시체를 교회 묘지에서 파내자 곧 비구름이 물러가고 태양이 밝게 비쳤다.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행운이 이렇게 은총을 베풀었다."라고 작가는 덧붙였다. 이어서 시체는 축성되지 않은 땅에 파묻혔지만 다음날 다시 파내져서 도시를 통과하는 끔찍한 행진을 한 다음 아르노강에 가라앉혀졌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근본적으로 인기가 있었고, 이것은 10세기나 16세기나 마찬가지였다. 인문주의자들에 관해서 확실한 것은 그들이 불길한 현상 및 새점과는 아주 특별히 친숙하였다는 것이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포지오가 그것을 줄 것이다. 귀족 계급을 부정하고 인간의 불평등을 거부한 이 과격한 사상가는 모든 중세식의 유령 및 악마 출몰을 믿었을 뿐 아니라 고대식의 불길한 현상들을 믿었다. 그러니까 에우게니우스 4세가 피렌체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보고된 것 같은 그런 현상들 말이다. " 그때 사람들은 코모 근처에서 저녁때 4천 마리의 개들이 도이칠란트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한 떼의 소들이 그 뒤를 따랐고 이어서 걷거나 말을 탄 무장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는데, 일부는 머리가 없고, 일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말 탄 거인이 있었고, 그 뒤로는 다시 한 떼의 소들이 뒤를 따랐다." 포지오는 또 까치와 까마귀들의 싸움도 믿었다. 그는 아마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대 신화의 일부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달마티아 해안에 트리톤이 하나 나타났다는 것이다. 진짜 바다의 반신으로서 물속에 있는 하반신은 물고기의 몸을 하고 있었다... 페라라 사람들이 자기에게 나무로 만든 괴물의 조각상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 포지오는 이 말을 완전히 믿었다. 신탁은 없어지고, 신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졌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들고 거기서 맞닥뜨린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다시 유행하였다. 그밖에도 중세 후기의 악마 신앙도 르네상스의 악마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이집트 사람들의 신비주의에 대한 이암블리코스(서기 250~330년, 시리아의 철학자) 혹은 아바몬의 저술은 15세기 말경에 이미 라틴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었다. 심지어는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도 로마 말기의 신플라톤주의적인 망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내용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포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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