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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분 평준화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5. 19. 14:32

     

    피렌체에서 기사의 작위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종류의 신분 상승 욕구는 예술과 교양에 대한 숭배와 극히 웃기는 방식으로 서로 어긋난다. 맨 먼저 유행하게 된 것은 기사 작위를 얻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작위가 이미 그 옛날 영광의 그림자조차도 잃어버리고난 다음에 말이다. 프랑코 사케티는 14세기 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몇 년 전에는 빵 굽는 사람, 양털 긁어 모으는 사람, 고리대금업자, 환전상, 사기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수공업자들이 기사가 되는 꼴을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도대체 관리가 지방 도시에 기사로 등장하려고 그런 작위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작위는 보통의 직업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오 불행한 작위여, 어쩌다가 그렇게까지 추락했는가! 그들은 기사의 의무를 늘어놓은 긴 목록들을 반대로만 행한다. 나는 독자들이 기사도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했다. 이제는 죽은 사람까지도 기사라고 선언하는 판이니 나무토막이나 돌덩이, 혹은 황소도 기사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사케티가 증거로 제시한 이야기들은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우리는 베르나보 비스콘티가 술 싸움의 승리자와, 이어서 패배자까지도 조롱적으로 기사라는 호칭으로 장식해준 것, 그리고 도이치 기사들이 투구 장식과 휘장을 가지고 최고를 다툰 것등을 읽을 수 있다. 뒷날 포지오는 말도 없고 전쟁 연습도 하지 않는 수많은 기사들을 비웃었다. 기사단의 명예로운 권리, 예를 들면 깃발을 들고 출정하는 권리를 누리려는 사람은 피렌체에서는 정부나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힘들게 맞서야 했다. 

     

     

     

    마상 창시합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출생에서 비롯된 귀족과 무관하게, 그리고 아주 뒤늦게 나타난 이런 기사 제도는 물론 일부는 단순히 작위만을 갈망하는 웃기는 허영심의 소산이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또 다른 측면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마상 창시합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합에 참가하려는 사람은 형식 때문에 기사가 아니면 안 되었다. 닫혀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기, 규칙이 엄격한, 때로는 대단히 위험한 마상 창시합은 힘과 용기를 보여줄 기회였다. 발전된 개인은 - 출생과 무관하게 - 그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페트라르카가 이미 심한 넌더리를 내면서 창시합을 가리켜서 위험하고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 어디서도 스키피오나 카이사르가 창시합을 했다는 말을 읽을 수 없다!" 고 열정적으로 외쳤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것은 피렌체에서 점점 더 인기를 얻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창시합을 - 물론 훨씬 덜 위험한 형식이었지만 - 일종의 정규적인 스포츠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프랑코 사케티는 어떤 일요일의 창시합자의 끝도 없이 웃기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는 염색업자에게서 빌린 형편없는 말을 타고서 싼 값으로 창시합을 벌일 수 있는 페레톨라로 간다. 그러나 악당들이 말 꼬리 밑에 가시 하나를 찔러 넣는다. 짐승은 도망쳐서 투구를 쓴 기사를 싣고 도시로 돌아온다. 그런 멍청이 짓에 화가 난 마누라가 늘어놓는 설교가 이야기의 필연적인 종결 부분이다. 

    마침내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창시합을 진짜 정열로 여겨 받아 들인다. 그들은 귀족이 아니니 평민 혈통으로서 바로 이 분야에서 자기들의 사교 그룹이 다른 궁정과 같은 등급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코시모 치하에서(1459), 그리고 이어서 피에트로 1세 치하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대규모 시합들이 피렌체에서 열렸다. 피에트로 2세는 이 오락에 빠져서 통치를 게을리하였고 반드시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만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궁정에서도 창시합이 열렸다. 추기경 아스카니오 스포르차가 터키 왕자 쳄에게 이 구경거리가 어떠냐고 묻자 왕자는 아주 현명한 대답을 하였다. 자기 고향에서는 그런 일은 노예들에게 시킨다. 그들이 쓰러져도 아무도 해를 입지 않도록. 이 동방의 왕자는 그때 알지는 못했지만, 이 중세의 관습에 대해서 로마인들과 같은 의견을 말한 것이다. 

    기사Ritter 작위가 이렇게 유지된 것과 별개로, 페라라 같은 곳에서는 기사라는 호칭을 지닌 궁정기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과 기사들의 개별적인 요구와 허영심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탈리아 귀족 계급은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사회의 극단적인 가장자리로 밀려나지는 않았다. 귀족은 언제라도 평등의 발판 위에서 모든 신분의 사람들과 교제하였고, 재능과 교양을 집 안에 두고 가까이 하였다. 그러나 영주의 궁정인이 되려면 귀족 신분이어야 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물론 공개적으로 밝혀지고 있듯이 그것은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이며, 귀족이 아닌 사람은 내적으로 그런 자질을 가질 수 없다는 망상을 분명히 거부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귀족이 아닌 사람이 영주 가까이 머무는 일이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았다. 완전한 인간인 '궁정인'에게는 그 어떤 특권도 부족하지 않도록 배려되었다. 모든 일에서 어느 정도의 절도를 지키는 것이 궁정인의 법칙이라면 이것은 그가 고귀한 혈통 태생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섬세한 개인적 완성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교양과 부유함이 어디서나 사회적인 가치의 척도가 되는 현대적인 고귀함을 여기서 보게 된다. 부의 경우는 그것이 교양을 위해 삶을 바치고, 그 관심을 더욱 확장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만 중요하게 여겨졌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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