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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외면적 세련화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5. 28. 16:59

     

    출생의 차이가 이익을 주는 일이 줄어들수록 개인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더욱 커졌다. 그럴수록 사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제한되거나 고귀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태도나 높은 사교 형식은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예술이 된다. 

    의상과 유행

    사람들의 외면적인 모습과 주변, 그리고 일상 생활의 풍습이 이탈리아 바깥의 민족들보다 더 완벽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더 세련되어져 갔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소유했던 집들은 미술사가 다룰 분야이다. 여기서는 이런 집들이 쾌적함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조화롭고 합리적인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북유럽 권력자들의 성과 도시궁전을 얼마나 능가하는 것이었던가 하는 것만을 지적하면 될 것 같다. 옷차림은 너무나도 많이 바뀌어서 다른 나라의 유행과 일관된 비교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15세기 말부터는 다른 나라의 유행에 따르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탈리아 화가들이 자기 시대의 복장을 묘사한 것을 보면 전체적으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몸에 잘 어울리는 것이지만, 이 화가들이 당시 지배적인 것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밀하게 그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어쨌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탈리아처럼 의상에 그토록 많은 가치를 둔 곳이 없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국민은 허영심이 강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 밖에도 진지한 사람들도 가능하면 아름다운 옷차림을 개성의 완성으로 여겼다. 한동안 피렌체에서는 옷차림이 개인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누구나가 자시 자신의 의상을 걸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16세기 중엽까지도 중요한 사람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어쨌든 유행에다가 개성적인 부분을 섞어 넣을 줄 알았다. 조반니 델라 카사(1503~1556)가 눈에 띄는 옷차림, 유행에서 벗어난 옷차림을 경고했다면 그것은 이탈리아가 쇠퇴한다는 표지였다. 적어도 남자들의 의상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우리 시대는 그럼으로써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포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많은 시간을 아끼는 일이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불리함을 상쇄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Domenico Ghirlandaio, c 1488, Giovanna Tornabuoni and attendants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는 남자들에게는 규정된 복장이 있었고, 여자들에게는 화려함의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나폴리처럼 복장이 자유로운 곳에서 도덕론자들은 어느 정도 고통을 품고서, 귀족과 시민을 구별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 밖에도 그들은 벌써 너무나 빨리 변하는 유행과 프랑스에서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지 어리석을 정도로 높이 평가하는 것을 탄식하고 있다. 원래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것을 프랑스에서 되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의상 형태가 자주 바뀌고,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유행을 받아들이는 일이 일반적인 치장 욕구를 어디까지 부추겼는지를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것은 1500년을 전후한 수십 년 동안 이탈리아의 생활이 빠르게 바뀌었다는 것에 대한 문화사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화장

    여자들이 온갖 종류의 화장술을 통해서 외모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애쓴 것은 특별히 주목을 끄는 일이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로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도 르네상스의 이탈리아만큼 용모, 피부색, 머리 모양에 그토록 다방면으로 신경을 쓴 적은 없었다. 모두가 정상적인 모양을 갈망하였다. 심지어는 가장 눈에 띄는 모양을 하고서도 그랬다. 우리는 여기서 일반적인 의상의 추세가 14세기에 극단적으로 화려해지고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가 뒷날 더욱 세련되어졌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오로지 좁은 의미에서의 화장에만 국한시켜 관찰하기로 하자.

     

    1493: Portrait of Bianca Maria Sforza,by Giovanni Ambrogio de Predis

     

    무엇보다도 가발이, 심지어는 흰색이나 노란 비단으로 만든 가발이 널리 유행하였다. 그것은 금지시켜도 또다시 나타나곤 하다가 마침내 참회설교자가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공공 광장에 사치품들을 모아서 화려한 무대를 쌓아올렸다. 거기에는 류트, 주사위, 가면, 부적, 노래책들과 가발도 놓였다. 정화시키는 불길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원래 자기 것이든 아니면 덮어 쓴 것이든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머리 색상은 금발이었다. 그리고 햇빛을 쬐면 머리카락이 금발로 바뀐다는 소문이 퍼져 날씨가 좋으면 하루 종일 햇볕 아래 나가 있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 밖에도 머리 염색약이나 다른 혼합제를 쓰기도 했다. 여기에 화장수, 연고, 얼굴의 각 부위를 위한 화장품, 우리 시대에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눈꺼풀과 치아를 위한 화장품 등이 쓰였다. 시인들의 비웃음도 참회설교자들의 분노도, 피부가 일찍 상한다는 경고도 여자들이 자기 얼굴을 다른 색깔로, 심지어는 다른 모양으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몸에 색을 칠하거나 화장을 하고 등장하는 신비극이 자주 그리고 매우 화려하게 공연되곤 했다는 사정도 일상 생활에서 지나친 화장을 부추겼다. 어쨌든 그런 일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시골 처녀들도 있는 힘껏 유행을 쫒았다. 그런 일은 남의 정부라는 표시라고 아무리 설교를 해도 소용 없었다. 가장 존경받는 여자들도 보통은 1년 내내 화장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명절 때면 화장을 하고 나타났다. 이런 악습을 야만인들이 몸에 색칠을 하는 일과 같은 일로 보고 야만인의 표지라고 여기거나, 아니면 이런 화장이 대단히 조심스럽고 다양하다는 점으로 버아 모습과 색깔에서 젊은 아름다움을 갈망한 결과라고 여기거나 어쨌든 남자들은 계속해서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 향수 사용도 역시 정도를 지나쳐서 주변의 모든 물건으로 확대 되었다. 축제 때면 노새들까지도 연고와 향수로 단장되었고,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코시모에게 향수 뿌린 돈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삶의 세련화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북부 사람들보다 더 깨끗하다고 확신하였다. 일반적인 문화사적 근거에서 보자면 이런 생각을 비난하기보다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깨끗함이란 현대적인 개성의 완성에 속하는 것이고, 현대적인 개성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민의 하나였다는 점도 그 사실을 확인해준다. 절대로 입증이 되지는 않겠지만 누가 가장 먼저 깨끗함의 원칙을 갖게 되었느냐가 문제된다면 중세의 기사문학이 그 점에서 더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몇몇 탁월한 르네상스의 대표자들의 경우 생활 전체를 특별히 청결하게 유지했다. 특히 음식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강조하였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선입견으로 도이치 사람을 더러움의 정수라고 여겼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짜가 도이칠란드에서 교육을 받고서 어떤 불결한 습관을 가져왔는가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이런 습관들이 얼마나 눈에 띄었는가 하는 것을 조비오의 책에서 읽을 수 있다...

    16세기 전반에는 피렌체에서 태어난 조반니 델라 카사가 <예절>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예절 교육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좁은 의미에서의 깨끗함뿐 아니라 우리가 보통 '적절하지 못하다'고 부르는 모든 습관들을 끊을 것을 강조하는데, 도덕론자들이 최고의 풍속법을 옹호하는 것과 똑같은 열렬함으로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나라 문헌들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더러운 것을 끔찍하게 묘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깨끗함을 가르친다. 그 밖에 <예절>은 좋은 습관, 다른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예의 등에 대해 아주 재치 있게 써놓은 훌륭한 지침서이다. 오늘날에도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읽으면 아주 쓸모 있는 책이다. 유럽의 예절은 그가 적어놓은 규정들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예의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모든 민족, 모든 문화의 시작부터 이미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의지력으로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최초로 그것을 보편적인 의무이자 교양과 교육의 표지로 인식하였다. 이탈리아 자체도 앞선 2백년 동안 대단한 변화를 겪었다...사람들이 도시의 한계를 벗어나서 세계시민적이고 중립적인 예의와 배려를 발전시켰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가 있다. 

    이탈리아인의 외적인 생활 전체가 15세기와 16세기 초에 세계 어느 국민보다 세련되고 아름다워졌다. 오늘날의 안락함을 형성하는 것들 중 일부가 입증 가능한 형태로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탈리아 도시들의 잘 포장된 거리에서는 마차를 타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아직 다른 곳에서는 걷거나 말을 타고 다녔고 어쨌든 재미삼아 마차를 타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다른 어느 나라의 문헌에서도 아직 나타나지 않던 것으로, 부드럽고 탄력있는 침대, 값비싼 양탄자, 화장실 용품 등을 이탈리아 소설에서 읽을 수 있다. 흰 아마포의 양이 많고 섬세하다는 표현도 자주 볼 수 있다. 많은 것은 이미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면에서 예술이 사치를 고귀하게 만드는 것을 경탄하면서 보게 된다. 그것은 화려한 식탁과 가벼운 선반들을 훌륭한 식기들로 채우고, 벽걸이용 양탄자의 화려함으로 벽을 장식하고, 야간용 탁자를 모양을 넣은 과자들로 장식할 뿐만 아니라, 소목장이의 영역을 놀라운 방식으로 완전하게 발전하도록 만들었다. 중세 마지막에 부유함을 얻자마자 유럽 전체가 비슷한 길을 갔었다. 다만 중세는, 일부는 유치한 화려함으로 나타나고, 일부는 일방적으로 고딕 양식의 장식에만 사로잡혔다. 반면에 르네상스는 자유롭게 각 분야의 감각에 따라 발전되면서 훨씬 더 많은 주문자를 위해 일했다. 그럼으로써 16세기가 지나면서 모든 방향에서 이탈리아 장식 형식이 북부 유럽의 그것에 대해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여기에는 더 크고 보편적인 이유들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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