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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교의 기초로서의 말 : 국어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6. 2. 16:40

     

    예술 작품으로서의 사교, 국민 생활의 의식적인 최고의 산물로서의 사교는 언어를 그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상적인 언어

    중세 전성기에 유럽 여러 나라의 귀족 계급은 교제를 위해서나 문학을 위해서 하나의 '궁정언어'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였다. 아주 일찍부터 방언들이 광범위하게 갈라져 있었던 이탈리아에서도 13세기에는 이른바 단 하나의 '궁정어curiale'가 있었다. 그것은 궁정과 시인들에게 공통된 언어였다. 결정적인 사실은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적 열정을 가지고 모든 교양 계층의 언어로, 문장 언어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이다. 1300년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백 개의 옛 이야기>의 머리말은 이런 의도를 공공연히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언어는 분명하게 문학과 분리되어서 다루어지고 있다. 최고의 표현은 짧은 연설, 잠언, 답변들에 나타난 분명하고도 단순하고 지적인 표현들이었다. 이것은 그리스 사람과 아랍 사람들이 찬양을 받는 표현법이기도 하다. "그토록 오래 살면서 단 한 마디도 아름다운 말bel parlare을 내놓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열심히 추구할수록 중심이 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단테가 우리를 이 싸움의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방언(이탈리아어)에 대하여>라는 글은 이 문제 자체를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언어 일반에 대한 최초의 논리적인 글이기도 하다. 그의 사고 전개와 결론은 언어학사에 속하는 것이며, 언어학사에서 언제까지나 높은 의미를 차지하게 될 생각들이다. 여기서는 다만 단테의 글이 씌어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언어는 일상적이고 중요한 삶의 문제였다는 것, 당파에 따라 선호하거나 배척하는 모든 방언들이 오랫동안 연구되었다는 것,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언어[국어]의 탄생은 수많은 고통을 수반했다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단테 자신이 그 위대한 시문학 작품을 통해 최고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주로 토스카나 지방어가 새로운 이상적 언어[표준 국어]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지나친 발언이라면 나는 외국인으로서, 극히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지배적인 의견을 따랐을 뿐이라는 점을 참작해달라고 청할 수 밖에 없다. 

     

     

    국어 순화주의는 유용한 만큼 해롭기도 한 법이지만, 어쨌든 문학과 시에서 이 언어[토스카나 지방어를 바탕으로 한 이탈리아어]를 놓고 벌어진 불화는 재능 있는 수많은 작가에게서 표현의 소박함을 빼앗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 이 언어에 통달한 다른 작가들은, 그것이 가진 화려하게 물결치는 흐름과 아름다운 울림에만 기대어 내용과는 무관한 이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악기에 실리면 별볼일 없는 멜로디조차도 아주 멋지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이 언어는 사회적인 교류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고상하고 훌륭한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교양 있는 사람은 일상적인 행동이나 특이한 상황에서도 외적인 품위를 지니기 위해서 반드시 이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때 가장 순수한 아티카(그리스) 사회에서 그랬듯이 더러움과 악의도 물론 이 고전적인 의상을 입고서 등장하였다. 가장 섬세하고 가장 고귀한 것도 이 언어로 타당한 표현을 얻었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것으로는 이 언어가 국내에서, 일찍이 갈가리 찢겨나간 이탈리아의 모든 나라 교양 계층의 이상적인 고향이 되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귀족과 어떤 특정 계층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도 원하기만 하면 배울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리고 어쩌면 전보다 더 - 외국인들은 보통은 극히 이해하기 힘든 사투리를 쓰는 이탈리아의 지역에서도 몇몇 사람이나 농부들이 아주 순수한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 비슷한 일을 프랑스나 도이칠란드의 어떤 계층에서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지만 헛일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교양 계층도 사투리 발음을 한다. 물론 글을 읽는 능력은 교황국인 로마의 사정들을 보고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언어와 발음을 귀하고도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기는 일반적이고 분명한 존경심이 없었다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이탈리아는 차츰 한 지역씩 이 언어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등도 문학의 전성기에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부분적으로는 그 때문이기도 했다. 피에몬트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자발적인 의지의 행동으로 이탈리아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민족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이 순수한 언어에 합류하였다. 16세기 초 이후로 특정한 대상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방언문학의 영역으로 넘겨졌다. 희극뿐만이 아니라 진지한 것들도 있었다. 거기서 발전된 문체는 두 가지 모두를 위해 충분한 것이었다. 다른 국민들의 경우에 이런 식의 의식적인 분리는 훨씬 뒷날에나 나타나는 것이다.

    궁정인의 언어

    <궁정인il cortegiano> 은 교양 계층이 더 높은 사교 매체로서 언어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아주 완벽하게 보여준다. 16세기 초에 벌써 일부러 단테나 단테 시대의 다른 토스카나 사람들이 쓰던 낡은 표현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의 저자 카스틸리오네는 말에서는 그런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으며 글에서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글을 말의 한 형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씌어진 글에 가장 많이 접근한 말이 가장 훌륭한 말이라고 인정한다.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언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유동적이고 변화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주 뚜렷하게 표현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면 아주 아름다운 표현들을 임의로 사용해도 좋다. 토스카나 지방어가 아닌 말, 때로는 프랑스어나 에스파냐어도 특정한 사물을 위해 적합한 것이라면 사용해도 좋다. 그렇게 해서 아주 조심스럽고, 정신을 지닌 하나의 언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고대 토스카나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온갖 꽃과 과일이 열리는 훌륭한 정원처럼 풍요로운 이탈리아어라는 것이다. 이토록 완벽한 언어의 의상을 입혀서 자신의 섬세한 양식, 정신, 문학을 내놓는다는 것은 궁정인의 전체적인 완벽성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일이었다. 

    이제 언어는 살아 있는 사회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국어[토스카나어] 순화주의자들은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언어만을 관철시킬 수가 없었다. 너무나 많은 우수한 작가들과 대화자들이 - 심지어는 토스카나 지방에서도 - 이들의 노력을 무시하거나 우스운 것으로 만들었다. 외국 학자가 와서 그들 토스카나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줄 경우는 특히 우스운 일이다. 마키아벨리 같은 문필가의 존재와 작용은 그들의 모든 거미줄을 끊어버렸다. 그의 강력한 사상과 명료하고 단순한 표현이, 순수한 '14세기 말'과는 전혀 다른 장점들을 가진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북부 이탈리아, 로마, 나폴리 등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글과 대화에서 표현의 순수성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게 높지 않은 것을 좋아하였다. 그들은 자기 지방어의 언어 형식과 표현들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으로는 예를 들면 반델로가 "나는 문체라는 것이 없다. 나는 피렌체 말로 쓰지 않고 자주 야만어로 글을 쓴다. 나는 언어에 어떤 새로운 화려함을 덧붙이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롬바르디아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게다가 리구리아와의 경계선 출신이다. " 라고 큰소리로 항의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쉽사리 거짓된 겸손이라고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요구를 명백하게 포기하고, 그 대신 보편적인 언어를 있는 힘껏 습득하면서 일찌감치 국어 순화주의자들을 향해서 자신의 입장을 선언하였다. 누구나 피에트로 벰보 - 베네치아 사람으로 태어나 일생 동안 가장 순수한 토스카나어를 썼지만 그것을 언제나 외국어로 여겼던 - 처럼 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폴리 사람으로서 비슷하게 행동한 산나짜로처럼 될 수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말이나 글에서 언어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밖에 광신주의와 언어를 위한 회의 등은 국어 순화주의자들에게 맡겨두었던 것 같다. 

    국어 순화주의자들은 훨씬 뒷날, 문학에서 독창적인 기운이 점차 쇠약해지고 전혀 다른 종류의 훨씬 나쁜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전체적으로 해로운 작용을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국어순화학회(Academia della Crusca, 1582년 설립)는 이탈리아어를 죽어서 고정된 언어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회는 너무나 무력해서 지난 세기(18세기)에 국어가 정신적으로 프랑스화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랑받고, 보호받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연하게 만들어진 이 언어는 이제 회화를 통해서 사교 전체를 위한 기반이 되었다. 북유럽에서 귀족과 영주들은 여가 시간을 고독하게 보내거나 아니면 전쟁, 사냥, 술자리와 의식들로 보내고, 시민들은 그들대로 유희와 신체 단련으로 그리고 물론 시를 연습하기도 하고, 축제를 하면서 보내고 있을 때 이탈리아에서는 이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의 중립적인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재능과 교양만 갖추면 온갖 출신 성분의 사람들이 고상한 형식으로 된 진지하거나 농담조의 담화에 몰두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루이지 코르나로는 1550년 경에 <소박한 삶Trattato della vita sobria> 앞부분에서, 얼마 전부터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파냐식)의식들과 칭찬, 루터교와 식도락이 판을 치게 되었다고, 그와 동시에 절도와 , 자유롭고 가벼운 사교는 사라져버렸다고 탄식했다. 대화편 저자들의 말을 빌어도 된다면 존재의 가장 높은 문제들이 선별된 사람들의 대화를 가즉 채우곤 하였다. 가장 숭고한 생각을 내놓는 일은 통상적으로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에 그런것처럼 고독한 작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자체가 목적인 유희적인 사교에만 한정하기로 한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www.importanceoflangu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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