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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미신과 새로운 미신이 뒤섞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28. 12:27
고대는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작용을 하였다. 그것도 도그마의 방식으로였다. 고대는 르네상스에 미신을 전해준 것이다. 고대의 미신 중 일부는 중세 내내 살아남아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쉽게 미신 전체가 다시 살아났다. 여기에 상상력이 강력하게 힘께 작용했다는 것은 물론 자명한 일이다. 상상력만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탐구 정신을 그토록 광범위하게 침묵하도록 만들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일부 사람들에게서 신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믿음은 엄청난 불운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단테 같은 사람들은 적어도 지상의 생활을 우연과 비참함에 내맡겼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강한 신앙심을 지켰다면 그것은 그들이 저승에서의 인간의 더 높은 운명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불멸성에 대한 이런 확신마저 흔들리게 되자 숙명론이 우세해졌다. 아니면 숙명론이 우세해지자 불멸성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게 되었거나.
이 공백속으로 맨 먼져 고대의 점성술이 파고들었다. 게다가 아랍인들의 미신까지 가세하였다. 별들이 만들어내는 그때그때의 위치와, 12궁에 대한 각각의 위치에서 점성술은 미래의 사건들과 생애의 흐름 전체를 알아내고, 이런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별들을 통해서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이런 행동 방식은, 대부분 그것 없이 사람들이 행하였을 행동 방식보다 더 부도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매우 빈번히 양심과 명예를 희생시키면서 행해졌다. 이런 망상에 대항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온갖 교양과 계몽이 힘을 못 썼는가 하는 것은 영원히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런 망상은 정열적인 상상력과 결합되고, 미래를 미리 알고 결정하고자 하는 뜨거운 욕망에 기반한 것이고, 고대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에서의 점성술
점성술은 13세기에 갑자기 매우 강력하게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의 표면에 등장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점성술사인 테오도루스를 언제나 데리고 다녔고, 에쩰리노 다 로마노는 돈을 많이 주고 이런 사람들을 한 무더기나 거느렸다. 그들 중에는 유명한 귀도 보나토와, 긴 수염을 내려뜨린 사라센 사람 바그다드의 파울도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모든 중요한 일들을 위해 날짜와 시간을 정해주었다. 그가 행한 많은 잔혹한 행동들은 아마도 적지 않은 부분이 이들의 예언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이후로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별들에게 운명을 물어보게 되었다. 영주들뿐 아니라 도시 정부들도 점성술사들을 고용하였고 대학에서도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망상 학문을 위한 교수들을, 때로는 진짜 천문학자들과 나란히 함께 고용하였다. 교황들도 대부분 점성술에 의존하였다. 물론 피우스 2세 만은 고상한 예외였다. 그는 해몽, 새점, 마법 등도 경멸하였다. 그러나 레오 10세만 해도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점성술이 활짝 피어났다는 것을 명성으로 여겼던 것 같다. 파울루스 3세는 점성술사들이 정해주지 않은 시간에는 추기경 회의를 열지 않았다.
더 나은 사람들의 경우, 행동 방식의 어느 정도 이상은 별들에 따라 결정하지 않고, 종교와 양심이 제한하는 어떤 한계를 두었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훌륭하고 경건한 사람들도 이런 망상에 동참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대표자로 등장한다. 피렌체의 파골로는 그의 의도만으로 보자면 후기 로마 사람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에게서 볼 수 있는, 점성술의 도덕화라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생애는 성스러운 금욕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즐기지 않았고, 모든 일시적인 재물을 경멸하고 오로지 책만을 수집하였다. 학식 있는 의사로서, 그는 친구들에게만 의술을 행하였는데, 그것도 그들이 고해를 한다는 조건을 단 것이었다. 그의 대화 상대자들은 작지만 유명한 그룹으로서, 안젤리 수도원에서 수도사 암브로시오 카말돌레제 주변에 모이던 바로 그 그룹이었다. 그는 그밖에도 코시모의 말년에 그와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코시모도 아주 특별하고 덜 중요한 문제들에 한정하였지만, 어쨌든 점성술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밖에 파골로는 아주 친한 친구들에게만 점성술 지식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런 도덕적 엄격함이 없었어도 이 점성술사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그 어디든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런 사람들은 나머지 유럽지역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오직 중요한 궁정들에만 이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도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큰 집안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나 이 분야에 대한 열성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곧 점성술사를 고용하였다. 점성술사들은 물론 때때로 일자리도 못 찾고 굶주리는 경우도 있었다. 인쇄술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이 분야의 문헌들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딜레탕티즘까지 나타났다. 물론 이런 아마추어들은 가능한 한 전문가를 뒤쫓았다. 가장 고약한 종류의 점성술사들은 그것을 마법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감추기 위해서 점성술을 보조로만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가적 요소 없이도 점성술은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에서 슬픈 요소였다. 미래를 알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눈먼 욕망이 그들의 강한 의지와 결심을 한꺼번에 물리쳐버린다면, 다방면으로 재능 있고 고집센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인상을 주는가! 때때로 그들은 별들이 극히 불길한 일을 알리면, 벌떡 일어나 자기 판단에 따라 행동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별들을 지배하는 법"이라고. 그러고 나서는 다시 옛날의 망상으로 돌아갔다.
우선 명망있는 집안의 모든 자녀들의 운명이 미리 점쳐졌다. 때로는 일어나지도 않을 사건들에 대한 쓸모없는 전제들을 이끌고 인생을 절반씩이나 낭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세력가들이 중대한 결심, 특히 일을 시작할 시간을 알기 위해 점성술에 의지했다. 영주들의 여행, 외국 사절의 접견, 큰 건물의 기초 돌 놓기 등이 전부 그에 따라 이루어졌다. 기초 돌 놓기의 훌륭한 예는 위에 언급한 귀도 보나토의 생애에 나타난다. 그는 행적을 통해서나 아주 체계적인 저술을 통해서 13세기의 점성술을 다시 일으킨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다. 포를리에서 교황당과 황제당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그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도시의 성벽을 다시 쌓게 하였다. 자신이 제시한 별자리가 나타나면 이 일을 시작하라고 했다. 그때 양쪽 당파 사람들이 같은 순간에 각자 자신의 돌을 던져 넣으면 포를리에서는 영원히 당파 싸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교황당원과 황제당원 한 명씩을 각각 선출하였다. 거룩한 순간이 되자 두 사람은 각기 돌을 손에 쥐었고 노동자들은 연장을 들고 기다렸다. 귀도 보나토가 신호를 주자 황제당원은 즉시 자신의 돌을 던져 넣었다. 그러나 교황당원은 망설이다가 아예 돌을 던지기를 거부하였다. 귀도 보나토 자신이 황제당원으로 알려져 있고, 교황당을 해칠 어떤 비밀스러운 일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점성술사는 그에게 호통을 쳤다. 신께서 너와 너희 교황당을 너희 불신의 악의로 멸망케 하실 것이다! 우리 도시의 하늘에 이런 별자리는 앞으로 5백 년이나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리라! 정말로 신은 그 뒤에 포를리의 교황당을 멸망케 하였으나 지금은(이라고 1480년경 연대기 작가는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교황당과 황제당이 완전히 화해하였고 더는 이 두 당파의 이름을 들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는 전쟁 결정이 별자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귀도 보나토는 위대한 황제당 우두머리 귀도 다 몬테펠트로에게 올바른 별시간을 알려줌으로써 수많은 승리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귀도 다 몬테펠트로는 그를 곁에 데리고 있지 못하게 되자 전제정치를 계속할 용기를 잃어버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귀도 보나토는 승리를 약속하는 별자리가 다가올 때면 천체 관측기와 책을 들고 성 메르쿠리알레 교회의 탑으로 올라가서 광장을 내려다보면서, 알맞은 순간이 나타나는 즉시 큰 종을 울려 그 사실을 알리곤 했다. 그러나 그는 때로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귀도 다 몬테펠트로의 운명과 자기 자신의 죽음도 내다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파리와 이탈리아 대학들에서 강의를 하고 난 다음 포를리로 돌아오는 도중에 체세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산적들에게 죽었다.
피렌체인들은 1362년 피사와 전쟁을 벌일 때, 점성술사를 통해서 출정 시간을 결정하였다. 갑자기 도시 안에서 우회 명령이 나왔기 때문에 하마터면 시간에 늦을 뻔한 일도 생겼다. 예전에 여러 번이나 보르고 산티 아포스톨리 길로 출정하였다가 나쁜 결과를 얻곤 했다. 피사를 향해 이 길로 출정을 하는 것은 나쁜 징조로 여겨졌다. 그래서 군대는 이제 붉은 문을 통해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태양을 가리기 위해 쳤던 천막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 또다시 나쁜 징조 - 기를 아래로 내려뜨려 들고 가야만 했다. 대부분의 용병대장들이 점성술을 신봉하였기 때문에 점성술은 전쟁과는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었다. 야코포 칼 도라는 아주 중한 병에 걸려도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다. 그는 전투 중에 사망하리라는 점성술의 예언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바르톨로메오 알비아노는 머리의 상처나 자신의 전투 명령이 모두 별들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확신하였다. 니콜로 오르시니 피틸리아노는 물리학자이자 점성술사인 알레산드로 베네데토에게 베네치아와의 용병 계약을 맺기 위해서 좋은 별 시간을 알려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피렌체 사람들이 1498년 6월 1일에 새로운 용병대장 파올로 비텔리를 임명했을 때 그에게 건네준 지휘봉에는 별자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비텔리 자신의 소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의 경우에 미리 별자리를 물어보았는지. 아니면 점성술사들이 뒤늦게 호기심에서 그 순간에 나타났을 별자리를 계산해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잔갈레아초 비스콘티가 대단한 일격을 펼쳐서 자기 아저씨인 베르나보와 가족을 잡아들였을 때(1385) 목성, 토성, 화성이 쌍둥이자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어떤 사람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별자리가 거사의 결정에 작용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드물지 않게 별자리의 움직임보다는 정치적 통찰력과 계산이 점성술사의 예언을 결정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유럽 세계가 중세 후기 내내 파리와 톨레도에서 나오는 페스트, 전쟁, 지진, 대홍수 등과 같은 점성술의 예언을 듣고 두려움에 떨었다면 이탈리아도 이 점에서는 다른 나라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이방인들에게 항구적으로 이탈리아를 열어주었던 불행의 해 1494년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침입]에 대해서 나쁜 예언들이 나왔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오래전부터 해마다 나쁜 예언들이 나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점성술은 그런 것을 만나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영역으로도 완전하게 확대되었다. 개인의 모든 외적, 정신적 삶이 탄생시의 별자리에 따라 정해진다면 더 큰 정신적 단체들, 예를 들면 민족과 종교 등도 비슷하게 거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별자리는 변하게 마련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 자체도 변하게 된다. 각각의 종교가 전성기를 누린다는 생각은 바로 점성술의 길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교양 세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목성이 토성과 함께 있을 때 헤브라이 신앙이 나타났고 태양과 함께 할 때에, 이집트 신앙이, 금성과 함께 할 때에 회교 신앙이, 그리고 수성과 함께 할 때에 기독교 신앙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달과 함께하면 반 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라 했다. 체코 다스콜리는 아주 뻔뻔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탄생 시의 운을 계산해서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할 운명임을 별점으로 알아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1327년 피렌체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계속 퍼져가면서 초감각적인 문제들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내용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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