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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리주의와 비판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0. 25. 12:29

     

    인문주의는 전체적으로 세속적이었고, 15세기에 연구가 확대되면서 더욱더 세속적으로 되어갔다. 앞에서 이미 개인주의의 선구자들로 소개했던 인문주의자들은 보통 아주 특이한 요구들을 가진 그들의 종교심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종교와 무관한 것으로 보일 정도의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기독교에 무관심하였고, 교회에 대해서 가차 없는 발언들을 해서 무신론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사색으로 뒷받침된 신념의 무신론을 내세운 사람은 물론 없었고,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어떤 주도적인 사상을 구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피상적인 합리주의였을 것이다. 그들이 열을 올리던 고대인들의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이념들, 그리고 교회와 그 가르침에 대한 경멸에서 얻은 일시적인 합리주의 말이다. 옛날 제자였던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급하게 손을 써서 종교재판관들의 손에서 빼내 주지 않았더라면 갈레오투스 마르티우스를 거의 화형장으로 데려갈 뻔했던 생각이란 것도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올바르게 행동하고 내적으로 타고난 법칙에 따라 행동하기만 한다면 어떤 민족 출신이든 상관없이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는 글을 썼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들 인문주의자들 중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인 코드루스 우르체우스의 종교적 태도를 관찰해보자. 그는 처음에 포를리의 영주 가문인 오르델라포 혈통의 마지막 영주의 가정교사였고, 나중에는 오랫동안 볼로냐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교회와 수도사들에 대해서 그는 인문주의자들의 통상적인 독설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어조는 극히 모욕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방 역사와 조롱 속에 자기 자신을 계속 끼워 넣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정한 신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신앙심에 넘친 말을 하기도 했고, 편지로 경건한 사제의 기도 안에 자신을 추천할 줄도 알았다. 한 번은 이교의 어리석음을 나열한 다음 이런 말을 계속하였다. "우리의 신학자들도 자주 시끄럽게 굴고, 시시껄렁한 것을 놓고 싸움질을 한다. 처녀 수태, 반 그리스도, 성체, 예정설 등 내놓고 설교하기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더 나은 문제들을 놓고 말이다." 한 번은 그가 집에 없을 때 완성된 원고들과 함께 그의 방이 불에 탔다. 그는 길에서 그것을 보자 성모상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 내가 말하는 것을 들으시오. 나는 미치지 않았으며 멀쩡한 정신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죽음의 순간 당신에 도움을 요청하면 내 말을 안 듣고 당신 사람들에게로 가버리셔도 좋습니다. 나는 영원히 악마와 함께 살 테니까요!" 이 말을 한 다음 6개월 동안이나 나무꾼 집에 숨어 지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발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단히 미신적인 사람이어서 새점이나 불길한 현상들을 항상 두려워하였다. 다만 영혼의 불멸만은 전혀 믿지 않았다. 자신의 청중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다음에 사람이 어떻게 되며 그의 영혼이나 그의 정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은 모른다. 저승에 대한 모든 말들은 할머니들을 위한 공포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그래도 죽을 때가 되자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혼이나 자신의 정신을 전능하신 신에 맡기고 아직도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신을 경외하라고 타일렀다. 특히 영혼의 불멸과 죽은 다음의 심판을 믿을 것을 타이르고 진심으로 종부 성사를 받았다. 이 분야에서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도, 그리고 그들이 중요한 생각을 발표했다고 해도 삶에서 이 사람보다 더 일관성 있었을지는 전혀 아무런 보장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론과 어렸을 때 배운 카톨릭 사상들의 파편 사이에서 내적으로 흔들렸던 것으로 보이며, 외적으로는 신중함에서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들의 합리주의가 초기의 역사적 비판들과 결합되면서 여기저기서 성서 이야기들에 대한 소극적인 비판이 등장하였다. 예방의 의도로 발설된 것처럼 보이는 피우스 2세의 말이 전해진다. "기독교가 기적을 통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그 도덕성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성서의 기적들을 멋대로 옮긴 내용을 담은 설화들에 대해서는 어차피 조롱을 퍼붓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계속 작용하였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단자들에 대한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정을 떠올렸다. 1500년경에 볼로냐에서 화형을 당한 조르지오 다 노바라는 아마 이 문제에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볼로냐에서 비슷한 시기에(1497) 도미니크회 종교재판관은 강력한 후원자들을 가진 의사 가브리엘레 다 살로가 단순히 후회의 선언을 한 것만으로 그를 풀어주었다. 그는 노상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었는데도 말이다. 즉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라 평범한 수태 과정을 거쳐 태어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자신의 악의로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갔다. 그는 스스로 범한 범죄로 인해 십자가형을 당할만했다. 그의 종교도 가까운 장래에 종말을 고할 것이다. 축성된 성체에 진짜 그의 육신은 없다. 기적들은 그가 신적인 힘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별들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등의 말이었다. 특히 마지막 발언은 이 시대의 특징을 담고 있다. 신앙은 사라졌는데 마법은 남은 것이다. 

     

     

    세속의 통치에 대해서 인문주의자들은 보통, 폭력과 나쁜 정부 아래 사방에서 행해지던 일들을 관찰하는 것 이상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수많은 '운명론' 책들이나 아니면 이와 비슷한 제목을 붙인 책들이 나왔다. 이런 책들은 대개는 행운의 바퀴가 돌아가고 있음을, 지상의 사정, 특히 정치적인 사정이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를 인식한 상황에서, 벌거벗은 숙명론, 체념, 혹은 단순한 탄식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섭리를 찾곤 하였다. 조비아노 폰타노는 자신이 겪은 수많은 체험들로부터 상당한 재치를 가지 고서, 포르투나라고 불리는 마적인 존재의 자연사 책을 썼다. 에네아스 실비우스는 좀 더 농담조로 꿈에서 본 것으로 만들어서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에 반해서 포지오는 노년에 쓴 어떤 책에서 세계를 비탄의 골짜기라고 묘사하고, 각 계층의 행복을 가능한 한 낮게 평가하려고 하였다. 이런 어조는 그다음에도 아주 지배적인 어조로 남게 되었다. 탁월한 사람들 상당수가 자신들의 행운과 불운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였는데 그 총계는 불운 쪽이 압도적이었다. 트리스탄 카라치올로는 아주 고귀한 방식으로 거의 비가적인 어조로 1510년경에 내다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사람들의 운명을 서술하였다. 이런 지배적인 기본 감정을 특히 인문주의자들에게 적용하여서 피에리오 발레리아노는 그의 유명한 논문을 썼다. 이런 종류의 아주 흥미로운 테마들이 몇 가지 있었다. 예를 들면 레오 10세의 행운 같은 것이다. 프란체스코 베토리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행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을 예리한 대가적 필치로 모아놓았다. 파올로 조비오는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그려 보여 주었고, 한 무명의 사람의 전기도 그것을 보여주었다. 방금 언급한 피에리오 발레리아노는 이런 행운의 어두운 면들을 마치 운명 자신처럼 냉혹하게 기록하였다. 

     

     

    Pierio Valeriano Bolzani, 1477–1558

     

     

     

     

    내용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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