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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의 형식주의와 규범성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8. 12. 12:45

     

    라파엘로의 아라찌Arazzi(벽 장식화)는 근대예술의 파르테논 조각이라고 불린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우리가 고대예술과 근대예술 사이에 있는 유사점을 넘어서서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잊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용납될 수 있다. 그리스 예술과 비교해보면 현대의 고전적 예술은 온기와 직접성이 결여되어 있고, 파생적, 회고적 성격과 더불어 르네상스에서 이미 다소간 고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예술을 낳은 사회는 로마적 영웅주의와 중세적 기사도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 차있고, 인위적으로 만든 도덕률과 사교상의 예절을 따름으로써 실제의 자신들보다 더 돋보이려 하고 있으며, 생활방식도 이러한 허구에 준해 양식화하고 있는 그러한 사회이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은 당시의 사회를 그들 자신이 그렇게 보기를 원했고 또 남에게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던 바대로 묘사했다. 그들 예술의 특징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거의 하나같이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주안점을 둔 귀족적, 보수적 생활이상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친꿰첸토의 모든 예술적 형식주의는 어느 의미에서는 당시의 상류층이 자신들에게 부과한 도덕 개념 및 예의범절의 형식주의와 상응하는 것이다. 마치 귀족계급과 귀족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회계층이 그들의 삶을 감정의 무정부상태에서 보호하기 위해 삶을 하나의 형식적 규범의 통제하에 두는 것처럼, 그들은 예술에서도 이러한 감정표현을 확고하고도 추상적이며 비인격적인 형식이라는 검열에 의해서 종속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생에서건 예술에서건 자기통제와 감정의 억제 및 자발성, 영감, 황홀감 등의 규제가 지상명령이었다. 감정의 표출, 눈물과 괴로운 표정, 졸도나 기절, 비탄과 절망의 몸부림, 요컨대 후기 고딕의 잔재로서 콰트로첸토에서 아직도 볼 수 있던 시민적 다정다감성은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더이상 괴로워하는 순교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약점 위에 군림하는 천상의 임금으로 되돌아갔다. 마리아는 죽은 그녀의 아들을 눈물도 표정도 없이 바라보며 심지어 어린 예수에 대한 일체의 서민적인 애정이나 부드러움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일에서 정도는 당시의 표어였다. 기율과 질서라는 당시의 생활규범과 가장 잘 맞는 것은 당시 예술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절약과 간결이라는 예술원칙이었다. 알베르티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 예술원칙도 이미 예고한 바 있다. "자기 작품에서 품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인물만을 그려야 한다. 마치 군주들이 말을 적게 함으로써 그들의 존엄성을 높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인물의 수를 줄임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의 구성형식으로서 이제는 단순한 병렬의 원리 대신에 집중과 종속의 원리가 어디서나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인과법칙을 도식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의 개개인을 지배하던 권위가 예술영역에서도 직접 지배권을 행사해서 구도의 부분부분이 전체적 체제가 구도라는 기본 사상의 독재체제로 변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회생활에서의 권위라는 원칙과 예술에서의 종속이라는 이념을 단순히 동일시하는 것은 애매한 용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권위와 복종에 근거하고 있는 사회가 예술에서도 의지의 표현과 규율 및 질서의 표현을 , 또 현실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신에 현실의 극복을 더 장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사회는 예술작품에 규별성과 필연성이라는 성격을 부여하고자 한다. 예술을 통해 '더욱 높은 법칙성'을 표현하고 그리하여 세상에는 보편적이고 확고부동하며 침해될 수 없는 기준과 원칙 및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가 지배하며 또 이러한 의미를 인간들이 - 비록 모든 인간들은 아니지만 -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형식은 이러한 사회의 이념에 부합해서 규범적이 되어야만 하고, 또 당대의 지배체계가 원하는 바대로 궁극적이고 완결된 인상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배계급은 무엇보다도 예술에서 실제 생활에서 그들이 바랐던 평화와 안정의 상징을 찾고자 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에서 예술적 구도가 좌우대칭과 상호대응의 형식으로 발전되고 현실을 삼각형이나 원이라는 패턴에 억지로 집어넣은 것은 단순히 하나의 형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정체적인 생활감정과 이러한 감정에 대응하는 현재의 상태를 영구화하려는 소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예술에서 개인적 자유보다는 규범을 위에 두었고, 현실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규범을 따르는 것이 완성에 이르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간주했다. 예술에서의 이러한 완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세계상의 총체성이었는데, 이는 결코 여러 부분을 합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완전한 통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콰트로첸토는 세계를 하나의 끝없는 흐름과 완전히 극복, 종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 발전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주제는 이러한 세계에서 스스로 보잘것없다는 무력감을 느꼈고,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세계에 자신을 내맡겼다. 친퀘첸토는 세계를 유한한 하나의 전체로 체험했다. 세계는 인간이 파악한 만큼의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모든 완성된 예술작품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총체적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고 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은 완전히 현세지향적이다. 이 예술은 종교적인 소재를 표현하는 작품에서까지도 그 이상적 양식을 자연적 현실과 초자연적 현실을 대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자연적 현실의 사물들 자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 이러한 거리가 말하자면 시각적 경험의 세계 속에서도 사회생활에서의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가치의 차등을 낳는데 - 를 창조함으로써 달성하고 있다. 예술에서 보이는 조화는 현실생활의 모든 투쟁이 배제된 유토피아적 이상이며, 그것도 민주주의적인 원칙이 아니라 전제주의적인 원칙의 지배 결과로 생겨난 이상인 것이다. 그 작품들은 삶의 무상성과 일상성에서 벗어난 고양되고 세련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양식원리는 이들 작품의 묘사가 본질적인 것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본질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형적, 대표적, 비일상적인 것을 말하며, 그 표현가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들이 잡다한 현실로부터 떨어진 잠재적인 것으로 강조, 상승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예술에서 비본질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 우연적인 것과 일회적인 것, 특수한 것과 개별적인 것, 요컨대 콰트로첸토 예술에서는 현실에서 가장 흥미롭고 본질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던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엘리트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통용될 수 있는 '영원한 인간적'인 예술이라는 허구를 창조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가치를 영원, 불멸, 불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들의 예술도 양식사의 다른 모든 시기에서 생긴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구속되어 있고, 가치척도와 미의 기준도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초시간성이라는 이념 자체가 시대의 산물이며, 절대주의의 타당성이라는 것도 상대주의의 타당성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깔로까가티아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여러 요소 중에서 가장 크게 시대적 구속을 받으며 가장 엄격하게 사회학적 제약을 받고 있는 요소는 깔로까가티아(kalokagathia, 고대 그리스의 교양이상으로서 미와 선의 결합을 뜻함)의 이상이다. 당시의 미 개념이 귀족주의적 인격이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바로 여기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정당하게 평가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친퀘첸토에서 새롭다거나 귀족적 사고방식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미 15세기에도 사람들은 중세의 정신주의와는 반대로 육체의 아름다움에 따뜻한 눈길을 보냈던 것이다. 친퀘첸토에서 새로운 것은, 육체적 아름다움과 정력이 정신적 아름다움과 중요성의 완벽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중세에는 비감성적 정신과 비정신적 육체 사이에 서로 융합할 수 없는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대립이 시대에 따라 더 강조되기도 하고 덜 강조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항상 현존해 있었다. 콰트로첸토에 이르면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중세적 대립관계가 의미를 상실한다. 이 시대에는 아직도 정신의 중요성이 육체의 아름다움과 무조건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배제하지도 않고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전성기 르네상스에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이 예술의 기본 입장에서 볼 때, 예컨대 15세기 미술가들이 곧장, 그것도 신명이 나서 했던 것처럼 사도들을 평범한 농부나 장인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들에게는 예언자와 사도, 순교자와 성자들은 자유롭고 위대하며 힘과 위엄이 충만하고 장중, 숭고한 이상적 인간상이었고 또 완숙한 육감적 아름다움을 지닌 영웅적 인물들이었다. 다 빈치에서는 이러한 인물과 나란히 평범한 유형의 인물들도 아직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위대하고 고상한 인물들만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라파엘로의 <보르고의 화재>에 나타나는 물을 나르는 여자는 미켈란젤로의 마돈나상이나 여자 예언자의 상들과 동일한 부류에 속한다. 즉 장대하고 정력적이며 모든 행동에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사람들이다.

     

    Detail of Stanza dell'Incendio di Borgo by Rafaello

     

    이러한 인물들의 장대함은 엄청난 것이어서, 원래 나체묘사를 싫어하는 귀족계급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나체로 그릴 수가 있었다. 그들의 위엄은 나체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았다. 그들의 지체의 품위있는 생김새, 동작의 우아한 조화와 장중한 위엄은 그들이 평소에 입는 묵직하고 주름이 깊이 잡혀 있으며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는, 정성들여 선택된 고상한 의상과 똑같은 고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카스틸리오네가 <정신론>에서 달성 가능한 것이라고, 아니 실제로 이미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인격이상이 친퀘첸토 예술에 와서 표준이 되었는데, 다만 모든 고전주의적 예술작품이 그 모델을 좀더 큰 규모로 이상화한 것만큼 그러한 인격이상을 더욱 드높였을 따름이다. 달리 표현하면 궁정적 이상은 그 본질에서 이미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인간묘사에 나타나는 중요한 모티프를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틸리오네가 완전한 현세적 인간에게서 요구한 것은 무엇보다도 다재다능으로서, 육체와 정신능력의 균일한 발달, 무술 및 상류인사들과의 교제술의 동시적 숙달, 음악과 문학의 교양, 회화 및 학문과의 친숙 등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일체의 전문화와 직업화에 대한 귀족계급의 혐오임이 분명하다. 깔로까가티아의 이상을 체현한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의 영웅상은 바로 이러한 인간적-사회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궁정적 이상에 상응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 사이의 긴장의 해소나 육체적 아름다움과 정신적 힘의 동일화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와 그들의 모든 거동에 나타나는 여유와 거의 한가롭게 보일 정도의 평정이다. 카스틸리오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태연자약하며, 일체의 허식과 과장을 피하고, 매사에 자연스럽게 보이며, 경직된 자세를 취하는 법이 없고, 사교생활에서는 꾸밈없는 경쾌함과 힘 안 들이는 품위를 지니는 것을 고상함의 진수라고 보았다. 친퀘첸토 예술의 인물상에서는 이러한 태연자약한 거동과 여유있는 태도 및 행동의 자유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또한 지난 세기와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가늘고 창백한 고딕적 형식과 단속적이고 숨이 짧은 콰트로첸토적인 선은 이제 자신감에 찬 하나의 긴 흐름과 당당한 울림 및 수사학적인 활기를 획득하고 있으며, 고대의 고전주의적 예술 이후 어느 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형식의 완결성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이제 콰트로첸토 예술의 인물상에서 보이는 모나고 조급하고 급격한 움직임이나 과장되고 자기현시적인 우아함, 젊고 엄격하며 미숙한 아름다움에는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힘의 충만과 성년미의 완숙을 찬양하였고, 생성과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묘사했다. 그들은 이미 성공에 도달한 사람들의 사회를 위하여 일하였고, 그러한 사람들처럼 보수적이었다. 카스틸리오네는 고상한 사람은 그의 행동에서처럼 옷차림에서도 유난히 남의 눈에 띄거나 요란하고 울긋불긋한 색상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에스파니아 사람들처럼 검은색이나 아니면 적어도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기를 권장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취미의 변천은 이미 매우 깊이 진행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제 예술에서도 콰트로첸토의 다채로움과 밝음을 피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근대적인 취향을 지배할 단색, 곧 흑색과 백색에 대한 편애가 나타나고 있다. 색채가 사라진 것은 특히 건축과 조각에서이고, 그리하여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리스 건축이나 조각품이 다양하게 채색되었던 것을 상상하는 일이 매우 힘들게 되었다. 고전기 예술은 이미 고전주의 내지 신고전주의의 싹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것은 채 20년을 넘기지 못했다. 라파엘로가 죽은 후에는 더이상 집단적 양식경향으로서의 고전적 양식을 운위할 수 없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고전기가 이렇게 단명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근대의 모든 고전적 양식이 겪을 운명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봉건제도의 종언 이후로 안정의 시대란 일종의 막간극과 같은 것이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엄격한 형식주의는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끊임없이 하나의 유혹이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소박성이 결여되고 교양의 성격을 띤 몇몇의 단기적인 예술운동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그 지배적 위치를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엄격한 형식주의는 근대예술의 가장 중요한 지류로 남았다. 왜냐하면 엄격하게 형식주의적이고 전형적, 규범적인 것을 강조한 예술양식이 근대의 근본적 흐름인 자연주의에 대항해서 그 위치를 유지할 수는 없었지만, 르네상스 이후에는 또다시 비통일적이고 누가적cumulative, 병렬적인 중세의 예술양식으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우리들은 하나의 회화나 조각품을 단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한 현실의 집약적 표현, 다시 말하면 광범위한 세계와 여기에 맞서 대항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로부터 생겨나는 하나의 형식구조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술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대극성은 때로는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그후로는 한번도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르네상스의 진정한 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권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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